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란 무엇인가 - EBS 교육대기획 초대형 교육 프로젝트
EBS <학교란 무엇인가> 제작팀 엮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빌려읽음. 

1.
이 책은 EBS에서 10부작으로 기획된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책은 총 2권으로 기획되어 있는데, 이 책은 그 중 첫 번째 권이라고 한다. 미래의 학부모가 된 자신을 상상하면서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으면서 각론적인 부분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우선 인상 깊었던 몇몇 부분의 요약. 

   (1)아이를 무작정 칭찬하기만 하는 것은 오히려 아이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 칭찬이나 벌은 외적인 자극인데, 아이를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이런 외적인 자극이 아니라 내재적 동기 유발이다. 칭찬, 특히 아이의 성취를 칭찬하는 것은 결국 아이를 평가하는 것이며, 아이는 오히려 실패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게 된다.
   아이의 성취를 칭찬하는 것은 아이가 부모를 기쁘게 하거나, 아이에게 감동을 주었을 떄에만 살아받는다고 느까게 만든다는 점에서 부정적이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칭찬이라는 평가가 아니라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랑이다. 따라서 아이를 평가하거나 아이에게 기대를 품고 칭찬할 것이 아니라, 아이가 기울인 노력에 대하여 칭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사교육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과도한 사교육은 아이가 주도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쌓아갈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게 한다. 아이는 사교육에서 제시하는 프로그램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게 될 뿐이며, 그 결과 자기에게 맞는 공부법을 알아낼 시간도, 자신이 무엇을 아는지 점검해볼 시간도 확보하지 못하게 된다. 자신의 진짜 실력을 점검하지 않고 주어진 프로그램을 이행한 결과, 아이에게 남는 것은 자기가 뭔가 알고 있기는 하다는 느낌,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자만심 뿐이다.

2.
이런 내용들은 미래의 학부모로서의 나에가 아주 큰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다. 다만 이 책을 통해 내가 얻었던 것은 미래의 학부모로서의 행동지침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에게 따끔하게 다가오는 부분도 있었다. 특히 메타인지 능력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그러하였다.

이 책에서 바람직한 자녀의 모습으로 제시하고 있는 '상위 0.1%'의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과 구분되는 지점은 그들이 메타인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있다. 메타(meta)는 한 단계의 고차원을 의미하는데, 따라서 메타인지는 자신이 무엇을 인지하고 있는지를 한 처원 위에서 조감할 수 있는 능력, 즉 스스로 얼마만큼 아는지를 정확히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러한 메타인지 능력은 자신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지식과,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느낌 사이의 격차를 자주 경험할 때 길러진다. 자신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지식의 양을 정화히 확인하는 방법은 자신이 학습한 내용을 스스로 복습, 정리하는 것이다. 사교육에  매몰된 아이들은 스스로 공부할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므로 이러한 메타인지 능력을 키울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 부분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나는 지금까지 공부해오면서 철저하게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나는 꽤 많은 시간을 전공을 공부하는 데에 쏟아 부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정복하기 어려운 난해한 부분들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훑고 지나가고, 정확한 이해에 도달하지도 못하였으면서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 희미한 느낌을 내가 아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메타인지 능력을 결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막연하게 느꼈던 이런 불안감이 메타인지라는 명확한 개념으로 나에게 주어진 이상, 나는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점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아는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이렇게 나는 이 책의 각론적인 내용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었다. 다만, 이 책은 교육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총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책에서 제시하는 교육의 목적과 의미에 대해서 동의할 수 있을꺼? 이 책의 말미에는 유명한 대안학교인 서머힐의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그 학교가 제시하는 교육의 방향은 그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것이지만, 나와 내 자녀들이 살아갈 한국의 현실에 합치하지는 않는 것 같다. 모든 것을 학생의 자율에 맡기고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을 연제 공부할지를 전적으로 학생들이 결정하게 하는 방식은 지금의 한국에 도입하기에는 너무나 급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획일적인 교육을 받고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무한경쟁을 벌이는 2011년의 대한민국은 나의 학창시절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것 같고, 아마 내 자녀들도 비슷한 학창시절을 보내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러한 세상에 한 명의 학부모로서 어떤 태도를 취하여야 할까? 내 자녀들을 어떤 사람이 되도록 하여야 할까?

