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기다리면서 책을 읽고 있었더니 같은 반 남자친구가

 

    - 나도 셰익스피어 잘 알아

 

   그래? 그럼 5대 희극 중에 하나만 말해 봐

 

   - 헨리

 

   햄릿? 그건 비극이거든!

 

   -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건 햄릿에 나오는 대사잖아!

 

 

중학교 첫 시험을 치고 휴대폰 압수도 미흡하여 통화정지까지, 상황이 그러하였다.

 

시험 전 날

 

어차피 지금 벼락공부하는 것보다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 그림을 그리겠다고 해맑게 얘기하더니

 

둘째 날

 

시험 끝나고 누구랑 어디서 어떻게 신나게 놀지 계획을 세우는 것이 역시 심신의 안정에 도움이 되겠다고 룰루랄라 하더니

 

역시나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어서 결과는 엉망이었다.

 

노력하지 않고 결과가 좋으면 그게 사기일텐데 다행히 세상은 여전히 정의로웠다.

 

시골이라도 늦은 밤까지 사설학원에서 수업 끝나고 자율학습하는 아이들도 있고

 

그런 학원 안 다니지만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매일 한 시간 반 이상 공부하고 줄넘기 1000개 하고 잠든다는 1등하는 친구도 있다.

 

과목마다 성적이 속속 나오자 미니아빠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미니를 앞에 앉혀놓고 다다다다 다다다다 잔소리를 퍼부었건만

 

따님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아빠가 정성껏 삶아놓은 족발 한 접시를 그 사이 깨끗하게 해치웠다.

 

사춘기 일발 장전인가?  참으로 천연덕스럽기도 하였다.

 

연대책임으로 엄마에게도 쏟아지는 잔소리를 피해서 낮에 다 못한 일을 하고 있었더니

 

따님은 몸소 엄마를 찾아와

 

시험을 그렇게 치고도 아빠한테 말 걸고 싶으냐? 하셔서

 

시험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 좀 못 쳤다고 부녀 간의 연을 끊을 수는 없지 않겠냐고 말씀드렸다는 소식을 전하며

 

파인애플 좀 깎아달라는 한가하고 기막힌 부탁을 하였다.

 

따님 말씀과 같이 시험은 못 쳤지만 그래도 내 딸인지라

 

한 조각 깎는 시범을 보여주었더니 일말의 양심이 발동했던지 직접 하겠다고 해서 두고 나왔다.

 

다음 날 아침, 음식물 쓰레기 통을 열었더니 파인애플 한 통의 사체가 장렬하였다.

 

동생들과 사촌언니와 두 통의 파인애플을 먹어치운 후 다시 혼자서 한 통이라니 잠시 어이가 없었다.

 

초등학생 때는 그래, 지금은 놀아야 할 때지 이렇게 무덤덤했는데

 

잠깐 돌아선 사이 중학생이라고 이제는 걱정스럽다.

 

영수국 다 안되는 것도 그렇고,

아빠한테 뻣뻣한 것도 그렇고,

저렇게 먹은 게 제대로 다 소화될까 싶은 것도 그렇다.

 

미니가 아장아장 걷기도 전부터 우리 집에 들린 손님들은 진지하게 걱정을 했다.

 

여기서 애는 어떻게 가르칠 것이며 학교는 어디로 보낼거냐고.

 

살아오면서 내린 결론은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할 때는 이 곳이 미니의 동생에게 더할 나위없는 곳이라

 

미니가 일찍 집을 떠나기 싫다면 여기서 중고등학교를 다녀야 한다.

 

자사고, 외고, 과고에 진학하려면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관리하여 포트폴리오를 만들어도 쉽지 않다고

 

도시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과 부모들이 충고를 하였다.

 

사실 면소재지의 중학교에서 놀며놀며 공부하여서는

 

안심할 수 있는 기숙사를 제공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확률이 거의 없으므로

 

너에게 열정과 의지와 목표와 능력이 있다면

 

고등학교 졸업하고나서 비로소, 뒤늦게, 어렵게, 처절하게

 

공부하고 준비하고 도전하고, 운이 좋으면 성취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만족하고

 

그럴 수 밖에 없다는 무대책이 엄마의 유일한 대책이라면 대책이다.

 

당장 엄마가 그런 열정과 의지와 목표와 능력과 인내를 완벽하게 구현하여 보여준다고 해도 될까말까 한 일이지만

 

따님이 앞으로 그런 열정과 의지와 목표와 능력과 인내, 그 어려운 걸 해내길 막연히 기대했는데

 

역시나

 

엄마든 딸이든 그런 삶은 쉽지 않다.

 

공부하기 싫으면 책이라도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무런 기준없이 즉흥적으로 사들인 몇 권의 책이 전부다.

 

미니 친구녀석은 헨리로 미니를 골려먹은건지 아닌지 아직도 알쏭달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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