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로버트 달 / 동명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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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몇 년 전에 학교에서 누가 봐도 뻔히 정치꾼인 사람이 총학생회장에 당선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민주주의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품은 적이 있다. 한국에서 공부 제일 잘하는 사람만 모아놓은 서울대에서(나는 경제학부에 재학중이다)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조금만 주의 깊게 들여다보아도 정치 모리배에 지나지 않는 사람을 총학생회장으로, 그것도 대다수의 선거소에서 압도적인 1위로 당선시키다니. 한국에서 제일 똑똑한 놈들만 모아놓은 곳에서도 중우정이 발생하는데, 평균적인 시민이 공공선에 입각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가졌던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의혹과 회의는 사실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테네의 민주정체가 내렸던, 민주정체의 역사상 가장 최악의 결정 중 하나. 아테네의 시민들은 소크라테스를 죽였다. 사실 내가 투표하고 관찰하였던 총학생회 선거는 아테네 중우정의 반복에 불과하다. 사실 아테네의 민주정은 참여할 수 있었던 시민이 일상적인 경제활동으로부터 상당 부분 해방되어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들이 웅변과 수사, 논리학 등을 시민의 교양으로써 일정 수준 이상 체화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일정 연령 이상의 일반 시민들에게 차등 없이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기회를 주는 현재의 민주주의체제보다 훨씬 더 엘리트주의적, 제한적인 정체에 가깝다. 다시 한번. 그렇게 잘 교육받았던 아테네 시민들은 소크라테스에게 독배를 강요했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총명한 사람들의 집단인 서울대학생들은 정치 모리배를 총학생회장으로 선출하는데, 지적 수준에 관계 없이 공동체의 성원 모두에게 의사결정권을 부여하는 민주주의는 더욱 더 중우정으로 타락할 가능성이 크지 않겠는가? 민주주의는 과연 지지할 만한 정치체제란 말인가?
 
   로버트 달은 나의 이러한 의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지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달은 민주주의를 모든 성원들이 정치적으로 평등한(politically equal) 존재로 간주되는 정체로 정의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는 것은 모든 성원들이 정치적으로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함을 의미한다. 그는 민주주의가 지지되어야 하는 이유를 현실적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현실적이라는 말은 민주주의가 좋은 것이니까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는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지 않고 민주주의가 왜 좋은 제도인지를 논증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의 주장은, 거칠게 말하자면 민주주의가 다른 대안들보다는 그나마 더 낫다는 것이다. 즉 다른 대안적인 제도들은 민주주의만큼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을 보장하여 주지 못하며, 민주적 정부 하에서 개인은 가장 높은 수준의 정치적인 평등을 누릴 수 있다. 게다가 실증적 증거들은 민주적 정부를 가진 국가들은 상호간 전쟁을 하지 않는 데다가 비민주적 정부를 가진 국가들보다 경제적으로 더 번영하는 경향이 있다.(pp.87-88)

   민주주의 대신에 생각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은 무엇이 있을까? 독재와 군주정을 논외로 한다면 민주주의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제시되었던 대안은 수호자주의이다. 플라톤이 아테네의 민주정체가 중우정으로 타락하고 소크라테스의 죽음으로 파산하는 것을 목도한 후 이른바 철인(哲人)정치를 그 대안으로 주장한 이래, 수호자주의는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대안으로 인식되어 왔다. 달의 정리에 의하면 수호자주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일상적인 사람들은 스스로 통치할 충분한 능력이 없다. 2)수호자들(Guardians)의 이익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우월한 것은 아니나, 수호자들이 일반선(the general good)과 이 일반선을 달성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에 관한 지식에 있어서 우월하다. 3)따라서 공공선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호자들에게 통치를 맡겨야 한다.

