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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소문 - 믿음의 경계지대에 선 회의자를 위한 안내서
필립 얀시 지음, 홍종락 옮김 / 포이에마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신앙의 선배로 자신의 신앙 여정을 드러내며 자신이 마주했던 고민과 깨달음을 나누고, 현실에 적용할 수 있게 돕는 것은 귀하고 고마운 일이다. <수상한 소문>은 원제/부제가 말하는 것처럼 ‘믿음의 경계지대에 선 회의자를 위한 안내서’로 필립 얀시가 근본주의 기독교 환경에서 자라면서 회의했다가 회복하는 과정을 거친 후, 이후 삶에서 깨닫고 느낀 것을 나누며 한쪽으로 쏠리기 쉬운 두 세계의 균형을 맞춰 가길 바라는 글이다.
먼저, 오늘날 환원주의자가 만들어 놓은 ‘신을 지워버린 세계’가 어떻게 황폐해졌는지 보여준다.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초월성, 신성을 덜어낸 빈자리를 역시 보이지 않는 강렬한 감각과 중독으로 메워가며 이전의 만족을 되찾고자 애쓰는 현대인의 병폐를 나열하고, 그 혼란한 세계에 물든 기독교를 살핀다.
그러고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하나님이 마련한 진수성찬을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 균형 잡힌 시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보이는 세계에서 온전하게 삶을 즐긴 예수처럼 사는 것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의 뜻이다.
한국 교회의 잘못을 따져 물으며 회의했던 나는, 나도 결국 한국 교회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부끄러워졌다. 삶을 즐기고 있다고는 하지만 나에게 여전히 하나님은 두려운 심판자이고, 세상은 언제 닥칠지 모를 범죄와 사고로 두렵기만 하다. 잡혀갈 죄를 짓지 않았을 뿐, 불평과 험담은 남들 못지않아 선량한 척 분란을 조장하기도 여러 번이며, 책 좀 읽었다고 잘난 척은 또 얼마나 해댔는지! 그리하여 내가 얼마나 못난 사람인지 <수상한 소문>은 나를 돌아보게 했다.
그러나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현실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p.276’ 있다거나 좌로나 우로나 떨어질 위험이 있는 ‘말타기의 스릴p.90’이 있는 ‘균형 잡힌 삶’에 대해 말하기 위해 이분법의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다. 그리스도인과 환원주의자 사이에 선을 그으려다 보니 다소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경계에 서 있다기보다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혼재된 공간에 머무르며 사는 것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이분법적 사고는 보이지 않은 것을 설명하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아름다움을 설명하기 위해 ‘엘리펀트맨’을 선택한 것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극명하게 가르기 위한 극단적이고 그리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고난에서 벗어나길 기도하는 미국 기독교인에게 ‘다른 나라는 그렇지 않다p.317’며 고난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나라를 소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더 염려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인데, ‘운동선수의 기예, 슈퍼모델의 아름다움, 성공한 사람들의 재능을 하나님의 선물로 보는p.297’ 것은 자칫 또 다른 면에서 선수나 슈퍼모델의 ‘보이지 않는’ 땀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죄를 악에 의한 것으로 말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려다 스스로 세계를 양분해버린 셈이다.
기부금 영수증이 없는 곳에 기부하면서도 다음 달 약정금액을 맞추지 못할까 걱정을 하고, 가난한 것이 부끄럽지 않다고는 하지만 빚과 빚질 것들 때문에 한숨 쉬는 가족을 보면서도 하늘의 것만을 바라보며 살기는 쉽지 않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걸 기뻐해야 한다지만, 거대한 악은 영악해져서 이제는 핍박하기를 멈추고 스스로 죄에 빠지도록 내버려두니 어느 지점에서 기뻐해야 할지 알 도리가 없다. 이런 문제는 다음 세대인 우리의 몫으로 여기고, 겹쳐있는 세계를 입체적으로 보도록 정진하며 더 세밀한 이야기로 나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