랜디 포쉬는 <<마지막 강의>>의 서문에서 "모든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옳고 그름에 괸하여, 현명함에 관하여, 그리고 살면서 부닥치게 될 장애물들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싶어햔다."고 말한다. 나는 이 말에 완전히 동의한다. 그러나 무엇에 가중치를 두고 가르칠 것인지? 한국의 많은 학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좋은 직업을 얻어 부와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리고 그를 위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을 대학이라고 생각한다.그래서 12년의 학창시절은 오로지 좋은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 되고, 아이들은 경쟁으로 내몰려 피폐해진다.

그렇다면 나는 이러한 경향성을 단호히 거부해야 하며,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종종 신문에서 대학을 위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한국의 현실을 단호히 부정하고 자신의 자녀를 다르게 교육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다. 그들의 선택은 용기 있는 행동이고 존중받아 마땅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나는 그들의 뒤를 따라가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는 않는다. 그들의 자녀는 감옥같이 답답한 학창시절에서는 자유로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에서 삶을 지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한국에서 한 사람이 어떤 대학을 나왔느냐는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들의 자녀들은 이러한 현실과 맞닥드리게 되었을 때 이겨낼 수 있을까? 이런 회의가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또한 좋은 대학에 진학한다는 것은 단순히 학벌이라는 일종의 타이틀을 획득하는 데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다. 좋은 대학에서 받는 최고의 교육, 전국 최고의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쌓는 경험들, 우수한 사람들과 꿈을 공유하면서 넓어지는 시야. 이른바 명문대에 다님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이런 체험은 확실히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것을 나는 대학에 다니면서 절실히 느꼈다. 사람이 자신을 둘러싼 틀의 범위까지만 성장할 수 있다면, 그 틀을 최대한 넓혀 두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리고 좋은 대학에 간다는 것은 대학에 진학할 나이의 학생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틀을 한껏 넓혀 놓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자녀를 명문대에 진학시키는 것을 지상 명제로 삼아 맹목적으로 달려가고 싶지는 않다. 나는 대학에 다니면서, 우수한 지적 능력과 인격적 성숙은 별개라는 사실 역시 뼈저리게 깨달았다. 오로지 자신의 성취를 위해 달려 나가며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 자신의 이득만이 우선이며 더불어 살아갈 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은 그 우수한 지적 능력을 바탕으로 이 사회에서 높은 성취를 누릴 지도 모른다. 그라니 나는 내 아이들이 그런 괴물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들은 장애물을 뛰어넘는 데에는 능숙하지만, 옳고 그름에 대한 감수성을 상실한 사람들이다.

요컨대 나는 내 아이가 균형 잡힌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바란다. 내 아이가 살게 될 한국 사회를 현명하게 살아나갈 힘을 가지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력을 잃지 않는 사람으로 내 아이를 키우고 싶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길로 나아가기는 지극히 어려운 것 같다. 어떻게 나와 내 아이는 이러한 좁은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이 책에서 하나의 모범으로 제시되고 있는 0.1%의 아이를 만드는 것은 그 길로 나아가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0.1%의 아이는 당연히 학업성취도가 뛰어난 아이들이다. 다만 나는 성취 그 자체보다도, 그들이 학업성취를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얻는 것들을 언급하고 있는 책의 부분에 더 마음이 간다.

  "어린 시절, 자신의 능력을 100% 발휘해서 공부에 몰입해본 경험, 최선의 노력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의 성취감, 여러 가지 어려움과 유혹을 극복하는 힘, 이런 능력들은 아이가 인생을 살아 나가는 데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p.250)

   "우리가 아이들에게 공부법을 알려주고 공부를 잘하도록 격려하는 것은 아이들이 배우는 기쁨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자기에게 가장 알맞은 방법으로 공부하면서, 아이들은 새로운 것을 아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르는 문제를 해결했을 대의 희열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학창 시절에 그런 기쁨과 희열을 맛본 경험은 아이들 가슴속에 자리 잡은 꿈을 이루는 데 가장 큰 원동력이 된다. 우리가 교육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이루도록 돕기 위해서이다."
(p.251)

