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식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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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서 사서 읽음.

1.
나는 뭔가에 공감하고 싶어서 문학을 읽는다. 그런데 이 <<일식>>은 다 읽고 나서도 저자가 무슨 소리를 하고 싶어하는 건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머리를 써서 읽어야 하는 소설이라는 느낌. 저자가 이 작품을 문예지 <<신조>>에 보내면서 동봉한 편지에 쓰여 있는 저자의 문학관인 "나는 예술지상주의자이며, 문학으로써 성스러움을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p.202)는 문장 역시도 나의 찝찝함을 상쾌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다만 저자는 소설의 본령인, 작가의 사유에 의한 새로운 세계의 구축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저자는 자신이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 발자크의 후예임을 자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는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어쨌든,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일식日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따져봄으로써 소설의 주제에 다가갈 수는 있을 것이다.

2.
소설에서 일식은 안드로규노스의 화형장면에서 등장한다. 안드로규노스는 한 몸에 남성과 여성을 모두 지닌 전인적全人的 존재로 그려지는데, 소설에서는 마지막에 마녀로 몰려 화형당한다. 일식은 화형이 진행되는 와중에 안드로규노스의 양물이 드러남과 동시에 시작되어, 양물에서 사정된 정액이 안드로규노스의 음문으로 들어갈 때 절정에 이른다. 그런데, 해가 가려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소설의 초반부인 pp.25-26에서 '나'는 세계에 대한 증오를 핵심으로 하는 이단 마니교가 왜 남프랑스에서 번성했는지를 고민하다가 다음과 같은 생각에 이른다.

  "태양 탓인가?!"
  ......절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저 먼 곳에 걸린 위열(偉烈)한 태양이 눈에 들면서, 홀연 그같은 이단은 처음부터 모두 저 눈부신 원을 근원으로 하여 일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일었던 것이다. 이 햇빛 때문에, 이 무시무시하게 타오르며 반짝이는 거대한 빛 대문에, 거기에 감추어진 어떤 암울한 예감 때문에 사람들은 대지를 증오하게 된 것이 아닐까. 육신을, 이 무거운 고통스러움을 모멸하게 된 것이 아닐까.(pp.25-26)


태양은 육신에 대한 모멸의 원인이 된다. 그리고 육신에 대한 모멸은 이단이 번성하게 된 원인이다. 따라서 태양이 사라지면 육신에 대한 모멸도 사라지고, 사람들은 이단이 아닌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의에 이르게 된다. 이는 '나'의 견해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참으로 바울로의 사상은 의심할 여지 없는 영원의 진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들은 언젠가는 멸망한 이 육신(肉身)과 세계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커다란 이유를 확실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세계는 신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그뿐 아니라 신은 육신을 받으셨던 것이다.(p.38, 강조는 나의 것)

   무엇보다도 청빈의 생활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항상 그리스도의 육화(肉化)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에 대한 의의를 확실히 하여, 이 세계를, 이 육신과 물질의 세계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p.40)

소설의 절정인 안드로규노스의 화형장면은 '나'의 인식이 옳음을, 즉 영육의 합일이 완전성에 이르는 길임을 드러낸다. 안드로규노스의 양물-肉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이 드러남에 따라 일식은 시작되고, 안드로규노스의 양물에서 사정된 정액이 안드로규노스의 음문으로 들어가는 순간에 일식은 절정에 이른다. 육신의 완전성이 드러나는 순간에 해가 완전히 가려짐으로써 하늘은 영육의 합일이 요구됨을 긍정하고, 거인은 먼 하늘에서 교합함으로써 이를 추인한다. 그리고 pp.167-168의 독백에서, '나'는 그리움과, 회귀욕구와, 세계와의 합일을 느낀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 후 남는 것은 완전함의 상징인 금金이다. 그러니 결국 일식은 육신과 세계에 대한 증오에서 사랑으로 돌아가라는, 영육의 합일을 통해 완전의 길로 나아가라는 계시적 상징인 셈이다.

3..
저자는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저자는 작품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 시기는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전통의 기독교에 있어서, 육과 영이라든가, 신과 세계라든가가 무한히 접근했습니다. 20세기 이전에 단 한 번 있었던 예외의 시기였지요. 그것이 플라톤주의 수용과 종교개혁에 의해, 다시 신과 세계는 짝 갈라져서, 육에 대한 영의 우위가 확립되어버립니다. 그 갈라지기 직전의 긴장된 시기가 <<일식>>의 시대 배경입니다.(p.204)

저자의 말대로 당시의 유럽은 "스콜라 철학적인 고전주의와 르네상스적 인문주의가 부딪치던 시기"(p.205)이며, 시오노 나나미는 <<르네상스의 여인들>>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요체는 비좁은 정신주의의 껍데기 속에 틀어박히지 않는 대담한 영혼과 냉철한 합리적 정신에 있다. 여기에 입각한 정신과 육체의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조화."라고 썼다. 그러니까 저자는 이 예외적인 시대를 소설의 배경으로 설정하고, 육체를 긍정함으로써 서양의 기독교적 전통을 지양하고 르네상스적 정신의 손을 들어주고자 하는 것인지? 이는 내 추측일 뿐이지만. 어쨌든, 이런 저자의 주제의식은 매우 장대한 것이다. 나는 <<일식>>이 소설적으로는 꽤 정교하게 구축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이 주제는 저자에게 너무 버거운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젊은이의 허세. 이 소설이 묘하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유는 아마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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