   달은 이러한 수호자주의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수호자주의자들의 주장이 타당성을 가지려면 다음의 두 주장이 설득력을 가져야 한다: 1)일반인들보다 공공선과 그를 달성할 수 있는 수단에 관한 우월한 지식을 가진 통치 엘리트들이 창출될 수 있다. 2)통치 엘리트들은 공공선의 추구에 헌신적이므로 시민은 안심하고 그들에게 통치권력을 맡길 수 있다. 달은 이 두 주장 모두가 설득력을 가지지 못하는 것으로 본다. 우선 “국가를 잘 통치하는 것은 엄격한 과학적 지식 그 이상을 요구한다.”(p.102) 가장 항해기술이 뛰어난 선장이 배를 가장 잘 모는 것 또는 가장 의술이 뛰어난 의사가 환자를 잘 치료하는 것과 국가를 통치하는 것은 같은 층위에 놓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를 통치한다는 것은 공동체가 추구할 목표를 설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훌륭한 목표들은 종종 상호간 갈등적이다. 예컨대 자유와 평등의 대립. “다른 목표의 일정 정도를 얻기 위해 하나의 목표, 가치, 목적을 얼마만큼 희생해야만 하는가를 결정함에 있어, 우리는 필연적으로 엄격한 과학적 지식이 제공할 수 있는 이상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다.”(p.103) 게다가 목표의 합의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어떠한 수단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 채택한 방법이 야기할 부작용의 불확실성.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명확한 해답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과학적’ 또는 ‘전문’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집단이라는 것이 도대체 존재하거나, 아니면 그러한 집단이 창출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p.104) 게다가 지식을 가진 통치엘리트들이 창출될 수 있는지의 여부와는 별개로, “지식(knowledge)과 권력(power)은 별개의 문제이다.”(p.104) 즉 지식을 가진 자들이 존재한다는 점이 곧바로 그들이 공공선에 충실할 것임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권력은 언제나 남용의 위험을 가지며, 액턴 경의 말대로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으며,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호자주의를 취하여 그들에게 모든 통치권력을 부여하는 것보다는 단지 그들의 조력을 받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 이득이다.

   이러한 달의 반론은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 결과 “국가의 통치에 대한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권위를 담당해야만 할 정도로 통치에 대한 자격이 단정적으로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다면, 그렇다면 법을 준수해야 하는 모든 성인들보다 더 참여자격이 뛰어난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 모든 성인들은 국가통치의 민주적 과정에 참여할 충분한 자격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법에 의해 보호되어야 한다.”(pp.108-109) 나는 달의 이러한 결론을 잠정적으로 수용하기로 했다. 처칠의 말처럼 민주주의가 최악 중의 차악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생각했던 가장 유력한 대안이었던 수호자주의의 설득력 있는 주장을 읽을 때까지는 통치 엘리트들에게 견제되지 않는 권력을 주는 것보다는 견제 받는 권력을 위임하는 편이 나 자신과 공동체 성원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서는 낫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중우정의 문제는? 그것은 민주주의의 비용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 모든 정치체제는 타락의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독재나 폭군의 지배보다는 중우정이 낫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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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너비 윈투어 - 스타일리시한 포스를 만드는 39가지 자기경영법 Wannabe Series
제리 오펜하이머 지음, 김은경 옮김 / 웅진윙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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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책의 원제목인 <>는 패션쇼를 관람하는 맨 앞자리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 맨 앞자리는 패션계의 거물에게만 허용되는 자리이다. 안나 윈투어의 패션계에서의 위치를 함축하는 단어가 책의 제목이 되었는데, 저자인 제리 오펜하이머는 가십 기사의 감각으로 윈투어의 성공을 추적한다. 속도감 있게 재미있게 읽었으나 두 번 읽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2.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 안나 윈투어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사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미국 <>>의 편집장을 오래 하고 있다는 것, 패션계의 거물로 엄청난 파워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멜린다 프레슬리의 모델이라는 것 정도였다. 나는 책은 읽지 않고 영화만을 보았는데 거기서 편집장은 부하 직원에게는 거의 악마와 같은 상사로 그려지고 있다. 요컨대 안나 윈투어는 성격이 매우 나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관심사는 단 하나에 집중되었는데, 이는 성격은 개차반인데다가 직장 동료와는 불화만을 일으키기 십상이었던 안나 윈투어라는 인물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가이다. 물론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그녀 일신의 능력에 있을 것이다. 패션에 대한 그녀의 확고한 가치관과 신념, 탁월함을 포착할 수 있는 심미안, 목적을 설정하고 그 달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는 삶의 태도: “안나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고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으며 목표에 도달하겠다는 결심으로 앞만 보며 나아갔다.”(p.167) 이런 맹렬한 추진력과 삶을 조직하는 능력은 놀라운 성공을 거둔 사람들의 상당수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만으로 충분한가? 안나 윈투어는 직장 동료들에게 환영받을 만한 캐릭터는 아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자신이 통제하고 싶어했고,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기보다는 자신의 안목을 신뢰하고 그것을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타입이다. 그리고 모든 영역에서, 혼자만의 힘으로는 정점에 올라가지는 못할 것이다. 직장 동료들과 자연스레 융화되지 못하고 상사와 자주 반목하는 윈투어는 어떻게 패션계의 정점에 이를 수 있었을까? “안나는 유능한 사람들을 주위에 포진하는 사람이거든요.”(p.137)

