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윈 경과 녹색기사 대산세계문학총서 92
작자 미상 지음, 이동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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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서 사서 읽음.

   책 뒷표지에 쓰여진 "작품에 담긴 중요한 상징들과 주제와 소재의 절묘한 조화 등으로 인해 중세 로망스 문학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는 말에 혹해서 사서 읽었다. 뜬금 없이 아서 왕의 파티에 나타나서 시비를 거는 녹색 기사의 어처구니 없음, 지루할 정도로 이어지는 복식 등의 묘사 등을 읽으면서 뭐여 이건..을 연발했지만, 꾸역꾸역 본문을 다 읽고 나서 뒤에 달린 역자의 작품 해설을 읽고는 이 중세시가 대단히 정교하게 쓰여진 훌륭한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는 나의 독서력 부족을 통탄하였다. 

   시는 이상적인 삶의 고귀함을 현실의 인간이 어디까지 추구할 수 있는가를 아서 왕의 기사인 가윈 경을 통해 노래한다. 아서 왕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나타난 녹색 기사는 원탁의 기사들의 명예를 시험하고자 '목 베기 게임'을 제안하고, 가윈 경은 이를 받아들인다. 먼저 녹색 기사의 목을 친 그는 명년 당일에 녹색 기사의 도끼를 목으로 받아야 하고, 약속을 이행해 명예를 지키기 위해 녹색 기사가 거하는 녹색 예배당을 찾아간다. '솔로몬의 문장Solomon's Seal'이라 불리는 오망성으로 상징되는 기사도의 이상 다섯 가지-관대함, 신의, 순결, 예의범절, 연민-은 중세 기사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덕목이며, 이 다섯 덕목을 모두 갖추어야 이상적인 도덕성을 갖춘 것으로 인정된다. 가윈 경은 성주 부인의 세 번의 유혹 중 두 번은 견뎌내어 그 자신이 네 가지 덕목을 갖추었음을 성주(실은 녹색 기사 자신)에게 증명하지만, 마지막에 부인이 사랑의 징표로 준, 생명을 지켜주는 녹색 허리띠를 성주에게 '획득물 교환게임'의 규칙대로 돌려주지 않음으로써 '신의'의 덕목을 지키지 못한다. 마지막 '목 베기 게임'에서 녹색 기사는 목만을 베고 그는 결국 살아나지만, 녹색 기사의 위로와 원탁의 기사들의 칭송에도 불구하고 가윈 경은 그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자 신의의 덕목을 갖추지 못함을 자책한다.

   가윈이 겪는 갈등은 이해할 만한 것이다. 신의를 지킬 경우 자신이 죽는다면, 인간의 본능적인 보호본능이 그것을 거부하지 않겠는가? 내 생각에 가윈은 현실의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도덕성을 갖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윈 경은 스스로 자책한다. 가윈 경에게 배워야할 태도는, 어떤 이상적인 상태를 상정하고 그에 비추어 끊임 없이 자신을 반성하는 이 태도 그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명예의 진정한 의미: "나의 안락을 기원하는 그대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그대가 나의 비밀을 충실하게 지킬 것이란 데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네./하지만 자네가 아무리 충직하게 비밀을 지킨다 해도,/만약 내가 자네의 충고대로 이곳을 지나,/두려운 나머지 그를 피해 다른 곳으로 도망간다면/나는 한낱 비겁한 기사에 불과할 것이고, 이는 절대로/용서받지 못할 일일세."(p.130) 명예는 사회적 지위와 명성 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고결함을 스스로 지키는 데에서 나온다. 진정으로 명예로운 자는 이런 저런 직함을 이름 앞에 주렁주렁 단 자가 아니라 가윈 경과 같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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냔묘 2018-10-21 0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력부족을 부끄러워 하실필요까지는 없다고 봅니다...애초에 이런 작품은 두가지의 한계를 인식하고 읽어야 해요...

