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첫머리를 읽다가
기대가 너무 컸다는 느낌이 들며
제풀에 지쳐 밀쳐두었던 책이

어느 구석에선가 조용히 끈기있게 두어 계절을 나고
늘 분주하게 지나던 길에 엎어져 누운 채로
내 발길을 멈추고, 눈길을 붙잡고, 손길을 끌어당겨서
나는 날을 넘기며 식탁에 혼자 앉아
작가, 기획자, 출판사, 출판일, ISBN 번호가 나열된
마지막 장까지 단숨에 읽었다.

맘에 차던 표지는 여전히 좋았고
나와는 정반대로
부지런하고 깔끔하고 집요하고 적극적이고 분명한 남자
가 살아가는 모습을 잠시 엿보았다.

오감마저 게을러
맛도 향도 색도 맘도 둔한 탓에
맛있고 향기로운 아름다운
그리고 설레는, 놀랄만큼 싸고도 자존감마저 넘치는
그의 커피에 대해
아쉽게도 한 번 마셔보지도 못한 내가
어쩌구저쩌구 무어라 논하기는 힘들지만

얼추 30년 전쯤 몇 해 살았던 신수동과
그의 커피집을 드나드는 지인들이 어른대는 시공을
잠시 거닐어 나는 좋았다.

얼마 전에 어디선가
좋아하는 일을 하거나,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라는
얘기를 들었다.

정말로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일이어서 그랬는지
그러나 그러기 쉽지 않다는 것이 안타까워 그랬는지
그렇게 치열하게 살기는 힘겨워 싫다는,
이 놈의 게으름을 외면하느라 그랬는지
열정과 노력과 안목과 추진력으로 메우고 싶은 구멍이
이 나이 먹도록 여전히 너무나 커서 그랬는지
나는 헛웃음이 났더랬다.

어린 이들이나
푸른 이들이나
마구마구 나이 들어가는 이들이나
이미 늙은 이들이나
그 어떤 자리에 있든지

자, 지금부터 당신은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라고 묻는 듯한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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