   성격 나쁜 안나 윈투어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은 일견 모순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일반적인 '인간관계'와 '인맥관리'의 방략이 서로 다름을 의미한다. 안나는 필요한 사람을 옆에 두는 데에 비상한 능력을 가졌다. 그에게 필요한 사람은 크게 보아 두 유형이었다: i)잡지사의 실권자나 경영자로 안나 자신에게 필요한 지위와 권한을 줄 수 있는 사람 ii)잡지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사람. 첫 번째 유형의 사람들에게는 안나는 재능과 매력으로 어필했다. 예컨대 <>의 리버맨과 같은 사람에 대한 언급: "리버맨에 안나에게 완전히 빠졌을 거란 확신이 들어요. 안나는 무척 매력적인 여자니까요. .. 더욱이 리버맨은 안나의 재능도 알아보았어요."(p.209) 안나의 외모는 높은 지위에 있는 남자들에게 어필했던 것 같다. 윈투어는 영국의 <<이브닝 스탠더드>> 편집장이었던 아버지를 통해서 인맥을 쌓기 시작한 이래, 접근하고 어필했다. 그리고 남자들은 신기하게도 계속해서 문제가 생길 때에 윈투어를 지지했다. 여자에게 있어서 외형적 매력은, 비할 바 없이 강력한 무기인 것이다.

   두 번째 유형, 잡지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사람들. 안나는 특히 뛰어난 포토그래퍼들과 친분을 유지하고 그들에 힘입어 독단적으로 자신의 일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안나가 포토그래퍼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훈련된 눈과 경험을 믿었"(p.110)기 때문이다. "안나는 보기 드물 정도의 독창적 안목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창조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데 귀재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부분을 안나의 가장 뛰어난 특성이라고 생각했다. 안나는 아버지처럼 아주 뛰어나고 총명한 인재를 고용하여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했고 어느 정도까지 자유재량을 허용해주었다."(p.110)

   요컨대 자신을 부리는 사람에게 어필하고, 자신이 부리는 사람을 뛰어난 사람으로 채우는 것. 안나는 수직적인 인간관계에 있어서 끊임 없이 자신을 어필함으로써 위로 올라갔다. 일에 있어서의 인간관계와 인맥관리는 질척거리는 관계로서가 아니라 합리성과 이해의 일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안나 윈투어는 그의 인간관리를 통하여 보여주며, 인간관계와 인맥관리를 냉철하게 구분하여야 한다는 것이 내가 책에서 얻을 수 있었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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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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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소설집 중 표제작인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 관한 글이다. 자신이 디디고 있는 발 밑은 얼마나 확실한 것인가 또는, 자신이 확실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삶의 양식과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던 욕망은 얼마나 확실한 것인가? 삶의 불확실성은 정이현이 그의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주제이며 정이현의 등단작인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는 작가가 반복해서 다루는 주제의식의 원형이 있다.  