1. 시간과 장소의 경과에 의한 한계
2. 번역의 모호함에 의한 한계
1의 경우 우리에게 알라후 아크바르..라고 한다고 해서 받아들여지긴 힘들죠...삼신할머니가 아이를 점지한다고 하면 그런설도 있지 할수는 있어도....(물론 선대들 처럼..끄덕끄덕하는 건 아니지만...)
2의 경우 두운이라거나 운율을 버리면 이상해지는 고대작품이 많은 지라...일례로 우리의 시조가 번역되어 나가면 외국인들도 갸웃한다지요.....

오히려 읽으셨다는게 더부럽습니다...저도 친구 추천받고 볼까하고 뒤적이는 중이라...
 
측천무후 - 제국을 창업한 세계사 유일의 여황제
도야마 군지 지음, 박정임 옮김, 정동준 감수 / 페이퍼로드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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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에 대한 얇은 평전. 산샤의 <<측천무후>>를 헌책방에서 주워서, 그걸 읽기 전에 측천무후에 대해 대충 알아둘까 싶어서 읽었는데 별로 재미는 없었다. 측천의 일생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들 위주로 날렵하게 그를 스케치하고 있으며, 말미에 저자의 측천에 대한 짧은 평가가 덧붙여져 있다. "황제에 대한 평가는 제왕으로서의 업적이 있는지 없는지로 따져야 한다고 생각한다."(p.250)는 도야마 군지의 평가기준에 의할 때 측천은 군주로서 꽤 유능하였던 것 같다. 당의 기틀을 다진 태종 이후, 고종의 황후로서 약 30여년 간 정사의 전면에 있었으며 이후 15년의 주 황제를 거쳐 현종의 '개원의 치'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 정도? 측천의 통치기 동안 천하의 백성들은 안온하게 잘 살았을 것 같다.

   측천이 역사에 남은 이유는 역시 그가 중국 역사의 유일한 여황제였기 때문일 것이다. 태종대의 후궁으로서 태종 사후에 비구니가 되었으나 고종의 눈에 들어 그의 후궁으로 들어온 후, 황후를 거쳐 황제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냉혹한 권력자의 모습을 보인다. 권력을 잡아가는 과정에서 보여준 측천의 냉혹무비함은 글쎄.. 절대권력은 나눌 수 없는 것이며 측천만이 권력 앞에서 그러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는 여자였고 든든한 배경도 없었기 때문에 보다 가혹했을 것이며, 후대에 필요 이상으로 악녀의 이미지를 뒤집어 쓴 것만은 명확해보인다. 목표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을 것. 이는 권력을 쥐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며 측천은 그에 충실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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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
전재호 지음 / 책세상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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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정희를 반민족주의자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민족주의 그 자체의 특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책에서 예시하고 있는 강만길, 박현채, 서중석은 "공통적으로 진정한 한국 민족주의의 기준을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일국가에 대한 지향으로 인식하고 있다."(p.27) 즉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통일을 추구하면 민족주의자이고, 통일을 반대하면 반민족주의자이다. 그런데 통일의 지향이 민족주의의 본질적 요소인가? 그렇다면 통일국가에서는 민족주의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통일국가에서도 민족주의는 존재하므로(예컨대 통일된 민족국가이나 독립을 추구하는 방편으로 민족주의가 주장될 수도 있을 것이다) 통일이 민족주의의 본질적인 특징은 아니다. 저자의 지적: "그런데 이런 주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정해놓은 민족주의의 정의를 기준으로 박정희(또는 박정희 정권)을 평가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기준에 부합되면 민족주의이고, 부합되지 않으면 민족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p.28)

   저자가 정리한 민족주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이차적 이데올로기 2)진보와 반동이라는 양면성. 양자는 다른 층위의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민족주의가 이차적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그것이 독자적으로는 의미를 갖지 못하며 필연적으로 다른 이데올로기와 결합하게 됨을 의미한다. "민족주의는 민족의 독립, 통합, 발전 또는 민족적 위상의 고양이라는 지향성만을 가지고 있을 뿐, 이를 어떤 수단으로 달성할 것인가라는 전술은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구체적인 전술을 갖고 있는 다른 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구체적인 목표를 달성한다."(p.30) 요컨대 민족주의는 별 게 아니고 다만 "민족을 위한다"는 말을 그럴 듯하게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박정희는 반민족주의자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박정희가 '민족을 위해서' 반공하고 경제발전에 목매달았다면 그도 민족주의자이다. 요컨대 누가 민족주의자인가의 여부는, 웃기게도,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내면적 의도에 의해 결정된다. 극단적인 예가 있지 않은가? 아돌프 히틀러. 그는 2차 대전을 통해 수천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그건 레벤스라움을 확보해 게르만 민족의 영구적 생활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민족주의자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저자에 의하면 '반동적' 민족주의자겠지만).

