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
전재호 지음 / 책세상 / 200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 박정희를 반민족주의자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민족주의 그 자체의 특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책에서 예시하고 있는 강만길, 박현채, 서중석은 "공통적으로 진정한 한국 민족주의의 기준을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일국가에 대한 지향으로 인식하고 있다."(p.27) 즉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통일을 추구하면 민족주의자이고, 통일을 반대하면 반민족주의자이다. 그런데 통일의 지향이 민족주의의 본질적 요소인가? 그렇다면 통일국가에서는 민족주의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통일국가에서도 민족주의는 존재하므로(예컨대 통일된 민족국가이나 독립을 추구하는 방편으로 민족주의가 주장될 수도 있을 것이다) 통일이 민족주의의 본질적인 특징은 아니다. 저자의 지적: "그런데 이런 주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정해놓은 민족주의의 정의를 기준으로 박정희(또는 박정희 정권)을 평가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기준에 부합되면 민족주의이고, 부합되지 않으면 민족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p.28)

   저자가 정리한 민족주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이차적 이데올로기 2)진보와 반동이라는 양면성. 양자는 다른 층위의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민족주의가 이차적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그것이 독자적으로는 의미를 갖지 못하며 필연적으로 다른 이데올로기와 결합하게 됨을 의미한다. "민족주의는 민족의 독립, 통합, 발전 또는 민족적 위상의 고양이라는 지향성만을 가지고 있을 뿐, 이를 어떤 수단으로 달성할 것인가라는 전술은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구체적인 전술을 갖고 있는 다른 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구체적인 목표를 달성한다."(p.30) 요컨대 민족주의는 별 게 아니고 다만 "민족을 위한다"는 말을 그럴 듯하게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박정희는 반민족주의자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박정희가 '민족을 위해서' 반공하고 경제발전에 목매달았다면 그도 민족주의자이다. 요컨대 누가 민족주의자인가의 여부는, 웃기게도,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내면적 의도에 의해 결정된다. 극단적인 예가 있지 않은가? 아돌프 히틀러. 그는 2차 대전을 통해 수천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그건 레벤스라움을 확보해 게르만 민족의 영구적 생활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민족주의자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저자에 의하면 '반동적' 민족주의자겠지만).

   그렇다면, 박정희는 민족주의자인가? 새로운 판단기준(박정희의 내면적 의도)을 기준으로 고려했을 때, 박정희는 민족주의자이다. 김보현 역시 <<박정희 정권기 경제개발>>(갈무리,  2006)에서 박정희의 경제발전계획을 민족주의적 기획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박정희를 평가하는 데에 그가 민족주의자인지 반민족주의자인지를 가지고 싸우는 것은 아무 쓸모도 없는 일이다. 이런 다툼은 민족주의를 자의적으로 정의한 후 그 민족주의를 절대적인 선으로 파악하기에 발생하는데, 나쁜 민족주의적 기획도 있지 않은가. 내 생각에 반민족주의자라는 말은 한국에서 그 말이 갖는 정치적 힘을 고려할 때 빨갱이만큼이나 나쁜 말이다. 진짜로 중요한 것은 "매 시기마다 각 정치세력들이 어떤 내용의 민족주의를 주장했으며, 그것이 어떤 권력관계에 의해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지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를 추적"(p.33)하는 것이며, 민족주의적 기획의 본질적 당파성과 민족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내부자에 대한 억압을 살펴 박정희의 기획이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바람직한 것이었나를 살피는 것이다. 저자가 책을 쓰게 된 동기에서 "사실 박정희는 민족주의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규범적 질문은 의미가 없다."(p.10)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나는 요새 들어 박정희를 '역사적 인물'로 평가하여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박정희가 무덤에서 끊임 없이 되살아나는 이유는 그가 현재 한국이 가지는 단점과 장점의 원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의 비대화, 인권문제 등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의 원인을 박정희 18년의 권위주의적 독재에서 구하며 결국 결론은 '박정희 씨발'이 되고, 대한민국이 잘나가네 어쩌네 하는 사람들은 급격한 경제성장의 근원을 역시 박정희 18년에서 찾고 그 결과 '박정희 만세'를 외친다. 증오냐 찬양이냐, 이 양자택일의 구도를 깨뜨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박정희의 위치를 역사 속에 놓고 판단하는 것이다. 예컨대 중세의 마녀사냥을 놓고 21세기의 우리가 이런 씨발새끼들 뭐 이렇게 감정적으로 흥분하지는 않는 것처럼, 박정희에 대해서도 그러는 게 중요할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내 잠정적인 박정희 시기에 대한 판단은, 그냥 그런 시기가 있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정도이다. 전인권은 "유신체제는 한국 현대사의 사춘기였다"(<<박정희 평전>>, p.240)고 말했는데 비슷하게, 박정희 18년은 근대화의 노정에 있었던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보수파들이 주장하듯이 박정희가 조국의 근대화를 전적으로 이루어냈다는 말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박정희가 한국의 근대화를 이루어냈다는 말이 일종의 사기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비약적 경제성장이 오롯이 박정희 정권의 성과인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좋게 봐주어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확한 표현은 박정희는 한국의 '산업화'를 이루어냈다 정도가 아닐까라고 생각해왔다. 근대화는 근대적 경제로의 이행만으로는 온전히 파악되지 않는다. 서구의 근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리는 두 상징적 사건이 영국의 산업혁명과 더불어 프랑스 혁명이라는 점은 근대화가 온전히 성취되기 위해서는 데카르트적 개인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되는 합리성이 사회의 전 영역에 퍼져나가야 한다는 점을 알려준다. 그런데 대통령을 나랏님으로 생각한다든가, 황우석 낚시에 걸려든다든가 하는 걸 보면 근대성은 개뿔..

