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덤 오브 헤븐 디렉터스 컷 (4disc)
리들리 스코트 감독, 제레미 아이언스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1.
돌이켜보면 나는 예전부터 서양 중세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던 것 같다. 세계 전체가 밀도 있게 조직되어 있어 사회 구조로부터의 도피가 거의 불가능한 현대를 사는 나는, 중세 사회의 시간적, 공간적 한계와 그로 인해 가능할 것 같은 은자(隱者)와 같은 삶을 부러워했었다. 마르틴 루터가 십몇년 간 외부에 거의 노출되지 않고 작센 공의 영지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이런 나의 동경은 마치 귀농과 전원생활을 꿈꾸는 도시인의 그것과도 같다. 전원의 낭만적인 삶을 꿈꾸는 도시인들이 실제로 그 곳으로 가면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절대로 중세의 시공간에서 실제로 살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가진 동경은 현대가 안락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내가 중세의 십자군 이야기를 다룬 <<킹덤 오브 헤븐>>을 선정한 이유는 우선 이런 중세에 대한 나의 동경과 관심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를 아주 좋아해서 여러 번 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무엇보다도 리들리 스코트가 그려내는 중세의 음울한 이미지에 매료되었다. 냉막한 이미지의 성과 장원들, 현대와 같이 잘 닦여진 길이 아니라 사람이 가는 곳이 길이 되는, 그리고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모를 길들, 도시와 항구의 북적임과 무질서함, 동방의 이국적인 풍경 등을 보면서 나는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익명성 속에 숨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21세기의 현대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은신이 중세의 시공간 속에서는 가능하리라는 생각.