   그렇다면, 박정희는 민족주의자인가? 새로운 판단기준(박정희의 내면적 의도)을 기준으로 고려했을 때, 박정희는 민족주의자이다. 김보현 역시 <<박정희 정권기 경제개발>>(갈무리,  2006)에서 박정희의 경제발전계획을 민족주의적 기획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박정희를 평가하는 데에 그가 민족주의자인지 반민족주의자인지를 가지고 싸우는 것은 아무 쓸모도 없는 일이다. 이런 다툼은 민족주의를 자의적으로 정의한 후 그 민족주의를 절대적인 선으로 파악하기에 발생하는데, 나쁜 민족주의적 기획도 있지 않은가. 내 생각에 반민족주의자라는 말은 한국에서 그 말이 갖는 정치적 힘을 고려할 때 빨갱이만큼이나 나쁜 말이다. 진짜로 중요한 것은 "매 시기마다 각 정치세력들이 어떤 내용의 민족주의를 주장했으며, 그것이 어떤 권력관계에 의해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지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를 추적"(p.33)하는 것이며, 민족주의적 기획의 본질적 당파성과 민족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내부자에 대한 억압을 살펴 박정희의 기획이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바람직한 것이었나를 살피는 것이다. 저자가 책을 쓰게 된 동기에서 "사실 박정희는 민족주의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규범적 질문은 의미가 없다."(p.10)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나는 요새 들어 박정희를 '역사적 인물'로 평가하여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박정희가 무덤에서 끊임 없이 되살아나는 이유는 그가 현재 한국이 가지는 단점과 장점의 원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의 비대화, 인권문제 등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의 원인을 박정희 18년의 권위주의적 독재에서 구하며 결국 결론은 '박정희 씨발'이 되고, 대한민국이 잘나가네 어쩌네 하는 사람들은 급격한 경제성장의 근원을 역시 박정희 18년에서 찾고 그 결과 '박정희 만세'를 외친다. 증오냐 찬양이냐, 이 양자택일의 구도를 깨뜨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박정희의 위치를 역사 속에 놓고 판단하는 것이다. 예컨대 중세의 마녀사냥을 놓고 21세기의 우리가 이런 씨발새끼들 뭐 이렇게 감정적으로 흥분하지는 않는 것처럼, 박정희에 대해서도 그러는 게 중요할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내 잠정적인 박정희 시기에 대한 판단은, 그냥 그런 시기가 있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정도이다. 전인권은 "유신체제는 한국 현대사의 사춘기였다"(<<박정희 평전>>, p.240)고 말했는데 비슷하게, 박정희 18년은 근대화의 노정에 있었던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보수파들이 주장하듯이 박정희가 조국의 근대화를 전적으로 이루어냈다는 말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박정희가 한국의 근대화를 이루어냈다는 말이 일종의 사기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비약적 경제성장이 오롯이 박정희 정권의 성과인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좋게 봐주어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확한 표현은 박정희는 한국의 '산업화'를 이루어냈다 정도가 아닐까라고 생각해왔다. 근대화는 근대적 경제로의 이행만으로는 온전히 파악되지 않는다. 서구의 근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리는 두 상징적 사건이 영국의 산업혁명과 더불어 프랑스 혁명이라는 점은 근대화가 온전히 성취되기 위해서는 데카르트적 개인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되는 합리성이 사회의 전 영역에 퍼져나가야 한다는 점을 알려준다. 그런데 대통령을 나랏님으로 생각한다든가, 황우석 낚시에 걸려든다든가 하는 걸 보면 근대성은 개뿔..