   저자는 내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한국의 근대화가 가진 성격을 '반동적 근대주의Reactionary modernism'로 명료하게 규정한다. "여기서 '반동적'이란 ... 서구의 근대성이 지닌 진보성, 혁명성, 합리성, 민주성이 거세되었음을 의미한다."(p.14) 이 반동적 근대주의는 19세기 말 이래 독일에서 진행된 근대화 과정을 지칭하는 용어로, 이후 1960년대에 제3세계 국가에서 1)기술발전만을 근대성으로 파악하는 관점 2)민족주의적 열정과의 결합 등을 특징으로 하여 다시 반복되었다. 박정희 정권도 이러한 경향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박정권은 근대화를 양적인 경제 성장으로 축소시켰고, 그것도 당장 눈앞에 드러나는 실적만을 중시하는 성과주의에 의해 지배되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경제 성장을 위해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제한하는 반민주적인 행태 역시 근대성에 대한 왜곡된 이해의 결과였다. 그 결과 박정권의 근대화 추진 과정에서 민주성, 혁명성, 합리성이라는 서구 근대성의 핵심 요소는 철저히 배제되었다."(p.16)

   나는 근대화의 두 측면인 근대적 산업의 발전과 근대적 멘탈리티의 형성의 연관성에 대해 대해서 알지 못한다. 다만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 살았던 사람들을 전반적으로 지배했던 사회적 요청이 경제성장에 있었음은 납득한다.  "박정희 정권기 권력블록은 대중들의 절실한 이해관심이었던 '빈곤탈피의 욕구'를 자신들의 '민족중흥 = 조국근대화' 기획 속에 편입시켰고, 그 기획의 이행을 통해 다수의 '일자리'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일단 대중적인 열망과 정합관계를 이루었던 것이다."(김보현, <<박정희 정권기 경제개발>>, p.113) 한국이 60년대 이후 이루어낸 비약적인 경제발전이 박정권의 공로라면, 박정희는 한국의 근대화의 한 축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어느 정도 배가 불렀던 80년대 이후에는 근대성의 다른 한 쪽인 민주화, 합리화 등이 같이 이루어져야 했다. 87년 체제의 성립은 근대적 멘탈리티가 형성되는 것이 가시적으로 확인되는 계기였던 것 같다. 그러나 산업화의 달성 이후 근대성을 성취하려던 순간 94년에 IMF 구제금융 위기가 발생했고, 그 이후는 주지하다시피 한국 사회에 신자유주의가 전면화되었다. 민주성과 합리성의 요청은 다시 경제에 잡아먹혔다. '근대화'는 다시 요원해진 것이 아닐까. 민주화와 합리화가 막 전면화되려던 순간에 신자유주의에 포섭된 것이 한국 현대사의 불행이다.

3. 이제 박정희 관련 책은 더 안살테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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