   그러나 <<킹덤 오브 헤븐>>의 영화적 가치는 중세의 이미지 뿐만은 아니다. 이 영화의 감독인 리들리 스코트는 그가 활동하는 기간 동안 계속 당대 최고의 시네아스트 중 한 사람로서의 지위를 누려왔으며, <<블레이드 러너>>, <<1492 콜럼버스>> 등 묵직한 그의 영화들은 항상 단순한 즐거움 이상의 메시지를 던져 왔다. <<킹덤 오브 헤븐>>도 그 예외는 아니어서 그는 이 영화에서 계시가 이성을 압도하던 중세의 본질과, 그 본질이 여과 없이 드러난 십자군 운동을 통해 신성과 세속의 얽힘을, 그리고 맹목적인 신앙과 그 일방적인 투사가 가져오는 적대적 대립을 다룬다. 그리고 리들리 스코트는 그 대립이 지난 천년에 걸친 중동에서의 대립과 분쟁의 원류라고 말한다.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원인이 규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2.
도대체 역사를 배우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물론 단순한 호기심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흥미를 넘어서서, 역사가 연구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한다면 그 가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가장 간단하고도 타당해 보이는 대답은 과거를 앎으로써 미래를 대비한다는 것이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으며, 과거에 발생하였던 사건에는 그 사건을 유발시켰던 원인이 있다. 그러므로 과거의 과오를 불러일으켰던 원인을 우리가 역사의 연구를 통하여 파악한다면, 유사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미리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연구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러한 말은 일견 그럴 듯해 보인다. 위의 언술이 타당하다면, 우리는 동일한 과오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적인 과오나 실책이 언제든지 다시 반복된다는 것을 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 기독교를 볼 때마다 역사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회의감이 든다. 한국의 기독교는 거칠게 말해서 예수 직전의 바리새인들과, 종교 개혁 직전의 가톨릭의 행태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그 행태는 신과 인간 사이에서의 성직자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과도하게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보수적인 율법학자들인 바리새인들은 유대교의 율법을 교조적으로 해석하고, 그로 인하여 사회적 권세를 누렸다. 종교 개혁 직전의 가톨릭은 라틴어를 해석할 능력이 있는 성직자가 성경으로 대표되는 진리를 독점하는 상황이었고, 그 결과는 가톨릭의 타락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 기독교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목사를 믿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부정적인 역사는 지금 다시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복이 과연 역사에 대한 무지 때문인가? 종교 개혁 이전의 가톨릭의 타락상에 대해서는 수많은 글들이 있다. 과거의 역사에 대한 정보는 차고 넘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읽히지 않는 글은 어떠한 의미도 갖지 못한다. 역사적 연구가 보다 큰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사실이 규명되는 것만으로 족한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이 많은 이들에게 전파되어야 하는 것이다. 수많은 역사적 과오들은 소수의 욕망과 다수의 무지가 결합되어 발생하였다. 욕망이 앎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다면(자신의 욕망 때문에 실책을 저지른 자들이 과연 역사를 안다고 자신의 욕망을 꺾지는 않을 것이다.), 다수를 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소수의 욕망을 저지할 힘을 부여하여야 한다.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그의 저서인 <<옹정제>>에서 역사 연구의 역할에 대해서 이렇게 서술하였다: “역사학은 과거의 세계로부터 끊임 없이 예상 밖의 사실을 끄집어내어 소개함으로써 지금까지 무심히 형성되어 버린 역사의 이미지를 고쳐나가는 것을 임무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학의 역할에 대한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언명을 수용한다고 할 때, 영화는 역사적 진실을 대중에게 전달하여 기존의 잘못된 이미지를 깨뜨리는 데에 있어서 가장 많은 가능성을 가진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명백히 현대 사회에서 서사를 선도하는 수단은 문학에서 영화로 옮겨 갔으며, 따라서 영화는 대중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는 매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한 개인이나 공동체가 겪은 고난과 극복이라는 서사적 내러티브를 차용함으로써 영화사를 통틀어 꾸준하게 제작되어 온 장르”로 정의되는 역사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대중에게 보다 더 친숙하게, 그리고 광범위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연구와 그 교육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김민정은 그의 글인 <영화의 역사서술과 역사교육의 가능성>에서 역사영화의 가능성을 영화 텍스트가 제공하는 중층적 시간성(dual temporality)에서 찾았다. 역사영화는 두 가지의 시간을 다룬다. 첫 번째 시간은 과거 사건이나 시대성이 스크린에서 시각적으로 재현되는 과거의 시간(visualized past)이다. 역사영화와 관련된 두 번째 시간은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나 표현 기법 등에서 드러나는 영화 제작 환경(filmmaking context)에서 나온 것이다. 즉, 거칠게 말하면 역사영화가 가지는 중층적 시간성은 영화의 수용자에게는 이러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i)그 영화는 어떠한 시기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가? (ii)지금 우리가 그 영화를 보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리들리 스콧의 <<킹덤 오브 헤븐>>은 중세의 십자군은, 구체적으로는 제1차 십자군이 종결되어 예루살렘 왕국이 세워진 후부터, 살라딘에 의해 다시 예루살렘이 함락되기까지의 역사를 서술함으로써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서구와 아랍의 대립과 분쟁의 근본적인 원인을 탐색한다. 

3.
십자군 운동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중세 유럽의 기독교 문명권이 그 자신의 축적된 힘을 대외적으로 팽창하고자 한 데에 있다. “서유럽 사회가 봉건영주들과 로마 카톨릭 교회의 지배 하에 안정을 되찾고 점차 성장의 길로 들어서게 되자, 서유럽 세계는 그 세력을 외부로 신장하는 기운을 나타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잔틴 제국이 셀주크 투르크에게 위협받자, 로마 교황 우르반 2세가 클레르몽(Clermont) 공의회에서 성전을 일으킬 것을 촉구함에 따라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다. 이 십자군 운동은 교황 자신의 정치적 야심, 봉건 영주들의 경제적 목적 등 많은 동기들이 어우러져 추동력을 얻었으나, 십자군이 13세기 후반까지 약 200년 가량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추동력은 종교적인 열정이었을 것이다. 십자군에 참가하는 것은 신의 뜻이며, 전쟁 도중에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설교가 전파되었고, 신앙이 지배하던 시대에 대다수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은 구원에 있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은 구원에 대한 열망을 품고 동쪽으로 향했다. <<킹덤 오브 헤븐>>의 주인공인 발리안이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된 원인도 결국은 종교적인 것이다. 그의 아내는 갓 태어난 아이가 죽자 그 충격으로 정신을 잃고 헤메이다가 자살하였는데, 카톨릭은 자살을 큰 죄로 보기 때문에 자살한 자는 구원받을 수 없으며 지옥에서 고통받게 될 운명이다. 부인이 자살한 이후 발리안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는데, 그와 마주친 이벨린의 영주 고프리에 이끌려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물론 발리안이 자신이 살던 마을을 떠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살인에 있지만, 그를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한 것은 구원에의 열망이다. “예루살렘에 가면 구원받을 수 있나요? 제 아내의 죄도 씻겨집니까?” 