   저자는 내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한국의 근대화가 가진 성격을 '반동적 근대주의Reactionary modernism'로 명료하게 규정한다. "여기서 '반동적'이란 ... 서구의 근대성이 지닌 진보성, 혁명성, 합리성, 민주성이 거세되었음을 의미한다."(p.14) 이 반동적 근대주의는 19세기 말 이래 독일에서 진행된 근대화 과정을 지칭하는 용어로, 이후 1960년대에 제3세계 국가에서 1)기술발전만을 근대성으로 파악하는 관점 2)민족주의적 열정과의 결합 등을 특징으로 하여 다시 반복되었다. 박정희 정권도 이러한 경향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박정권은 근대화를 양적인 경제 성장으로 축소시켰고, 그것도 당장 눈앞에 드러나는 실적만을 중시하는 성과주의에 의해 지배되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경제 성장을 위해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제한하는 반민주적인 행태 역시 근대성에 대한 왜곡된 이해의 결과였다. 그 결과 박정권의 근대화 추진 과정에서 민주성, 혁명성, 합리성이라는 서구 근대성의 핵심 요소는 철저히 배제되었다."(p.16)

   나는 근대화의 두 측면인 근대적 산업의 발전과 근대적 멘탈리티의 형성의 연관성에 대해 대해서 알지 못한다. 다만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 살았던 사람들을 전반적으로 지배했던 사회적 요청이 경제성장에 있었음은 납득한다.  "박정희 정권기 권력블록은 대중들의 절실한 이해관심이었던 '빈곤탈피의 욕구'를 자신들의 '민족중흥 = 조국근대화' 기획 속에 편입시켰고, 그 기획의 이행을 통해 다수의 '일자리'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일단 대중적인 열망과 정합관계를 이루었던 것이다."(김보현, <<박정희 정권기 경제개발>>, p.113) 한국이 60년대 이후 이루어낸 비약적인 경제발전이 박정권의 공로라면, 박정희는 한국의 근대화의 한 축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어느 정도 배가 불렀던 80년대 이후에는 근대성의 다른 한 쪽인 민주화, 합리화 등이 같이 이루어져야 했다. 87년 체제의 성립은 근대적 멘탈리티가 형성되는 것이 가시적으로 확인되는 계기였던 것 같다. 그러나 산업화의 달성 이후 근대성을 성취하려던 순간 94년에 IMF 구제금융 위기가 발생했고, 그 이후는 주지하다시피 한국 사회에 신자유주의가 전면화되었다. 민주성과 합리성의 요청은 다시 경제에 잡아먹혔다. '근대화'는 다시 요원해진 것이 아닐까. 민주화와 합리화가 막 전면화되려던 순간에 신자유주의에 포섭된 것이 한국 현대사의 불행이다.

3. 이제 박정희 관련 책은 더 안살테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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넛지 - 똑똑한 선택을 이끄는 힘
리처드 H. 탈러 & 카스 R. 선스타인 지음, 안진환 옮김, 최정규 감수 / 리더스북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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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크게 넛지의 아이디어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1부, 넛지의 적용이 가능한 사례의 연구인 2부와 3부, 그리고 4부의 넛지에 대한 반론의 정리 등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나는 1부와 4부의 비판 부분을 읽었다. 사례를 과도하게 집어 넣는 건 미국 학자들의 책의 상당수에서 보이는 현상인데, 판례법 국가라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튼, 책을 읽다보니 이 '넛지'라는 개념이 꽤 정치적인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됐다. 그래서 저자들도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니 하는 괴상한 논변으로 자신들이 주창한 넛징이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변호하고 있는 것일 테고. 그리고 이준구 선생님이 '한국 실정에는 그다지 맞지 않는 책'이라고 하셨던 것도 좀 이해가 된다. 한국은 개입이 많아서 문제인 나라이니까. 뭐 굳이 정치적 논쟁을 거칠 필요가 있을까 한국에서? 관이 까라면 까는거지.