배움을 통해서 희열을 얻고, 공부하는 과정에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힘을 얻으며, 자신의 꿈을 위해서 노력하는 삶, 책의 이 구절들은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는 바람직한 자녀 교육의 방향으로 여겨진다. 다시 한번, 미래의 내 아이들이 옳고 그름을 판별할 줄 알며, 현명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나중에 내가 자녀들을 교육할 때 이 책을 읽은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강변 대화 - 무신론자와 신학자, 기독교를 말하다
자오치정.루이스 팔라우 지음, 이상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독실한 기독교인과 대화를 통해 소통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대화와 소통은 내가 아닌 상대방이 옳을 수도 있다는 점을 전제한 뒤에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의 믿음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하는 독실한 기독교인을 상정하기 힘들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한 쪽에는 신의 말씀이 있고 다른 쪽에는 인간의 말들이 있다. 그들이 이야기하면서 듣는 모든 말은 인간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말들은 절대적 진리에 비추어 교정되고 교화되어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인간의 말이 신의 말씀을 교정하게 되는 기적을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자오치정은 과학자이자 공산당 간부인 무신론자이며 루이스 팔라우는 빌리 그레이엄의 후계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전도사이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대화자들은 그들이 서로 대화할 수 있었으며 많은 소통과 교감을 나누었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일말의 기대와 일말의 의심을 가지고 책을 읽었다. 과연 그들은 소통할 수 있었을까? 가능했다면 어떤 통찰을 공유하게 되었을까? 책을 읽으면서 기대는 사라졌고 실망의 확인만이 남았다. 그들은 서로 친목을 도모하였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대화로 인해 다시 한번 분명해진 사실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은 결코 근본적인 점에서는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입장을 확인할 뿐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팔라우 박사의 말을 읽을때마다 짜증이 솟구쳤다. 내가 경멸하는, 우리 나라의 기독교인들이 전도할 때 쓰는 논법을 그대로 구사하기 때문이었다. 자오치정의 과학적 사고에 기반한 질문에 대해서는 논점을 회피하면서 도망가고, 인과관계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을 다 하느님의 섭리로 끌어오고, 논리적 비약과 협박을 일삼아대는 그 논법들. 인간이 영적으로 고독하기에 신을 찾는다는 말은 납득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왜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는 결론이 아무런 논증도 없이 도출되는가? 오히려 책을 읽으면서 감탄했던 것은 자오치정의 동양 철학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들이었다. 자오치정이 이야기하면서 속으로는 짜증 좀 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는 노회한 정치가이니만큼 좋게좋게 넘겼겠지만.

어쨌든 내가 기독교인에게 가지고 있는 편견을 시간을 들여 확인하는 것은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결국 두 사람의 대화는 그들의 입장 차이를 날카롭게 드러내는 데에서 끝난다. 나는 이 두 사람이 소통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두 사람이 쓰는 어휘의 차이에서도 드러난다. 자오치정은 끊임 없이 팔라우에게 "이해할 수 없다"고 묻는다. 팔라우는 끊임 없이 "믿는다"고 말한다. 이해와 믿음의 간격은 극복되지 않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식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헌책방에서 사서 읽음.

1.
나는 뭔가에 공감하고 싶어서 문학을 읽는다. 그런데 이 <<일식>>은 다 읽고 나서도 저자가 무슨 소리를 하고 싶어하는 건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머리를 써서 읽어야 하는 소설이라는 느낌. 저자가 이 작품을 문예지 <<신조>>에 보내면서 동봉한 편지에 쓰여 있는 저자의 문학관인 "나는 예술지상주의자이며, 문학으로써 성스러움을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p.202)는 문장 역시도 나의 찝찝함을 상쾌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다만 저자는 소설의 본령인, 작가의 사유에 의한 새로운 세계의 구축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저자는 자신이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 발자크의 후예임을 자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는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어쨌든,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일식日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따져봄으로써 소설의 주제에 다가갈 수는 있을 것이다.

2.
소설에서 일식은 안드로규노스의 화형장면에서 등장한다. 안드로규노스는 한 몸에 남성과 여성을 모두 지닌 전인적全人的 존재로 그려지는데, 소설에서는 마지막에 마녀로 몰려 화형당한다. 일식은 화형이 진행되는 와중에 안드로규노스의 양물이 드러남과 동시에 시작되어, 양물에서 사정된 정액이 안드로규노스의 음문으로 들어갈 때 절정에 이른다. 그런데, 해가 가려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소설의 초반부인 pp.25-26에서 '나'는 세계에 대한 증오를 핵심으로 하는 이단 마니교가 왜 남프랑스에서 번성했는지를 고민하다가 다음과 같은 생각에 이른다.