   정이현의 소설 속의 여자들은 사회로부터 주어지는 가치관과 이데올로기에 반항하기보다는 그것을 완전히 내면화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체제로부터 주어지는 욕망을 내재화하고 그것을 확실한 것으로 믿으면서 달성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파국에 직면한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도 그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낭만적 사랑을 운운하는 제목과는 달리 주인공인 유리에게 낭만적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이십 몇 년 결혼생활 동안 백화점 세일 때 허접한 옷 골라 사고 문화센터 노래교실에 다닐 수 있게 된 걸 여유라고 생각하는”(pp.20-21) 엄마를 보며 “내 인생, 엄마처럼 사는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까.”(p.20)라고 다짐하며, 친구의 노란 색 뉴비틀을 보면서 “어차피 출발선이 다른 게임이었다. ... 나는 혼자 힘으로 이 척박한 세상과 맞서야 했다. 진정으로 강한 여성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p.25)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강한 여성’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사랑이라는 환상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유리의 인식: “남자들은 다 똑같다. ... 사랑하니까 키스해야 하고, 사랑하니까 만져야 하고, 사랑하니까 안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당당하다 못해 뻔뻔한 요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사랑!”(pp.15-16) 유리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 결과 유리에게 있어서 연애와 결혼은 교환 관계의 일종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내 인생 스물 두 해를 걸고 배팅해볼 남자”(p.27)가 나타났을 때 언곤일척의 승부에서 이겨서 고진감래(苦盡甘來)할 때까지 스스로를 아껴두는 것이 유리에게는 지상과제가 된다. 결혼시장에서 자신을 최대한 잘 파는 것이 엄마의 삶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이므로.  

   종목을 막론하고 장사를 잘 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덕목은 두 가지이다. i)상품의 가치를 보존하는 것, ii)잘 파는 테크닉을 익히는 것. 유리는 장사꾼에게 요구되는 이 두 가지 덕목을 실천한다. 자신의 가치를 온존시키기 위해서는 사랑의 유혹에 빠져들지 말아야 하고, 유리는 끊임 없는 긴장감을 유지하고자 레이스가 달린 팬티를 절대로 입지 않는다. “고무줄이 헐렁하게 늘어나고 누렇게 물이 빠진 면 팬티는 말하자면, 나의 보루다.”(p.9) 그의 말처럼 “팬티를 사수하는 것은 세상을 사수하는 것이다.”(p.11)  또한 잘 팔아서 세상을 얻어내기 위해 유리는 끊임없이 연애와 사랑에 대해서 지배적(이라고 생각되는) 사회의 가치질서와 규범을 내면화한다. 그런데 그 질서는 누구에 의해서 구성된 것인가? 유리가 끊임없이 내면화하는 행동과 연애의 공식은 간단히 말해서 남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다. 요컨대 유리는 남성 중심의 사회질서를 긍정하고 그 속에서 자신을 잘 팔아넘기기 위해 상술을 공부하는 것이다. 그 몇 가지들: “나는 살포시 눈을 감았다. 키스할 때 눈을 뜨는 건, 나 바람둥이야. 라고 광고하는 일이다. 그러나 첫 키스에서 여자가 너무 적극적일 필요도 없었다. 나는 새침한 척, 입술을 아주 약간만 벌려주었다.”(p.10); “가슴을 건너뛰다니.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p.10); "일단 가슴을 정복한 남자는 머지않아 더 노골적인 요구를 해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어한다, 는 속담을 한시도 잊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p.11) 소설의 막바지에 부유한 집 막내아들에다가 미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로스쿨의 학생이자 결정적으로 자신에게 결혼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하는 남자와 몸을 섞을 때 제시되는 십계명은 유리가 배우고 익히는 상술의 절정을 이룬다. 

