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복거일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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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 있길래 2000원에 사서 읽음. 

1. 책을 읽으면서 복거일의 각론적인 주장들에 내가 상당 부분 동의하고 있다는 점에 꽤나 놀랐다. 특히 1부에서 다루고 있는 각종 주제에 대해서 그러한데, 예컨대 동해 명칭 회복 운동에 대해 동해는 공해라 이름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실익이 없다는 일갈(<한국판 실지 회복 운동>), 예술 작품은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인지의 여부가 중요할 뿐 국적은 의미 없는 것이라는 주장(<예술 작품의 국적>), 기업의 가치는 증권 시장에서 결정되는 것이며 외국 투자자들은 제 값 내고 한국 기업을 사들였기 때문에 ‘기업 사냥’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는 언급(<‘기업 사냥’에 관하여>) 등등. 내가 복거일의 이런 주장들에 동의하는 이유는 나와 그의 민족주의에 대한 관점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이런 주장들은 민족적 감정을 제어하기 위하여 제시된 것이다. 나는 민족주의가 확대된 이기주의이며, 근본적으로 감정 상태라는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다만 내가 동의하지 않는 점. 그는 민족주의를 열린 민족주의와 닫힌 민족주의로 구분하고, 배타성과 억압성 등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후자에게로 돌린다. 따라서 "민족주의와 관련된 실제적 과제는 닫힌 민족주의와 그것이 불러오는 거친 열정을 제어하는 일이다. 우리가 그 과제를 잘 수행한다면, 우리는 민족주의적 열정을 응집력과 활력이 큰 사회로 만드는 데 쓸 수 있을 것이다."(p.64) 복거일은 민족주의가 국가적, 사회적 응집성을 강화한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열린 민족주의와 닫힌 민족주의를 섬세히 분리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민족주의의 닫힌 측면만을 제어하는 것이 가능하여야 하지만, 나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민족주의는 기본적으로 사회-정치적 억압성을 내장한다."는 김보현의 언급에 동의하는 쪽이다. 민족주의는 필연적으로 민족 아닌 타자를 배제하며 민족주의의 모든 위험성은 이 본질적 특성에서 도출된다. 민족주의에 의해 통합된 공동체는 그 위험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차라리 민족주의 자체를 포기하고 다른 구심점(예컨대 국가)을 찾는 것이 나을 것이다.

2. 이 책을 사서 읽은 일차적인 이유는 복거일이 주장한 이른바 영어공용화론의 논리를 좀 읽어 보고 싶어서였다. 복거일이 이 책에서 목적하는 것은 민족주의의 제어이며, "민족어는 한 민족을 다른 민족들과 가르는 주요 특질이고, 자연히, 민족주의는 늘 민족어를 중심으로 자라나고 드러나게 마련"이기에 민족어에 대한 고찰은 민족주의에 관한 담론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나는 그가 제기한 민족주의의 위험성에 동의하며 거의 모든 민족주의적 논리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즉 "언어를 포함해서, 모든 도구들의 가치는 궁극적으로 사람의 삶에 이바지하는 크기로 평가된다."(p.123)는 주장에 동의하기에, 민족주의적 반론(이것이 영어공용화론에 대한 가장 정치적인 대응이다.) 이외에 영어공용화론의 부적절함을 적절히 지적하는 반론이 없다면 이를 못 수용할 이유도 없다. 따라서 그의 논쟁적인 주장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일단은 복거일의 주장을 좀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복거일의 영어공용화론을 지탱하는 현실인식은 책을 읽은 바로는 다음의 3가지 정도인 것 같다. 1)영어 습득의 필요성 2)'지구 제국' 3)언어습득에 대한 생물학. 그리고 이 3가지를 통관하는 문제의식은 결국 비용과 효율의 문제이다. 3)생물학은 별 게 아니고 어렸을 때(약 12살 이전에) 언어를 습득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네이티브처럼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건 과학적 사실이니까 문제될 것이 없다. 1)영어 습득의 필요성 역시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다. 취직, 승진 등 한국 사회에서의 현실적 필요성 이외에도 애초에 세계에 흘러다니는 정보의 대부분은 영어로 되어 있으며 따라서 영어 사용자는 비사용자에 비해 가용정보량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사실이니까. 요컨대 이 두 가지는, 영어비사용자는 정보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니까 영어를 미리미리 배워서 잘 쓸 수 있게 하자는 정도의 것이다.

   내 생각에 복거일의 영어공용화론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근거는 그가 가지고 있는 세계사적 전망인 '지구 제국'의 도래에 있다. 그리고 "지구 제국의 또 다른 이름은 미국 중심의 평화Pax Americana다."(p.55) 사실 영어의 효용이 그렇게 증대된 것도 근대 이후 영국-미국의 세계패권을 거치면서 자본과 지식의 축적이 영미권으로 집중된 데 의한 데 기인한다. 따라서 복거일의 주장을 다시 거칠게 정리하면, 미국 중심의 지구 제국화는 역사적 추세이고 그 결과 영어는 국제어가 되었으며, 국제어 시대에 궁극적으로 민족어는 박물관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니, 영어를 전면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과도기적 단계로서 영어-한글을 혼용하자는 것이 영어공용화론이 될 것이다.

   이러한 복거일의 견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관점을 수용한다면 민족주의적 반박은 발붙일 여지가 없다. 다만 나는 두 가지 이유에서 복거일의 급진적인 주장을 수용할 수가 없다. 우선 비용의 문제. 복거일의 주장은 비영어사용자는 영어사용자에 비해 정보획득에 필요한 비용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을 비영어사용권에서 영어사용권으로 바꾸는데는 비용이 안 들어가나? 복거일의 주장에는 후자의 이야기가 없다. 물론 그의 주장은 실천적인 제도의 차원에 이르지는 않으며 기본적인 방침을 이야기하는 수준의 것이지만, 영어공용화론의 주된 논거가 비용감축의 요청에 있다는 점에서 영어공용화에 들어가는 비용이라는 반론은 꽤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지구 제국'에 대한 그의 전망. 이 책이 나온 1998년은 클린턴 정부였으며 그 때는 미국이 신경제니 뭐니 해서 잘 나갈 때였지만 2010년 지금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특히 작년의 금융위기 등 미국의 위기 노출, 중국의 대두 등은 미국의 지도적 지위를 손상시키고 있는 것 같다.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가 어떻게 변화해 나갈 것인지는 웅대한 역사전망이 필요한 것이고 나는 전망의 능력이 없지만, 1998년과 2010년의 분위기가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몇십 년에 걸쳐서 영어공용화로 나아갔는데 예컨대 한 100년 뒤에 중국이 패권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면, 그 때에는 다시 중국어공용화를 주창할 것인가? 요컨대 복거일의 주장은 팍스 아메리카나가 견고하지 않은 이상에는 받아들이기에 너무 위험부담이 크다. 그냥 필요한 사람이 영어를 배우는 것이 나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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