  "태양 탓인가?!"
  ......절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저 먼 곳에 걸린 위열(偉烈)한 태양이 눈에 들면서, 홀연 그같은 이단은 처음부터 모두 저 눈부신 원을 근원으로 하여 일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일었던 것이다. 이 햇빛 때문에, 이 무시무시하게 타오르며 반짝이는 거대한 빛 대문에, 거기에 감추어진 어떤 암울한 예감 때문에 사람들은 대지를 증오하게 된 것이 아닐까. 육신을, 이 무거운 고통스러움을 모멸하게 된 것이 아닐까.(pp.25-26)


태양은 육신에 대한 모멸의 원인이 된다. 그리고 육신에 대한 모멸은 이단이 번성하게 된 원인이다. 따라서 태양이 사라지면 육신에 대한 모멸도 사라지고, 사람들은 이단이 아닌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의에 이르게 된다. 이는 '나'의 견해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참으로 바울로의 사상은 의심할 여지 없는 영원의 진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들은 언젠가는 멸망한 이 육신(肉身)과 세계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커다란 이유를 확실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세계는 신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그뿐 아니라 신은 육신을 받으셨던 것이다.(p.38, 강조는 나의 것)

   무엇보다도 청빈의 생활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항상 그리스도의 육화(肉化)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에 대한 의의를 확실히 하여, 이 세계를, 이 육신과 물질의 세계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p.40)

소설의 절정인 안드로규노스의 화형장면은 '나'의 인식이 옳음을, 즉 영육의 합일이 완전성에 이르는 길임을 드러낸다. 안드로규노스의 양물-肉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이 드러남에 따라 일식은 시작되고, 안드로규노스의 양물에서 사정된 정액이 안드로규노스의 음문으로 들어가는 순간에 일식은 절정에 이른다. 육신의 완전성이 드러나는 순간에 해가 완전히 가려짐으로써 하늘은 영육의 합일이 요구됨을 긍정하고, 거인은 먼 하늘에서 교합함으로써 이를 추인한다. 그리고 pp.167-168의 독백에서, '나'는 그리움과, 회귀욕구와, 세계와의 합일을 느낀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 후 남는 것은 완전함의 상징인 금金이다. 그러니 결국 일식은 육신과 세계에 대한 증오에서 사랑으로 돌아가라는, 영육의 합일을 통해 완전의 길로 나아가라는 계시적 상징인 셈이다.

3..
저자는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저자는 작품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 시기는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전통의 기독교에 있어서, 육과 영이라든가, 신과 세계라든가가 무한히 접근했습니다. 20세기 이전에 단 한 번 있었던 예외의 시기였지요. 그것이 플라톤주의 수용과 종교개혁에 의해, 다시 신과 세계는 짝 갈라져서, 육에 대한 영의 우위가 확립되어버립니다. 그 갈라지기 직전의 긴장된 시기가 <<일식>>의 시대 배경입니다.(p.204)

저자의 말대로 당시의 유럽은 "스콜라 철학적인 고전주의와 르네상스적 인문주의가 부딪치던 시기"(p.205)이며, 시오노 나나미는 <<르네상스의 여인들>>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요체는 비좁은 정신주의의 껍데기 속에 틀어박히지 않는 대담한 영혼과 냉철한 합리적 정신에 있다. 여기에 입각한 정신과 육체의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조화."라고 썼다. 그러니까 저자는 이 예외적인 시대를 소설의 배경으로 설정하고, 육체를 긍정함으로써 서양의 기독교적 전통을 지양하고 르네상스적 정신의 손을 들어주고자 하는 것인지? 이는 내 추측일 뿐이지만. 어쨌든, 이런 저자의 주제의식은 매우 장대한 것이다. 나는 <<일식>>이 소설적으로는 꽤 정교하게 구축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이 주제는 저자에게 너무 버거운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젊은이의 허세. 이 소설이 묘하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유는 아마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의의 사람들·계엄령 알베르 카뮈 전집 1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00년 10월
평점 :
품절


재독. <정의의 사람들>만을 읽음.  