   고프리의 자식인 발리안은 고프리가 죽기 전에 그로부터 기사 서임을 받고 이벨린의 영주가 되고,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에 도착해 예수가 처형된 골고다 언덕에 가지만 예수로부터는 어떠한 말도 들려오지 않는다. 신앙을 잃었고, 신이 자신을 버렸다고 말하는 발리안에게 한 기사가 말한다. “신앙은 믿을 것이 못되오, 폭력의 광기를 주의 뜻으로 합리화하는 자가 많죠. 너무나 많은 살인자의 눈에서 광기 어린 신앙을 보았소. 선행과 약자를 돕는 용기만이 참된 믿음의 모습이오.” 

   다나카 요시키는 그의 소설인 <<아루스란 전기>>에서 “사람의 선악은 중요하지 않다. 결과의 선악이 문제인 것이다.”라고 쓴 적이 있다. 영화에서도 맹목적인 신앙에 휩쓸린 사람들이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양 측에서 공히 등장한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고프리 일행에게 한 사람은 이교도를 학살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방책이라고 소리치며, 살라딘과의 마지막 전투인 예루살렘 방어전에서 “생포는 일체 없다”며 알라의 위대함을 소리치는 사람.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이 부당한 말을 하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을 것이며, 그 자신들이 가진 윤리적 체계 내에서는 지극히 타당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맹목적 외침을 보는 우리들은 그들의 주장이 정당한 것이며, 인정받을 만한 것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맹목적인 신앙에 몸과 마음을 맡긴 자들 뿐만 아니라, 세속적 야욕을 추구하며 그것을 신앙으로 포장해 십자군에 참가하는 사람도 있다. 시빌라 공주의 남편인 기 드 루지앵과 샤티옹의 레이놀드는 끊임 없이 전쟁을 기도하며 이슬람을 도발한다. 예루살렘 왕국의 왕(아마 역사에 문둥이 보두앵으로 기록되어 있는)과 살라딘 간의 불가침협정을 끊임없이 위반한다. 영화에서 예루살렘 왕의 죽음 후 왕위를 이어받은 기 드 루지앵은 샤티옹의 레이놀드를 사주하여 살라딘의 여동생인 공주를 죽이는데, 그 결과 위태롭던 평화협정은 깨어지고 다시 기독교 진영과 이슬람권은 전화에 휩싸인다. 십자군은 전투에 돌입하지만, 식수의 부족으로 인해 살라딘과의 전투에서 괴멸한다.(아마 영화에서 묘사된 십자군의 전멸은 하틴 전투로 보인다.) “프랑크인은 하틴의 뿔로 알려진 두 개의 봉우리로 이르는 길을 따라 힘겹게 걷고 있었다. ... 물을 마시지 못한 채 긴 밤에 시달렸으므로 그리스도교군의 힘과 자신감은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완전히 약화되고 말았다. ... 그들은 무슬림 군대에 의해 완전히 함몰되었다.” 

   리들리 스코트의 눈에 비친 중세의 십자군 시기는 이렇듯 종교적 맹목과 세속적 욕망이 거대하게 끓어오르던 시대였다. 