   신고전파 경제학은 공공재의 과소공급 등 정부실패가 일어나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시장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을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 이론적 근거: 인간의 합리성rationality. 사람의 효용은 주관적인 것이므로, 시장에서 행동하는 개별 행위주체들은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가장 높은 효용을 가져다 주는 것인지를 안다. 따라서 각자의 자율적인 판단에 의해 행동하도록 내버려두면 개인의 효용은 극대화되며 시장은 파레토효율을 달성하므로, 쓸 데 없이 국가가 개입해서 선택가능성 중 일부를 봉쇄하는 것은 잘해봤자 본전이고 사회후생을 깎아먹기 십상이다. 그러니까 언제나 해결책은 간단하다. 선택 가능한 번들을 최대한 늘릴 것.

   행동경제학은 그렇다면 기존의 경제학과 어느 부분에서 그 시각을 달리하는가? 행동경제학은 인간의 합리성 가정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도래한 경제학의 새로운 연구분야이지만, 행동경제학자들도 합리적 인간(책에서는 이콘econ이라고 부른다)을 가정이 유지될 경우 외부성 없는 경제에서 그들이 외적 제약 없이 선택한 결과가 파레토효율을 달성한다는 점에 의의를 제기하지는 않는 것 같다. 행동경제학자는 다만 그 합리성 가정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출발할 뿐이다. 즉 사람은 경제학의 가정마냥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 그리고 합리성에 대한 의문의 제기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이 비합리적인 행위가 개인의 일탈적 행위가 아니라 어떤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사람의 직관적 통찰이 체계적으로 삐그덕거린다는 이 휴리스틱heuristic이 있는 한, 현실 세계에서 어떠한 개입도 없이 풀어놓으면 왈라스균형은 커녕 망하기 일쑤이다.

   인지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밝혀진 휴리스틱은 합리성 가정보다는 훨씬 그럴 듯하다. 사실 이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남자의 90%는 자기 외모가 평균 이상인 줄 알고 여자의 90%는 자신이 뚱뚱하다고 생각하며 클러치 상황에서의 통산타율이 평균타율에 수렴한다는 통계자료를 눈앞에 들이밀어도 클러치 히터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수두룩한가 하면 심지어 한효주의 외모가 상위 10%라는 사람도 나오는 판국이니! 그리고 그 유명한 조삼모사. 조금만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이런 인식의 에러 경향이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존재한다.

   저자들도 밝히고 있듯이 넛지는 이 행동경제학에 기반한 개념이다. 넛지는 팔꿈치로 툭 친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내버려 두면 사람은 휴리스틱에 의해 비합리적 선택을 하니 합리적 선택을 하도록 툭 치자는 것이고, 선택 설계의 방식 중 하나이다. 저자들의 개념 정의: "넛지는 선택 설계자가 취하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사람들에게 어떤 선택을 금지하거나 그들의 경제적 인센티브를 변화시키지 않고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그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방법이다."(p.21)

   툭 치다니!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닌가! 정부 개입에 식겁하는 미국에서 사는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저자들은 이러한 비판을 강하게 인식하는 것 같다. "오해는 개입주의에는 항상 강요가 수반된다는 생각이다."(p.29) 그리고 선택 설계는 개입은 하지만 강요는 없다. 넛지는 "사람들이 더 오랫동안 더 건강하고 더 나은 삶을 살게 만들기 위해 선택 설계자가 그들의 행동방식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합당"(p.20)하다는 점에서 개입주의적이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자유롭게 원하는 바를 행할 수 있으며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바람직하지 않은 대안은 버릴 수 있어야 한다"(p.20)는 점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적이라고 한다. 요컨대 넛징은 개입이지만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아니므로 문제가 없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내 생각에 이 넛지는 개입을 비판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인 후생감소를 피해나간다는 점에서 아주 좋은(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정책수단인 것 같다. 다만 나는 선택 설계자 쪽이 아니라 선택자 쪽이니, 넛지는 나한테 어떤 점에서 좋을까? 합리적 선택을 위해 내가 끙끙대지 않아도 설계를 잘만 따라가면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저자들의 표현을 따르자면 숙고 시스템을 끙끙거리면서 쓰지 않아도 자동 시스템만 써도 휴리스틱이 알아서 보정되니까. 그런데 문제점. 넛지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선택 설계자가 선택자의 이익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선택을 설계하여야 한다. 그런데 만약 자신의 이익이나 제3자의 이익을 위해서 선택 설계를 할 경우? 책날개에 있는 인용문: "고객의 구매 의사를 묻는 것만으로도 구매율을 35% 올릴 수 있다." 이는 넛지의 일종이지만 고객을 위한 것이 아니라 판매자를 위한 것이다. 즉 휴리스틱을 악용해서 선택자를 엿먹이고 자신이 이익을 취하는 방식으로 선택 설계를 할 위험성이 분명히 있다. pp.349-352에는 이런 내용의 비판이 실려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저자들의 대응: "우리는 계획 설계가 선택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계획 설계자들이 정보를 더 많이 수집하도록 독려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쁜 계획들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에 입각한 검사를 수행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적절하게 검토되지 않았거나 불순한 동기를 가진 계획들을 걸러내는 강력한 보호 수단을 창출하고자 한다. 계획 설계자에 대한 점검이 개인의 이기심에 좌우되는 상황에서는 선택의 자유가 교정 수단이 될 수밖에 없다."(pp.352-353) 결국은 개인은 이콘이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결정적으로는, 이콘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 아니 그런데, 애초에 인간이 이콘이 아니므로 넛지를 해야 한다면서 좋은 넛지와 나쁜 넛지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이콘이 되어야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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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복거일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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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 있길래 2000원에 사서 읽음. 