   이 모든 부단한 노력을 통하여 유리가 팔고 싶어하는 것은 그 자신, 보다 정확하게는 그 자신의 순결, 처녀성이다: “순결해 보일 것!”(p.29) 남자가 처녀성에 대하여 가지는 환상을 이용하여 가부장적 사회 질서에 순조롭게 편입되어 그 속에서 안온하고자 하는 유리의 전략. 그런데 중요한 것은, 처녀성은 증명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유리가 말하는 십계명의 10계. 혈흔은 함께 확인하라. 그 확인이 없다면 유리의 순결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요컨대 처녀성은 신뢰의 문제이다. 수많은 여성들이 결혼 이전에 처녀막 재생 수술을 받는 이유는 단지 상대방에게 자신이 처녀라는 믿음을 주기 위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여기서 유리가 의도치 않은 파국이 발생한다: “아무것도 없다! 타월 위에는 한 점의 핏자국도 남아있지 않다. 아무리 봐도 순백의 시트 위는 깨끗하다. 머릿속이 온통 까매지고 정신이 아뜩해져온다.”(p.33) 소설의 정황을 둘러볼 때, 유리는 확실히 처녀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리가 진짜로 처녀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상대방은 유리의 순결을 믿지 않을 것이며, 유리는 건곤일척의 승부에서 자신을 파는 데에 실패했다.  

   도대체 왜? 유리는 남자가 여자에게 요구하는 모든 규범을 지키고 그 자신이 기획했던 모든 계획을 차질없이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승부에서 패배했는가? 정이현은 이 뜻밖의 파국을 통해 결국 유리가 채택한 방법론의 근본적인 결함을 지적한다. 유리의 근본적인 패착은 남자의 환상에 기대어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려고 했다는 데에 있다. 패배주의적 순응이든 아니면 유리처럼 적극적으로 행동하든, 남자들이 짜놓은 판 속에서 승부하는 한 여자들은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싸움에서 패배하지 않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남이 짜놓은 판에서 싸우지 말고 자신의 판으로 상대방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닌가? 남자의 옆얼굴이 어쩐지 낮설게 느껴진다는 유리의 감각은 유리가 지금까지 믿어왔고 또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삶의 모습이 실제로는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아니다. 아니다. 누가 뭐래도 그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p.35)라고 유리는 마지막에 갑자기 스스로도 믿지 않았던 사랑을 마음속으로 언급하지만 그건, 멀어져가는 '유리의 성'을, 불확실해져가는 삶과 미래를 붙잡고자 하는 유리의 불안함의 반영이다. 그런데, 상대방이 나를 사랑한다는 믿음만큼 불확실한 것도 세상에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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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lwoo 2009-11-16 0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수업 때 친구한테 좀 보여주겠음. ^^

마요러브 2009-11-16 21:21   좋아요 0 | URL
알았다능..
 
제국의 딸 (상) 환상문학전집 7
레이먼드 E. 파이스트 외 지음, 권도희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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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코마 가문의 딸인 마라가 당주가 되어 아버지와 오빠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민와나비 가문에 복수하고 정쟁에서 싸워가는 이야기. 상하 두 권으로 되어 있다. 절판되었으나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음.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마라의 세 승리: '회색 병사' 들을 포섭하고, 번토카피를 자결시키고 아코마 가문의 권력을 회복하고 아나사티의 보호를 동시에 얻은 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민와나비의 영주인 진구를 자결로 몰아넣은 일. 이 모든 사건에서 마라가 승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원인은 상대를 법도와 규칙에 속박시키되 자신은 거기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제국을 지배하는 관념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케요크의 말, "그게 법입니다."(上, p.67) 제국의 모든 사람들은 명예와 계약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법도와 전통에 얽매여 있다. 그리고 법을 어기는 자는 죽어야 한다. 마라는 자신의 남편인 번토카피가 동맹의 수장을 모욕하게 함으로써 그를 자결로 몰아넣었고, 진구가 그 스스로 한 선언을 어기게 만듬으로써(정확히 말하자면 어긴 것처럼 보이도록 사람들에게 인식시킴으로써) 그를 자결시킨다. 상대방을 패배시키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옭아매어야 하는 것이다. 