4.
리들리 스코트의 이 영화가 개봉한 시기는 2005년이다. 그는 이 영화를 2001년의 9.11 이후 서구와 아랍권의 대립과 분쟁이 격화되었던 시기에 세상에 던져놓은 것이다. 그리고 <<킹덤 오브 헤븐>>에서 그려지고 있는 십자군 운동 시기의 대립은 개봉 당시의 중동에서의 대립과 기묘하게 겹쳐진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현재의 우리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자막: “거의 천 년이 지난 후에도 예루살렘에서의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Nearly a thousand years later, peace in the Kingdom of Heaven remains elusive.)” 리들리 스코트는 지금 예루살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끝날 기미 없어 보이는 분쟁의 원류(原流)를 중세의 십자군 운동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상술한 바 십자군 운동을 추동한 본질적인 힘은 종교적 열정이었다. 믿음이 강해질 때, 사람은 그 믿음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이러한 프레임은, 그것이 타인에게 강압적으로 투사될 때 폭력이 된다. 대상에 이미지를 덧씌우는 주체가 힘을 가질 경우에 그 폭력성은 더욱 심해진다.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서구 문명권의 전세계적 우위가 명확한 지금의 시대에, 서구는 그들이 가지는 이슬람에 대한 관념을 대상에게 덧씌우지 이슬람의 진면목을 바라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작년에 이슬람 사원을 교양수업의 과제로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이슬람교에 대한 강의를 들으면서 나는 이슬람교가 대단히 합리적이고 관용적인 종교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그 스스로의 교리는 보수적이며 엄격한 것이었지만,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성을 강하게 보였다. 이슬람의 이러한 성격은 실제 역사 속에서도 증명되는데, 이슬람은 그가 정복한 기독교 영역에서 기존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자유를 긍정했다. 그들은 약간의 인두세를 부담하면 개종하지 않고 기독교를 자유롭게 숭배할 수 있었다. 

   <<킹덤 오브 헤븐>>에서도 이슬람에 대한 호의적인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이슬람의 맹주인 살라딘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냉철한 인물이며(그는 자신이 왕이 되기 전의 이슬람권의 패배 이유를 신의 뜻이 아니라 이슬람권의 분열과 전쟁 준비의 부족이라는 현실적인 측면에서 찾는다.), 전투에서 죽은 전사들의 장례에서 눈물을 보이는 인간적인 면모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예루살렘이 가지는 의미를 명확하게 통찰한다. 영화에서 마지막에 발리안의 물음, “예루살렘은 무엇이죠?” 그리고 살라딘의 대답. “아무것도 아니지. 모든 것이기도 하고.(Nothing. Everything.)” 살라딘은 예루살렘이 단지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러니까 사람들이 부여한 성지라는 관념을 제외하면 그냥 도시에 불과하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곳에 집착하는 그 관념이 문제라는 점을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상황은 비슷하다. 과거에 사람들이 가졌던 이미지가 신앙과 종교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면, 지금은 미디어와 정치가들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부시 행정부가 제시하였던 선과 악의 대립, 자유와 억압의 대립 등 일련의 관념들을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그 관념 할에서 당연히 이슬람고 중동은 테러리스트들의 소굴이며 공격하여야 할 대상이 된다. 전쟁은 계속되고, 중동에 평화는 찾아오지 않는다.  

   리들리 스코트가 제시하는 해답은 간단하면서도 당연한 것이다. 유대 사원, 모슬렘, 그리스도의 무덤에 우열이 없으며, 모두 다 신성하다는 것. 결국 리들리 스코트가 구성한 서사와 이미지, 그리고 이슬람에 대한 긍정적인 묘사 등은 모두 여기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다.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걷고, 신앙과 관념을 맹신하는 것의 위험성을 깨달은 후에 타인의 가치관과 관념을 존중하는 것, 그것만이 결국 평화를 얻는 길임을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5.
리들리 스코트의 <<킹덤 오브 헤븐>>을 통해 이슬람에 대한 기존의 적대적 관념을 해소함으로써, 그리고 맹목적인 종교에의 열정과 현세적 탐욕이 대립의 근본적인 원인임을 지적함으로써 현재의 서구와 이슬람의 대립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언급한다. 글을 쓰기 위해 영화를 다시 보고. 십자군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서 발견한 것은 영화에서의 인간관계 등이 실제의 역사상의 것과 미묘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실제 역사에서는 고프리와 발리안은 부자 관계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시빌라는 기 드 루지앵과 원치 않은 결혼을 했고 발리안과 사랑에 빠지나, 실제로는 시빌라는 기에게 빠져서 결혼한 것이라는 점, 영화에서 예루살렘의 문둥이 보두앵왕은 위대한 왕으로 묘사되나 실제로는 별로 한 일이 없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묘사는 역사의 정확한 전달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부정적인 측면이다. 실제로 대중은 역사서보다는 영화에 의해 역사를 파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역사의 한 단면을 다룬 영화는 역사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화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역사의 연구는 사실을 사실로 규명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이지만, 영화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고 그를 위해 서사를 조직한다는 차이점을 고려한다면, 소소한 디테일의 변형은 메시지의 효과적 전달을 위한 각색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요러브 2010-03-28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독교와 유럽문명(고재백, 2009년 여름학기) 레포트로 썼던 글.
 