1. 책을 읽으면서 복거일의 각론적인 주장들에 내가 상당 부분 동의하고 있다는 점에 꽤나 놀랐다. 특히 1부에서 다루고 있는 각종 주제에 대해서 그러한데, 예컨대 동해 명칭 회복 운동에 대해 동해는 공해라 이름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실익이 없다는 일갈(<한국판 실지 회복 운동>), 예술 작품은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인지의 여부가 중요할 뿐 국적은 의미 없는 것이라는 주장(<예술 작품의 국적>), 기업의 가치는 증권 시장에서 결정되는 것이며 외국 투자자들은 제 값 내고 한국 기업을 사들였기 때문에 ‘기업 사냥’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는 언급(<‘기업 사냥’에 관하여>) 등등. 내가 복거일의 이런 주장들에 동의하는 이유는 나와 그의 민족주의에 대한 관점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이런 주장들은 민족적 감정을 제어하기 위하여 제시된 것이다. 나는 민족주의가 확대된 이기주의이며, 근본적으로 감정 상태라는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다만 내가 동의하지 않는 점. 그는 민족주의를 열린 민족주의와 닫힌 민족주의로 구분하고, 배타성과 억압성 등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후자에게로 돌린다. 따라서 "민족주의와 관련된 실제적 과제는 닫힌 민족주의와 그것이 불러오는 거친 열정을 제어하는 일이다. 우리가 그 과제를 잘 수행한다면, 우리는 민족주의적 열정을 응집력과 활력이 큰 사회로 만드는 데 쓸 수 있을 것이다."(p.64) 복거일은 민족주의가 국가적, 사회적 응집성을 강화한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열린 민족주의와 닫힌 민족주의를 섬세히 분리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민족주의의 닫힌 측면만을 제어하는 것이 가능하여야 하지만, 나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민족주의는 기본적으로 사회-정치적 억압성을 내장한다."는 김보현의 언급에 동의하는 쪽이다. 민족주의는 필연적으로 민족 아닌 타자를 배제하며 민족주의의 모든 위험성은 이 본질적 특성에서 도출된다. 민족주의에 의해 통합된 공동체는 그 위험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차라리 민족주의 자체를 포기하고 다른 구심점(예컨대 국가)을 찾는 것이 나을 것이다.