이 책은 내가 대학 입시때 자기소개서에 감명깊게 읽은 책으로 쓴 것이다. 오랜만에 읽으니 기분이 새록새록하다. 희곡의 제목은 p.76에 있는 도라의 대사 중에서 따온 것이다: "우리는 이 세계의 사람들이 아냐. 정의의 사람들일 뿐이야. 세상에는 뜨거운 열기가 있지만 그건 우리와 인연이 없어. (돌아서며) 아! 불쌍한 정의의 사람들!"(p.76)

제정 러시아기에 실제로 있었던 사회주의자들의 테러를 바탕으로 한 희곡. 정치적 테러는 장래의 추상적인 인간을 위해 현재의 구체적 인간을 희생하는 행위이다. 테러가 윤리적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에 대해 카뮈는 나름의 답변을 제시하고자 한다. 제2막에서 칼리아예프는 대공이 탄 마차에 아이들이 타고 있었다는 이유로 폭탄을 던지지 못한다. 대공 암살에 성공한 후에는 스쿠라토프의 회유와 대공비가 제시하는 종교적 구원의 길을 모두 거부하고 죽음을 맞는다. 어째서 칼리아예프는 죽어야만 했는가? 대공비의 말: "살아야 해요. 살아서 살인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해요."(p.103) 이 말은 어느 정도 진실이다. 대공은 테러리스트들에 있어서 전제와 탄압의 상징. 즉 어떤 추상화된 관념적 존재였다. 그러나 그걸 걷어낸 이후에는 대공 역시 하나의 구체적인 사람이다. 이념을 걷어냈을 때 남는 것은 칼리아예프가 대공을 죽였다는 것. 따라서 그는 대공비의 말대로 살인자라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이 어쨌든 하나의 생명이라면, 생명의 대가는 이념일 수 없다. 생명의 대가는 생명이어야 한다. "이념을 위해 죽는 것, 그것만이 이념의 눈높이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이야. 그것만이 나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어."(p.34) 피흘리게 한 자 스스로 피흘릴 때에만 살인은 정당화된다.

이 희곡의 서글픈 점. 이 희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인 칼리아예프와 도라가 사랑의 말들을 나누는 장면. 도라는 칼리아예프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렇지만 어떤 때는 사랑이란 좀더 다른 어떤 것이 아닐까, 독백이기를 그치고 더러는 대답도 들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난 이런 상상을 해봐. 하늘에는 태양이 빛나고 고개가 부드럽게 숙여지고 마음은 거만함에서 벗어나고 두 팔이 활짝 벌려지는 거야. 아! 야네크, 잠시 동안만이라도 세상의 이 참혹한 비참을 잊고 몸과 마음을 푸근히 맡겨둘 수만 있다면! 잠시 동안만이라도 다 잊어버라고 제 생각에만 몰두하는 것, 그런 걸 생각해볼 수 있어?(pp.73-74)

누구도 이 아름다움에, 이 부드러움에 도달하지 못한다. 칼리아예프는 아름다움과 행복을 사랑하기 때문에 혁명과 테러에 참여했지만, 그의 아름다움과 사랑은 결국 추상적인 관념에 대한 것이다. 그는 민중에게 삶을 돌려주길 원하지만 그가 가진 민중의 관념은 추상적이다. 그래서 그는 도라가 가진 의문, "과연 인민은 우리들을 사랑하고 있을까?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까?(p.73)라는 의문에 답하지 못하고 사랑은 단지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정신적 자위.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은 자연스러운 감정인데, 칼리아예프는 이를 억누른다. 그는 구체적인 사랑, 부드러움을 간구하는 도라에게 답변하지도 못한다. 그는 도라와 조직을 분리할 수 없고, 의롭지 못한 도라를 사랑할 수 없고, 가볍고 철없기만 한 과거의 도라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말하고 싶은 맘 굴뚝 같아."(p.75) 관념과 추상에 비끄러매인 채로 그는 테러와 교수대로 나아가고, 마지막에 도라 역시 칼리아예프가 나아간 길로 나아갈 것을 결의한다. 정의를 위해 나아가 죽음 속에서만 묶일 수 있고, 부드러움 속에서 하나가 되지는 못할 운명인 두 사람을 생각할 때, 내 가슴은 약간 아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르네상스의 여인들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7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재독. 이사벨라 데스테, 루크레치아 보르자, 카테리나 스포르차 부분만을 읽었다.