공자와 천하를 논하다 - 공자와 그의 제자들 1 이상의 도서관 2
신동준 지음 / 한길사 / 200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 2권으로 되어 있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1권.

   저자가 이 두 권의 저작을 통하여 목표로 하는 바는 공자-맹자-주자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계보가 공학(公學)의 적통임을 부인하고, 공학의 본령이 치평학(治平學)이며 그 적통이 순자에게 있음을 논증하려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공자의 본질은 도덕교사가 아니라 현실정치가이다. 그의 학문은 전적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를 이론과 실천을 통해 터득하는 것을 골자로 삼은 일종의 치평학이며 그가 그린 이상적인 천하를 이루는 정체는 군자의 양산을 통한 군자의 지배, 즉 군자정(君子政)이다. 공자가 말하는 군자는 그가 말년에 정립한 치평의 교과인 「시」,「서」,「예」,「악」을 체화할 정도로 익힌 자들이며 따라서 "공자가 말한 성인과 군자는 전적으로 학문을 닦고 이를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이다."(p.13) 그러나 맹자는 "요·순을 닮는 노력을 기울이기만 하면 성인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단언"함으로써 "학문의 연마과정을 생략한 채 덕성의 함양만을 크게 강조"(p.13)했으며, 주자는 후에 맹자를 공자의 적통으로 추인함으로써 유학을 "윤리도덕철학으로 왜소화하는 데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p.22) <<공자와 천하를 논하다>>는 저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일환으로 후대의 위문과 주석을 산삭함으로써 공자의 일생을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복원하려고 시도한 책이다.공자는 고대의 사람이어서 그의 생애를 가까운 시대의 사람과 같이 완전히 복원해내기란 힘든 일이며 따라서 이 책은 공자의 생애를 몇몇 시기로 구분하고, 각 시기별로 후대에 중요하게 간주되었던 사건들에 대한 주석을 검토하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나는 이 책을 공자의 생애를 개략적으로 개관하기 위해 읽었기 때문에 고금의 주석들에 관한 내용은 설렁설렁 건너뛰면서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공자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다는 것. 이 책에서 취한 공자의 생애의 시기구별은 대략 이렇다: 1)출생 2)6예를 익히던 젊은 시기 3)제나라 유학기 4)양호 집권기에 사숙을 열어 1차 제자를 받아들인 시기 5)노나라의 조정에 참여한 시기 6)철환천하 7)노나라 귀환의 말년. 이에 따라서 공자의 일생을 개략적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공자는 춘추시대 말기인 오월시대의 사람으로, 오월시대는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잇는 이행기로 주(周)왕실의 권위가 무너지고 공실(公室)들은 그나마 지키던 명목상의 왕도도 저버리며 노골적으로 패도를 추구하던 시기였으며, 전래의 규범이 문란해져 백성은 전쟁에 휘말리고 세상은 혼탁하였다. 이러한 시대에 하급 사족인 숙량흘과 안징재의 야합으로 태어난 그는 젊어서 먹고사느라 6예를 연마하였으나 그에 그치지 않고 제나라로 가서 고급 문화를 접한다. 그는 평생 치평의 도리를 숙고하였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정치에 참여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그는 50이 넘어서야 비로소 노나라에 출사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으며, 대부의 반열에 오른 이후에는 노나라의 공실을 농락하던 3환을 숙청하려다 실패하고 노나라를 떠났다. 이후 14년간 철환천하하며 유세하였으나 어디서도 등용되지 못하고 69세에 노나라로 돌아와 치평학의 기본 교과를 정리하고 74세에 사망하였다.

