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성균관 유림의 한분이셨다.
온동리에 그 명망이 자자하신 분이셨고 성정이 온후하셔서 지금도 할아버지를 존경하는 분들을 간혹 만나게 된다.
하지만 남산골 선비라는 말도 있듯이 가난하기 그지 없는 집안... 어린 나이부터 그런 집안을 돌보아야 했던 내 아버지는 젊은 날, 지긋지긋한 그 가난함과 유학의 고리타분함에 질려 그 반발작용의 하나로 선교사에게 영어를 배우고 끝내 교회에 다니셨다.
교회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온집안을 들쑤셔 놓은 판국에 황해도의 부잣집 막내딸로 공부만 했지 지나간 그 시대의 기준으로 보아 여자로서의 덕목이라 할만한 것은 무엇 하나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홀홀단신 월남한 여자와 교회에서 만나 결혼을 하겠다고 데리고 온 아버지로 인해 할머니는 자진을 하셨다. 귀신이 되어서 당신 마음에 차는 그런 여자와 일년 안에 다시 결혼하게 만들 것이라고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는 할머니의 죽음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는 어른이 되어서야 들을 수 있었다.
엄마의 삶도 고난하기 그지 없었지만 아버지의 삶 또한 편하지 않았다.
내가 제법 자랐을 때 모든 것을 뒤엎어버리기라도 하시듯 그동안의 삶의 방식을 다 버리시고 유교로 회귀하신 아버지
유아세례까지 받게 하셨지만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갑자기 아버진 이제 더이상 교회에 가지 말라고 엄명을 하시고 다시 제사를 모시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제사를 드리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기독교식으로 약식으로 드렸었는데 갑자기 홍동백서, 조율이시, 좌포우회, 어동육서...와 같은 용어가 들려오고 유세차~~~~~~ 로 시작하는 떨리는 듯한 아버지의 음성은 어린 귀에 듣기에 너무나도 낯설고 싫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기독교 신앙에 대해 차마 손을 놓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유약함을 지니고 계셨기에 아버지는 늘 혼자만의 싸움으로 부상당하시고 회복하시고...를 반복하셨다.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싫어서 떨쳐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떨칠 수 없게 뼈속 깊이 들어와 버린 儀式과 意識들, 그러나 그것들이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소멸되어 버릴 수 밖에 없음을 직접 확인하는 증인의 입장이 되어버린 아버지에겐 종가집이라는 방패가 필요했고 그랬더라면 당신의 삶이 더 편했을런지도 모른다.
"종가도 아니면서..."라는 말을 스스로 자주 하신 이유가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소설 달의 제단을 읽으면서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아버지도 힘드셨을 것이다. 본인의 젊은 날이 후회스러웠을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끝끝내 그렇게 엄마에게 정을 주시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지나간 시대의 일부가 되지 못함을 안타까와 하면서 어떻게든 부여잡고자 애쓰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내게는 안쓰럽기 그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