   이 책은 시오노 나나미의 처녀작이고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1996년에 출판된 이 책의 한국어 초판이다. 따라서 이 서평에서 인용 페이지는 내가 가진 책에 의했고, 새로 나온 양장본과 페이지가 일치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시오노 나나미는 무엇에 매료되는가? 단순하게 말하면 르네상스나 로마라고 하겠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그는 관능적인 대상에 끌린다. 그리고 그 관능은 세상의 윤리나 도덕, 그의 표현에 따르면 "비좁은 정신주의"(p.63)를 넘어서는 것에서 나온다. 예컨대 시오노 나나미가 빠져들었던 대표적인 남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루비콘 앞에서 "이 강을 건너면 인간 세계가 비참해지고,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자신을 세계 전체보다 우선시한다. 외부로부터 부여된 규칙에 구속되지 않고, 자신만을 믿으며 자신의 판단에 의해 행동하는 사람은 관능적이다. 

   자신만을 믿는 이 대담함의 근원은 무엇일까? 책의 1부의 주인공인 이사벨라 데스테가 그의 서재에 걸어놓았던 좌우명은 "꿈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nec spe, nec metu)"였다. 저자는 이 경구에 대해 <<침묵하는 소수>>에서 이렇게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런데 내가 처녀작, 그것도 제1부부터 '꿈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라는 격언을 어째서 망설이지도 않고 부제로 썼을까? 그것은 결코 주인공이 그 말을 좌우명으로 삼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부제는 종종 내용 전체의 기조음을 암시하고 싶을 때 쓰는 수법이다. '꿈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라는 말은 제1부 <이사벨라 데스테>에만 한하지 않고, 아예 이것을 책 제목으로 정하자는 의견이 나올 정도로 작품 전체를 흐르고 있다. 결국 나는 그 후에도 처녀작에 그치지 않고 이것을 중심축으로 삼아 계속 글을 쓰고 있다."(<<침묵하는 소수>>, p.12)

   작가에게 있어서 자신의 글의 중심축은 곧 자신의 삶의 중심축이다. 본디 꿈과 두려움은 모두 미래에 속한 것이다.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로 꿈꾸고, 미래를 알 수 없기에 두려워한다. 그래서 꿈도 두려움도 없는 삶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삶, 그래서 현실만을 살아가는 삶이다. "이사벨라에게는 눈앞에 있는 현실이 곧 인생이었다. 설령 그 현실이 청결하거나 아름답지 않다 해도, 그게 바로 인생이었다."(p.91)

   현실만을 살아가는 삶에서 기댈 것은 자기 자신 뿐이다. 이런 삶에 도덕이나 윤리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 서양에서 도덕과 윤리의 근원은 어디였던가? 종교. 그런데 종교적인 삶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잡히는 삶이다. 따라서 르네상스적 삶, 현실의 삶에서 종교는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보르자 가문의 사람들이 종교적인 삶을 살았던가? 체사레 보르자는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고자 미련 없이 주홍색 법의를 벗어던졌다. 카테리나 스포르차 역시 모든 것을 잃은 다음, 현세에서 무언가를 추구한다는 것이 불가능해진 다음에야 종교에 기울었다. 그래서 이런 삶은 결국 모든 것을 회의의 눈으로 바라본다. 특정한 가치를 도그마화하지 않는 삶. 모든 삶의 가치와 도덕과 윤리를 상대주의적으로 바라보는 삶. 그러나 이런 삶을 살아나갈 수 있는 것은 지극히 강인한 몇몇 사람 뿐이다. 평생 무엇에 기대지 않고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서 에포케epoche의 상태로 살아나갈 수 있기 위해서는, 부박하게 흔들리는 연약한 삶 속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가혹할 정도의 자기 단련이 요구된다. "활기차고 대담한 영혼, 냉철한 현실주의에 바탕을 둔 합리적 정신"(p.22)에 입각해 삶을 살아나갈 때, 그래서 시오노 나나미가 "정신과 육체, 선과 악이 명쾌하면서도 감각적이고 관능적으로 공존하는 것"(p.63)이라고 말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식의 조화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이사벨라 데스테처럼 "시대를 초월하지도 않았지만 시대에 떠밀려가지도 않았던"(p.22), 주어진 시대를 충실히 살아나갔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른 두 여자의 삶과 대조했을 때 이는 명확해진다. 루크레치아 보르자는 떠밀려갔고, 카테리나 스포르차는 꺾였으나, 이사벨라 데스테는 살아남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