   현실적으로 그는 거의 완전히 실패한 정치가였다. <<장자>> <추수>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 "나는 불우한 것을 꺼리고 싫어한 지 오래 되었지만 그 불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운명임을 깨달았다. 또 나는 자기 뜻대로 되기를 바란 지 오래 되었거니와 그 희망이 달성되지 않는 것은 시세 탓임을 알게 되었다."(p.266) 그는 50이 넘어서야 출사할 수 있었으며, 노나라에서 3환의 숙청에 실패하였을 때 공자가 그의 뜻을 현실정치에서 펼칠 수 있는 기회는 사실상 날아간 것 같다. 그 이후 철환천하하였던 시기에는 군대에 포위되기도 하고 식량이 없어 굶기도 했으며 세인의 평가는 냉소적이었다. 심지어 노나라로 돌아온 말년에도 장남인 백어, 가장 총애하였던 제자인 안연, 공자의 가장 충직한 제자였던 자로의 죽음을 겪는다. 그러나 공자는 그의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던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공자를 비조로 하는 유학은 이후 2000여년간 동아시아의 지배이념으로 자리잡았다. 저자는 그가 만세의 사표로 남아서 궁극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를 두 가지에서 찾는다. "하나는 전래의 고전을 정리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많은 제자들을 육성해 공학을 후대에 전파하게 만든 공로 때문이다."(p.314)  

   책에 대한 불만점. 방론이 너무 많아서 난삽해보인다. 읽다가 '좋은 이야기이긴 한데, 이걸 왜 이 책에 써 놓은 거지?'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이 여럿 있었다. 예컨대 pp.73-76의 '유재시거(惟才是擧)'와 관련된 고사들이 그렇다. 좋은 고사들이기는 하지만 논지를 따라가는데 방해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브레히트 희곡선집 1 - 서푼짜리 오페라 브레히트 희곡선집 1
임한순 엮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동의자와 거부자>만을 읽음. 

사실 이 짧은 희곡에서 브레히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처음에 합창단이 하는 말에 압축되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동의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동의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곧 비판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왜? 동의의 대상인 사안을 합리적 이성에 의해 검토한 후에야 비로소 진정으로 그 사안에 동의할 것인지 아닐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 사람들이 후세인에게 99%의 동의를 보낼 때, 북한 사람들이 김정일에게 99%의 지지를 보낼 때, 한국 사람들이 유신헌법에 지지를 보낼 때 이러한 동의를 진정한 동의라고 할 수 있겠는가? 비판적 사유 없는 동의는 진정한 동의가 아니다. 그러기에 이 희곡에서 골짜기에 던져지는 것에 동의하는 소년은 '동의'한 것이 아니며, 관습을 거부한 소년이야말로 진정 '동의'한 것이다. 

   다만 의문스러운 점. 이 짧은 희곡은 같으면서도 약간 다른 두 번의 변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읽으면서 처음에는 브레히트가 이 두 변주를 대조함으로써 후자의 거부가 타당함을 강조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약간의 의문을 가진다. 두 번째, 소년이 거부할 때에 선생과 대학생들은 그렇게 급하지는 않은 학문을 배우러 가는 중이었다. 그러기에 소년을 버리고 가기보다는 병에 걸린 소년을 마을로 데려다주기 위해 돌아가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며, 병에 걸린 자를 골짜기에 던지는 관습에 저항한 소년의 선택은 그의 말대로 합리적인 것이었다. 여기에 의문을 제기할 여지는 없어보인다. 그러나 쳣 번째의 상황. 소년은 결국 자신을 골짜기에 던지는 데에 동의하고 그는 죽는다. 그런데 첫 번째의 경우에 대학생들과 선생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의 치료원인과 처방을 구하기 위해 도시로 향하는 중이었다. 이는 지체할 수 없는 사유이며 소년을 마을에 데려다 줄 여유는 대학생들과 선생에게는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처방을 구하기 위해 소년의 생명을 버리는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공익과 사익의 고전적인 대립구도. 브레히트가 진정 의문을 던지는 지점은 여기가 아닌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기 교양강의 - 사마천의 탁월한 통찰을 오늘의 시각으로 읽는다 돌베개 동양고전강의 1
한자오치 지음, 이인호 옮김 / 돌베개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당나라의 유우석이 그의 시에서 ‘전략과 용병술이 일세를 호령하였다將略兵機命世雄'고 우아하게 표현한 바와 같이 한신은 당세에 비할 바 없는 군략의 천재였다. 유방의 막하에서 그를 도와 항우를 멸하고 천하를 유방에게 가져다 준 데에 그와 비견될 만한 공을 세운 사람은 거의 없으며 아마 유방이 언급한 세 공신 중 나머지 두 명, 장량과 소하 정도만이 공적에 있어서 그와 필적할 것이다. 그런데 기량과 공훈의 양면에서 한신은 최고였음에도 불구하고 천하가 평정된 이후 그는 유방의 묵인 하에 여후에게 모살되었다. 한신은 왜 팽(烹)당하였는가? 이 글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한 것이다.  