2. 이 책을 사서 읽은 일차적인 이유는 복거일이 주장한 이른바 영어공용화론의 논리를 좀 읽어 보고 싶어서였다. 복거일이 이 책에서 목적하는 것은 민족주의의 제어이며, "민족어는 한 민족을 다른 민족들과 가르는 주요 특질이고, 자연히, 민족주의는 늘 민족어를 중심으로 자라나고 드러나게 마련"이기에 민족어에 대한 고찰은 민족주의에 관한 담론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나는 그가 제기한 민족주의의 위험성에 동의하며 거의 모든 민족주의적 논리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즉 "언어를 포함해서, 모든 도구들의 가치는 궁극적으로 사람의 삶에 이바지하는 크기로 평가된다."(p.123)는 주장에 동의하기에, 민족주의적 반론(이것이 영어공용화론에 대한 가장 정치적인 대응이다.) 이외에 영어공용화론의 부적절함을 적절히 지적하는 반론이 없다면 이를 못 수용할 이유도 없다. 따라서 그의 논쟁적인 주장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일단은 복거일의 주장을 좀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복거일의 영어공용화론을 지탱하는 현실인식은 책을 읽은 바로는 다음의 3가지 정도인 것 같다. 1)영어 습득의 필요성 2)'지구 제국' 3)언어습득에 대한 생물학. 그리고 이 3가지를 통관하는 문제의식은 결국 비용과 효율의 문제이다. 3)생물학은 별 게 아니고 어렸을 때(약 12살 이전에) 언어를 습득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네이티브처럼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건 과학적 사실이니까 문제될 것이 없다. 1)영어 습득의 필요성 역시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다. 취직, 승진 등 한국 사회에서의 현실적 필요성 이외에도 애초에 세계에 흘러다니는 정보의 대부분은 영어로 되어 있으며 따라서 영어 사용자는 비사용자에 비해 가용정보량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사실이니까. 요컨대 이 두 가지는, 영어비사용자는 정보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니까 영어를 미리미리 배워서 잘 쓸 수 있게 하자는 정도의 것이다.

   내 생각에 복거일의 영어공용화론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근거는 그가 가지고 있는 세계사적 전망인 '지구 제국'의 도래에 있다. 그리고 "지구 제국의 또 다른 이름은 미국 중심의 평화Pax Americana다."(p.55) 사실 영어의 효용이 그렇게 증대된 것도 근대 이후 영국-미국의 세계패권을 거치면서 자본과 지식의 축적이 영미권으로 집중된 데 의한 데 기인한다. 따라서 복거일의 주장을 다시 거칠게 정리하면, 미국 중심의 지구 제국화는 역사적 추세이고 그 결과 영어는 국제어가 되었으며, 국제어 시대에 궁극적으로 민족어는 박물관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니, 영어를 전면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과도기적 단계로서 영어-한글을 혼용하자는 것이 영어공용화론이 될 것이다.

   이러한 복거일의 견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관점을 수용한다면 민족주의적 반박은 발붙일 여지가 없다. 다만 나는 두 가지 이유에서 복거일의 급진적인 주장을 수용할 수가 없다. 우선 비용의 문제. 복거일의 주장은 비영어사용자는 영어사용자에 비해 정보획득에 필요한 비용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을 비영어사용권에서 영어사용권으로 바꾸는데는 비용이 안 들어가나? 복거일의 주장에는 후자의 이야기가 없다. 물론 그의 주장은 실천적인 제도의 차원에 이르지는 않으며 기본적인 방침을 이야기하는 수준의 것이지만, 영어공용화론의 주된 논거가 비용감축의 요청에 있다는 점에서 영어공용화에 들어가는 비용이라는 반론은 꽤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지구 제국'에 대한 그의 전망. 이 책이 나온 1998년은 클린턴 정부였으며 그 때는 미국이 신경제니 뭐니 해서 잘 나갈 때였지만 2010년 지금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특히 작년의 금융위기 등 미국의 위기 노출, 중국의 대두 등은 미국의 지도적 지위를 손상시키고 있는 것 같다.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가 어떻게 변화해 나갈 것인지는 웅대한 역사전망이 필요한 것이고 나는 전망의 능력이 없지만, 1998년과 2010년의 분위기가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몇십 년에 걸쳐서 영어공용화로 나아갔는데 예컨대 한 100년 뒤에 중국이 패권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면, 그 때에는 다시 중국어공용화를 주창할 것인가? 요컨대 복거일의 주장은 팍스 아메리카나가 견고하지 않은 이상에는 받아들이기에 너무 위험부담이 크다. 그냥 필요한 사람이 영어를 배우는 것이 나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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