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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보면 이해받는 기분이 들어요 ㅣ 도시공간 시리즈 3
김건희.김지연 지음 / 선드리프레스 / 2023년 7월
평점 :
건희, 지연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통해 기자와 필자로 처음 만났다.
이십 대, 미술과 책을 좋아하는 건희, 삼십 대,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렸고 대학에서 미술 이론을 공부한 지연의 첫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그들의 관계는 어쩌면 운명이었을지도.
둘이 주고받는 편지를 읽는 동안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나이 차이 같은 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데, 깊은 관계를 맺는 데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보다 중요한 건, 태도와 마음.
둘의 편지는 겨울에서 봄으로, 다시 일 년을 돌아 겨울에서 봄까지 이어진다.
일 년 가까이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보내는 편지에는 '미술'이라는 공통적인 주제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개인적으로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들로 채워진다.
'미술'을 몰라도 책 속에 등장하는 예술가나 작품을 몰라도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는 이유기도 하다.
책의 제목 <당신을 보면 이해받는 기분이 들어요>는 건희가 지연에게 보내는 편지 속 한 문장이다.
영화 <세렌디피티> 속 인물 조나단과 사라의 이야기를 꺼내며 쓴 문장이다.
침대에 반쯤 기댄 채로 줌 링크를 눌렀을 대, 나이 지긋한 남자가 등장할 거라는 예상을 깨고 웬 덩치 큰 곰 같은 젊은 남자가, 안경을 끼고 스웨터를 입은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어색하게 앉아 있는 걸 보았을 때, 정각이 되자마자 "안녕하세요" 인사하고는 느릿느릿 자기소개를 하는 순간에 저는 웃고 있었어요. 네, 맞아요. 제가 말했던 그 남자예요.
그 사람을 보고 있으면 저는 이해받는 기분이 들어요.
그 사람이 문득문득 던지는 짧은 말의 의미를, 그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 그 이유를 저는 알 것 같거든요. 사라는 조나단에게 각자 엘리베이터를 탄 뒤 같은 층에서 내리면 우리가 운명인 거라고 말했지만, 운명인지 아닌지는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는 것이에요. 시작도 못하고 덮어 버린 이야기, 열어보지 않은 선물은 평생 미련으로 남을 테니까요.
...
우리의 편지가 끝날 즈음이면 제 운명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 건희, <당신을 보면 이해받는 기분이 들어요>중에서, p20-21
이해받는 기분이 드는 사람을 만나는 건 어떤 느낌일까.
표정, 말투, 표현하는 문장, 느껴지는 감정. 이런 것들이 통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 글에 답장을 쓴 지연의 문장도 참 좋았다.
그래요. 사실 저도 운명이 있다고 믿어요. 하지만 사람의 운명이란 굵고 뚜렷한 선이 아니라 작은 점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손안에는 처음부터 주어진 여러 개의 점이 있고, 태어나면서 그걸 내 앞의 길에 뿌리는 거예요. 흩어진 그것이 나의 운명이고 그 점을 어떻게 이어갈지는 내 선택이에요. 가까이 있는 점만 이으며 근처를 맴돌지, 멀리 있는 점을 이으며 점점 앞으로 나아갈지, 혹은 타인의 곁에 있는 점을 선택해 그의 곁으로 다가갈지는 살면서 하나씩 결정하게 되겠죠. 끝까지 가보고자 하는 용기, 그건 결국 사람의 몫 아니겠어요?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그렇게 시작하는 서사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 지연, <우리, 운명의 점을 이어볼까요>중에서, p26-27
건희는, 미술을 좋아하는 이유로 말이 없다는 걸 꼽았다.
회화나 조소로 한정하면 그들은 그냥 거기에 있다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전시가 끝날 때까지 그 안에 머문다 고. 가만히. 죽은 듯이.
그러면 건희는 그걸 보고, 묻는다. 한참 그러고 있으면 귀를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무얼 말하 기도 한다. 듣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만 들리는 아주 비밀스러운 속삭임으로.(책 속 내용 발췌)
대학에 다닐 때 전시를 많이 보러 다녔다.
그땐 내 안에 채우는 것들이 모두 예술적인 것들이기를 바랐다.
그래야 문학을 할 수 있는 거 같았고,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삶, 그것도 명징하게 끔찍한 현실 같은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어떤 글도 완성하지 못할 거라는 걸 몰랐다.
삶이 쉽지 않다는 걸 몸으로 체득하면서부터 고요히 머무는 전시장에 들어가는 게 쉽지 않아졌다.
나는 오히려 건희와는 반대로 그곳에 가만히 있는 것들을 보는 일이 힘들었다.
다시 시작이 흘러, 이제는 뒤죽박죽 한 삶도, 엉망진창인 나도 그럭저럭 받아들이며 어우러져 살아가게 되니
그곳이 그립다. 고요히, 죽은 듯이 머물러 있는 것들을 보며 그 고요를 받아들이며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는 기대 같은 게 생겼다.
둘의 편지는 과거의 나를 돌아 현재의 나에게로 도착하는, 천천히 가는 열차를 타고 있는 느낌이 들게 했다.
지나온 시간이 그리워지거나 이유 없이 아직 당도하지 않은 미래가 궁금해질 때 다시 찾아 펼쳐보고 싶다.
그때 다시 이런 문장을 만날 거다.
"전 제가 오랫동안 지켜본 것들을 믿어요.(p176)"
같이 글을 쓰자고 한 이유 중 하나는 당신의 확신을 위해서예요. 일상에서 사유의 순간을 가지긴 어렵지만, 잠깐이라도 글을 쓰면 그런 순간이 다가오잖아요. 혹은 글을 쓰기 위해 준비운동을 하는 동안에도요. 그래서 이 편지들이 끝날 때 즈음 뭔가 발견할 거라고 믿어요. 어떤 것도 지우지 않고 그 위를 딛고 나아가겠다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같이 아름다운 것들을 오래 바라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 때때로 아름다움을 등지고 어두운 그늘에 숨어버리는 일상의 곁에 서 있어주는 일일 거예요. 어차피 다 다른 삶인데 무슨 얘길 하겠어요. 전 그저 저 같은 삶도 있다고 보여줄 뿐이에요. 이건 이정표가 아니라 그냥 당신 삶의 두께를 늘리는 재료 중 하나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 P87
...... 어른의 사랑은 감정만으로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삶을 지어내야만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마음 외의 조건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마음만으로 모든 게 가능한 것은 내가 아무것도 책임질 필요 없는 아이일 때만 가능한 일이라는 거죠. - P101
...... 어떤 존재를 사랑의 마음을 갖고 예쁜 눈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존재에 대한 확신이 생겨요. 몇 년간 여러 전시장에서 한 작가의 작품들을 만나다 보면 그런 단단한 예감이 불쑥 솟아오르거든요. 전 제가 오랫동안 지켜본 것들을 믿어요.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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