   반면 마라 그 자신은 법도와 규칙에 교조적으로 얽매이지는 않는다. 그가 회색 병사들을 자신의 휘하에 끌어들이면서 한 말에 그가 이길 수 있었던 모든 이유가 있다: "우리가 지키고 있는 전통이란 것은 마치 강물과도 같아서 산 속의 샘으로 흘러 들어갈 수도 있고, 바다로 흘러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급류에서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하지만 자연의 법에 도전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 그런 전통의 길에서 아코마와 같이 돌아가자고 나는 지금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사 가끔은 폭풍우 때문에 강물이 새로운 지층을 새기는 일이 생기더라도 말입니다."(上, pp.133-134) 상대방을 속박하고 자신은 자유로울 것. 이것이 승리하기 위한 조건이다. 승리는 상황을 통제하고 운용하는 자의 것이며, 운용과 통제를 위해서는 그 스스로가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남의 나와바리에서 싸우면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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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스탈린의 선택, 1941년 6월
존 루카치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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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이 책은 1941년 6월 22일에 대한 하나의 개요서이다. 주지하다시피 그 날은 제3제국이 소련을 침공한 바르바로사 작전의 개시일이었고, 히틀러의 그 결정은 2차 대전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저자인 존 루카치는 1939년에서부터 1941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이 얇은 책자를 통해 날렵하게 스케치하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제목이 암시하듯이(이 책의 원제는 <<June 1941 : Hitler and Stalin>>이다.), 모든 것은 히틀러와 스탈린이라는 개인의 문제였다: “1941년의, 정확하게는 1941년 6월 22일의 모든 상황은 히틀러와 스탈린 두 사람에게 달려 있었다.”(p.13) 그리고 저자는 그 두 개인의 판단과 결정을 이렇게 요약한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는 무슨일이 있어도 러시아와 전쟁을 할 생각이었으므로 러시아에 요구조건을 제시하지 않았다. ... 반면에 스탈린은 독일과의 전쟁을 한사코 원하지 않았다.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었는데도 그는 히틀러와 싸우려 들지 않았다.”(p.14) 

   내가 가지고 있던 의문점은 이런 것들이다. 도대체 왜 히틀러는 결국 러시아를 침공한 것일까? 역사의 결과가 말해 주듯이, 1941년 6월 21일의 ‘도르트문트’라는, 취소불가능한 명령의 발동은 결과적으로 독일을 패배로 몰아넣었다. 중부와 서부 유럽의 전 부분을 집어삼켰던 히틀러는 나폴레옹의 전례를 알면서도, 또 전선을 양면으로 벌이는 위험성을 감수하면서도 왜 굳이 러시아를 공격한 것일까? 반면, 스탈린은 왜 그렇게 멍청했을까? 처칠이 몇 개월 전부터 그렇게 스탈린에게 경고했음에도, 그리고 모든 정보가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 것임을 말해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왜 끝까지 1939년의 리벤트로프-몰로토프 협약(흔히 독-소 불가침 조약이라고 불리는)에 매달리고 히틀러가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저자의 말대로 “2차 세계대전은 히틀러, 처칠, 스탈린, 루스벨트 같은 개인들의 판단과 취향에 영향을 받았고 결정되었다.”(p.14)면, 이들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결국 2차 대전을 이해하는 데에 핵심이 된다. 그러므로 이 글의 목적은, 1939년의 독-소 불가침조약으로부터 1941년 6월의 바르바로사 작전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히틀러와 스탈린이 내린 판단과 결정의 원인을 정리해 보는 데에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루카치의 견해는 둘 다 이데올로기의 광신도라기보다는 현실 정치가였다는 것이다.