   한자오치는 pp.222-224에서 한신이 유방의 미움을 산 이유를 몇 가지 나열한다. 한신이 제나라를 멸한 후 멋대로 제나라 왕위를 승인해 달라고 유방에게 조른 일, 고릉 전투에 약속을 지키지 않고 참전하지 않다가 영토를 주겠다는 언약을 받고서야 뒤늦게 참전한 일, 그리고 다다익선多多益善의 고사. “이상 세 가지는 어떤 제왕도 용납할 수 없는 언행입니다. 그렇다면 한신이 마냥 억울하게 죽은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p.224) 

   나는 한신의 이러한 일화들을 읽으면서 한신이 자기과시욕이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한신은 소하의 천거에 의해 유방에게 발탁되기 이전에도 자신의 기량의 크기를 스스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신은 자신의 대장군 취임 연설에서 항우의 기질에 대해 놀랍도록 예리하게 통찰한 후 천하의 형세를 분석하여 천명과 민심이 유방에게 있음을 역설하는데, 논지가 실로 정연하여 명나라 왕세정이 말한 바와 같이 제갈량이 융중에서 유비에게 말한 천하삼분지계 정도만이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젊어서는 불량배의 가랑이 사이를 기었고, 항우의 막하에서는 말직에 머물렀으며 유방에게 와서도 한동안 그러하였다. 일신의 기량은 천하를 뒤덮을 정도였고 한신 자신도 그러한 자신을 잘 알고 있었으나 그에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으니 한신은 얼마나 자신의 기량을 뽐내고 싶어하였겠는가? 한신이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하였다는 것은 <회음후열전>에서 기술하고 있는, 젋었을 때의 치욕을 잊지 않고 초나라 왕으로 봉하여진 후에 자신을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게 했던 불량배를 불러 초나라의 관료에 임명한 일화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한신의 말: “그래서 오늘날 과인이 어떻게 되었는지 다들 보았는가?”(p.215) 한신은 복수조차도 자신의 기량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했다. 

