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미피예요. 50년쯤 전에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아기토끼죠. 아주 어린 아기용 그림책에 나오는 동물 중 하나 정도로 여기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래 봬도 제가 나오는 책은 세계 40여개 국에서 1억 권 가까이 팔렸고, 어떤 조사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에 미키 마우스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구요!

어린 아기들 친구답게 저는 아주 단순해요. 대단한 모험을 하는 것도 아니고 뭘 많이 가르쳐 주지도 않는답니다. 아기토끼라는 건 정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요. 하다못해 생쥐도 코끼리를 놀래 준다든가 밧줄을 쏠아 사자를 구해 준다든가 할 수 있는데 말예요. 풀잎이나 오물오물 먹고 있다가 뭔가에 놀라 도망가는 게 고작이잖아요.

하지만 딕 브루너 아저씨는 바로 그 때문에 저를 아기들의 친구로 삼은 게 아닐까요? 능력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의미있고 기쁨을 주는 아기와 가장 비슷한 게 토끼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요? 저를 통해서 뭔가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것을 나타내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제가 왜 그렇게 단순한 색과 단순한 선으로만 그려졌는지도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제 책에 주로 쓰이는 빨강, 노랑, 파랑은 그냥 단순한 색이 아니라 ‘삼원색’이에요. 그러니까 가장 기본적인 색이면서도 서로 섞여 온갖 색깔을 만들어낼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도 담고 있는 거죠. 저나 제 친구들이 보여 주는 단순한 형태와 동작도 실은 브루너 아저씨가 수백 번 그려본 끝에 “이거다!” 하고 내놓는 거래요. 독자들이 그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형태와 색깔 너머로 무한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예요.

 

그래요. 가장 제한되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가장 널리 펼쳐져 있는 세계를 갖고 있는 게 바로 저랍니다. 그리고 저는 그걸 말 없는 말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가만히 보세요. 제 입은 언제나 x자로 꼭 다물어져 있잖아요. 하지만 또 거의 언제나 귀를 높이 세우고 눈을 반짝 뜬 채 정면으로 가만히 여러분을 쳐다보고 있어요. 여러분도 저를 가만히 쳐다봐 주세요. 그러면 다 들리고 보이는 것 같지 않으세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 뒤에 있는 모든 것들이 말예요.


김서정(동화작가·공주영상정보대교수)

 

출처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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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키웨이 2004-06-27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화전 다녀온 기념으로 ^^

반딧불,, 2004-06-27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흑..
울딸이 프린트해달랍니다..
토끼라면 자다가도 벌~~떡!!

바람꽃 2004-06-27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님 둘째가 토끼를 좋아하는군요~
우리딸은 강아지를 좋아하죠.

starrysky 2004-06-27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소개글도 너무 예쁘네요. 음, 역시 동화작가가 쓰신 글이라 다르군요.
저 좀 퍼가도 될까요? 허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사와요. ^^

밀키웨이 2004-06-27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스타리님 새삼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