2. 종래의 통설은, 히틀러가 러시아 침공을 결정하게 된 계기를 그의 이데올로기에서 찾는다. 요약하면 이렇다. 러시아 침공은 히틀러의 정치역정 초기부터 그의 핵심적인 소망이었다. 히틀러는 명백하게 공산주의를 경멸하는 골수 반공주의자였으며, 그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핵심적인 내용인 레벤스라움(Lebensraum)의 내용은 독일 민족의 생활권은 동부 유럽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리처드 오베리의 서술: "동부의 대전쟁은 늘 그가 가진 구상의 일부였다. 여기에 레벤스라움(Lebensraum), 즉 생활공간이라는 진정한 내용이 있었다. 히틀러의 계획은 몽상적인 규모를 띠었다. ... 히틀러가 "러시아는 우리의 인도가 되리라!"고 말했다고 전한다."(리처드 오베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pp.94-95) 히틀러가 가진 이데올로기적 광신성이 그를 지배하여 비합리적 결정을 내리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카치는 히틀러의 이데올로기적 광신성에서 원인을 찾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러시아 침공에 대한 히틀러의 결정은 3단계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각각의 단계는 결코 불가피한 것도 또 사전에 예측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히틀러는 상당한 망설임 끝에 각 단계에 도달했던 것이다."(p.18) 즉 저자는 히틀러의 결정을 이데올로기적 결정이라기보다는 현실정치(Realpolitik)에 기반한 것으로 파악한다.

   루카치는 소련에 대한 히틀러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결정인 1939년의 독-소 불가침조약과 1941년의 바르바로사 작전의 개시를 모두 현실정치의 관점에서 고찰한다. 그전에 우선, 반공주의자로서의 히틀러: "히틀러가 공산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싫어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두 가지 유보사항이 있다. ... 그것은 공산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증오와 공포를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p.20) 소비에트 혁명 이후 20세기의 전간기 동안 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공산주의를 경계했으며, 반공은 모든 곳에서 인기 있는 정책이었다. 이는 독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사실들을 종합해볼 때, 반공은 히틀러 통치술의 중요한 수단이었다."(p.23) 물론 히틀러가 이데올로기적으로도 공산주의를 싫어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다만 저자는 "춤꾼에게서 춤을 따로 떼어내기 어렵듯이, 히틀러의 반공적인 태도와 반공이 인기 높은 정책이 될 수 있다는 계산을 구분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이다."(p.20) 요컨대 반공주의자로서의 히틀러는 효과적 통치를 위한 수단적인 포장의 성격이 상당 부분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히틀러의 반공을 통치수단으로 보는 저자의 견해에 의하면 1939년의 독-소 불가침조약의 체결은 보다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 같다. 현실적으로 보다 중요한 목적이 생긴다면, 공산주의와의 타협도 가능하지 않겠는가?(마찬가지로 골수 반공주의자인 처칠도,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한 이후 파시즘을 저지하기 위해서 소련을 전면적으로 지원해야 함을 역설했다.) 1939년의 히틀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대(對)폴란드 시간표였다. 폴란드를 침공하기 위해서는 폴란드의 후방에 있는 러시아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고, 그의 시간표에 따르면 폴란드 침공일은 1939년 8월 26일(이 날이 2차 대전의 개전일이다.)이었다. 그 날 전에 관계를 결정지어야 했고, 히틀러는 스탈린이 조약 체결일로 제시한 6월 27일을 앞당겼으며, 조약은 23일에 리벤트로프와 몰로토프의 서명에 의해 체결되었다.

   독-소 불가침조약이 현실적인 이유에서 체결된 것처럼,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공한 것도 저자에 의하면 이데올로기적인 이유에서라기보다는 실제적인 이유에 있었다. "그의 사고방식은 광기보다는 체계적 추론이 장악하고 있었다."(p.39) 그 실제적인 이유는 영국이었다. 히틀러의 판단으로는, 공습만으로 영국을 패배시킬 수는 없으며 그들의 희망을 꺾어야 했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 영국의 희망은 러시아였다. 영국을 종국적으로 패배시키기 위해서는 러시아를 제압하는 방법밖에 없었고, 이 판단이 1941년의 러시아 침공을 낳았다.

3. 스탈린에 대해서는, 많은 것이 불분명하다. 이는 아직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철의 장막 뒤에 가려져 있던 소련의 자료들은 공개된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리처드 오베리의 말처럼 "다달이 새로운 발견과 새로운 출판물이 나온다. 구소련의 역사는 들끓고 있다. 2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라면 명확한 역사에 접근하는 어떤 것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글쓰기는 잠정적인 견해이다."(리처드 오베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p.1) 루카치의 책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히틀러에 비하면, 많은 것이 아직은 베일에 싸여 있다.