   한신은 자신의 광채를 부러 감추지 않았으며 한자오치가 인용한 고사들은 한신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다다익선의 고사에서 보듯이 한신은 자신의 주군인 유방 앞에서도 자신의 기량이 유방보다 우위에 있음을 거리낌없이 직설적으로 말하였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압도적인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저런 행동을 할 수가 없으며 한신은 실제로도 자신의 자신감을 정당화할 만한 일신의 재능을 갖추었다. 한신의 재능과 태도는 유방을 두렵게 했고, 유방이 가졌던 그 두려움이 천하를 얻은 후에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한신의 자기과시가 그를 죽였다는 점은 장량과 대조해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한신과 장량은 유방이 패업을 달성하는 데에 가장 큰 공헌을 한 두 사람이며 그 재능은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 것이다. “막사에 앉아 전략을 짜고 천리 밖에서 승부를 결정한다.”는 유방의 장량에 대한 촌평은 장량의 위대함을 간결하게 요약한다. 재능과 공적에 있어서 엇비슷하였던 두 사람이었는데 어째서 한신과 달리 장량은 천수를 누렸는가? 장량의 처세가 그를 살렸다: "조언을 하거나 건의하는 경우, 장량은 대개 유방이 먼저 물어야만 입을 열었습니다. 혹은 다른 사람이 먼저 말을 꺼내도록 하고 장량은 상황을 봐가면서 보충할 것이 있는지 결정했습니다. 요컨대 장량은 신중했으므로 행동은 느렸지만, 일단 행동하면 반드시 성공했습니다. 또한 조언하거나 건의할 때도 적정선에서 그치고 말았지, 유방의 심기를 건드릴 정도로 끝까지 밀어붙인 적이 없었습니다."(p.246) 물론 이 외에도 장량이 살아남은 이유는 여럿 있을 것이다. 장량은 애초에 필생의 목적이 자신의 조국인 한(韓)나라의 복수를 하는 것이었기에 그 이외의 목적, 그러니까 부귀공명에는 초연하였다. 그리고 장량은 군대를 직접 지휘하여 전쟁을 수행한 한신과는 달리 모사謀事였기 때문에 수중에 직접적인 병권을 쥐지 아니하였다는 점에서 유방을 위협할 요소가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신과는 달리 자신을 내세워 과시하지 않는 장량의 태도가 장량을 통일 이후의 숙청기에 살아남게 한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신은 자신의 재능과 기량을 감춤 없이 과시하였고 자신의 군주를 위협했다. 물론 한신은 유방을 배신할 마음이 없었다. 사마천은 <회음후열전>에서 괴통의 독립 권유를 한신이 거부한 내용을 자세하게 서술함으로써 한신에게 죄가 없음을 변호한다. 한자오치의 지적대로 한신은 자신을 등용하여 능력을 마음껏 펼치게 해준 유방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으며 공훈을 세워 제후왕에 봉하여지는 정도로 만족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신의 최종적인 목표가 그 정도였다면, 그러니까 지존의 자리가 아닌 제후의 위치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면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기량을 감추어야 했다. 자신을 거리낌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일신의 재능 뿐만 아니라 지위까지도 합당한 위치에 있는 사람 뿐이다. 어쩌면 한신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가졌던 목표가 그의 기량에 비해 작은 것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재능이 야망에 미치지 못하면 스스로 무너지고, 야망이 재능에 미치지 못하면 재능을 시기하는 자에 의해 몰락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의룡 15
노기자카 타로 그림, 나가이 아키라 글 / 대원씨아이(만화)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대여점에서 빌려읽음. 

   부유한 자가 살고, 가난한 자는 치료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서 보통 사람들은 '돈 있는 사람 목숨만 목숨이고 돈 없는 사람 목숨은 목숨이 아니냐'고 항변한다. 이 항변은 사람의 생명이 빈부에 관계 없이 동등한 가치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부자의 목숨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취급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감정적, 정치적 호소로서의 측면을 제외하고 볼 때 이러한 논변은 타당한가? pp.160-162에서 키토의 후배 의사는 아사다에게 키토파로의 합류를 권유하면서 생명의 가치에 관하여 말하는데, 후배 의사의 말은 부자를 구하는 일의 정당성을 놀라울 정도로 강력한 설득력을 갖고 옹호한다: "만약,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똑같은 환자가 2명 있을 때 둘 중 하나밖에 구할 수 없다면, 그리고 그것이 부자와 가난뱅이라면 자네는 어느 쪽을 구하겠나? 인간의 생명은 평등한 거야. 부자든, 가난뱅이든 차이가 없지. 키토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고 계셔. ....... 그러니까, 키토 선생님은 망설이지 않고 부자를 구하실 거야. 의료에는 돈이 들어. 그러니 목숨의 가치가 같다면 돈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을 구하지 않으면 안 돼. 장래에 그 돈으로 더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빈자는 돈이 없어서 죽지만, 자신의 생명의 가치가 낮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높지 않기 때문에, 즉 생명의 가치가 모두 같기에 죽는다. 이 공리주의적 통찰은 지극히 냉혹한 결론에 도달하지만 그 결론의 감정적 불쾌함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가난한 자의 항변대로 사람의 생명은 재산의 빈부에 관계 없이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 그렇다면 현재의 하나만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현재의 하나와 장래의 추가적인 생명까지 구할 것인가? 이 냉혹한 논리를 밀고 나가면 갈림길에서 언제나 빈자는 죽을 것이며 부자는 살 것이다. 그러나 가난하다는 것만으로 죽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된다면, 반대로 부유하다는 것때문에 감정적 언설에 밀려서 죽는 것은 부당하지 않다는 말인가?  예컨대 빈자를 죽이고 부자를 살려 그 대가로 돈을 받아 난치병 치료에 투자하는 행위를, 사람 차별한다고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가난한 자들은 이 반문들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이 짧은 대화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