   우선, 스탈린이 히틀러와의 동맹을 그렇게도 원한 이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름의 납득할 만한 설명틀이 있다. "1939년에 이르러 스탈린은 정치가가 되어 있었다."(p.58) 즉 스탈린은 공산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가라기보다는 정치가로서 움직였다. 그가 제시하였던 '일국 사회주의'나, 국가권력의 강화의도는 명백히 마르크스주의가 제시하였던 비전과 전망 -세계주의와 국가의 해체- 과는 상치되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소련의 생존을 위한 현실적 정치 전략인 것 같다. 소비에트 혁명 이후 러시아는 동유럽을 잃었고, 사회주의에 적대적인 자본주의 열강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스탈린은 "러시아의 후진성과 취약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1925년 '일국(一國) 사회주의'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그것은 당시 공산주의 도그마나 전 세계혁명의 전파라는 노선에서 일탈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할 수 있는 것부터 먼저 하자는 원칙의 천명이었다."(p.61)
 
   사실 소련과 제3제국이 동맹을 맺는다는 것은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현실적 상황으로 보든, 이데올로기적으로 보든 그렇다. 1)먼저 당대의 현실적 상황: "1938년과 1939년에 이르러 윈스턴 처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제 소련을 서방 국가들의 동맹에 가담시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양쪽 모두 히틀러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방이 볼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방향이었다."(p.65) 파시즘은 소련에 굉장한 위협이었다.  2)게다가 이데올로기적으로 보면 사회주의와 파시스트는 불구대천의 원수이다. 파시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의 정의: "공산주의 초기의, 파시즘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의는 1935년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서 나온 것인데, 그것에 따르면 '권력을 장악한 파시즘은 가장 반동적이고 쇼비니스트적이며 제국주의적인 금융자본주의 요소의 개방적이고 테러적인 독재체제'다. 이 정의는 자본주의 해체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압력이 극단적으로 솟아오를 때 자본가들이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력을 방어하기 위해 테러에 호소하는 체제라 주장했다."(케빈 패스모어, <<파시즘>>, p.35)

   요컨대 마르크스주의적 정의에 의하면 파시즘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극단적 억압 체제인데, 파시즘이 현실적 위협이 된다면, 좀 덜 억압적인 자본주의 열강과 손을 잡고 극독을 제거하는 것이 더 합당한 판단이 아니었겠는가? 그런데도 스탈린은 왜 결국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게 된 것일까? 루카치는 몇 가지 논거들을 제시한다. 1)스탈린의 국가권력 강화에 대한 열망과 히틀러에 대한 존경심, 2)독일과의 전쟁 부담을 달갑게 여기지 않음. 스탈린은 히틀러의 독일에서의 성공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서구와의 동맹이 가져올 독일과의 전쟁 가능성을 짊어지기 싫어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의문. 왜 스탈린은 마지막까지 히틀러를 믿었는가? 심지어 모든 정보들이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할 것임을 예견하는 것이었음에도? 스탈린은 마치 뭔가에 홀린 것처럼 그 모든 정보와 조언들을 무시했다. 루카치의 책은 이 부분을 잘 설명하지 못하는 것 같다. 다만 오베리의 견해는 이렇다. 1)스탈린은 소련과 같이 대군과 길게 뻗은 국경선을 가진 국가를 침공하려면 공격자에게 2배 이상의 수적 우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히틀러에게는 우위가 없었다. 2)양면 전선의 위험을 무릅쓰는 모험을 히틀러가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3)6월은 전투를 하기에 좋은 날씨를 몇 주 남겨놓지 않았다. 이러한 스탈린의 예견은 히틀러가 침공함으로서 빗나갔지만 히틀러의 패인을 꽤 정확히 짚어낸 것 같다. 독일군은 러시아에서 얼어죽었고, 양면 전선을 벌린 히틀러는 결국 패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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