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벌집과 꿀
폴 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5년 6월
평점 :
디아스포라 문학을 읽을 때면 떠난다는 것, 남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다른 곳으로 이주한 적 없는 나는, 낯선 땅으로 이주해 삶을 꾸려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텍스트로 듣고(읽고), 상상하고, 해석한다.
그 사이 대체로 많은 이야기들이 내 마음대로 오역되고, 받아들여지고, 이해된다.
때론 디아스포라 문학(소설)이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작은 틈새로 각기 다른 이미지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폴 윤 작가의 <<벌집과 꿀>>은 그동안 읽었던 디아스포라 소설과 또 다른 틈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건 적확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었다. 소설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주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선명하게 혹은 흐릿하게 그려지는 이미지를 천천히 쫓으며 소설 한 편 한 편을 읽게 했다.
작품집에 수록된 일곱 편의 소설은 다양한 공간, 다양한 시간, 다양한 시대적 배경을 아우른다.
잘 모르는 장소, 낯선 지명, 낯선 분위기에 헤맬 것 같다가도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문장과 그 문장이 그려내는 이미지들 사이를 유영하며 천천히 소설에 빠져들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짧게 혹은 길게, 자의로 혹은 타의로, 어딘가로 떠난다, 자꾸.
'떠남'은 '남고자' 하는 마음과 비슷한 게 아닌가,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서, 나의 부모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내가 정착해야 할 곳이 어딘지 명확하지 않아서, 그리워서, 슬퍼서, 외로워서...
그들이 떠나는 이유는 너무 많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데에도 비슷한 이유가 필요할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불현듯 알게 된 게 있다면, 어떤 소설은 책을 덮은 뒤 스토리나 인물이 아니라 잔상이 남을 수도 있구나 하는 거였다.
물안개가 가득 낀 강가에 서 있는 것처럼 뿌연데 그게 답답하거나 축축하게 느껴지지 않고, 물안개가 걷히면 무언가 보이겠지, 희망을 갖게 했다. 편안하고 다정하게 떠났다 다시 돌아오는 이들을 환대하고 싶어졌다.
위에 언급했던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주민'일 지도 모른다고 쓴 건,
탈북 후 영국에 자리 잡은 부모를 둔 한인 2세 부부 이야기를 다룬 <크로머>, 사할린 점에 끌려온 할아버지를 둔 조선인 3세, 십 대 소년의 이야기가 담긴 <고려인> 소설을 읽고 난 뒤였다. 나고 자란 곳에서 낯섦을 느끼며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쫓으면서 정착할 집이 없고, 머물고 있더라도 이방인 듯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태어난 곳에서 살고 있어도 집 없는 사람처럼 외롭고 내쳐지는 기분이 드는 순간, 떠나고 싶은 순간, 돌아갈 곳이 있을ᄁᆞ 되짚어 보는 어느 순간, 같이 있어도 외롭고, 슬픈 관계들 속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며 사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하러 돌아오실 건지 궁금했어요. 하지만 돌아오실 생각이라면, 그러시지 않아도 돼요."
"내가 필요 없다는 거구나, 그렇지?" 아버지가 말한다.
"그래요." 막심이 말한다. "전 괜찮아요. 저 혼자서도 괜찮아요."
- <고려인> 중에서, p236
출소 후 다시 삶을 살기 위해 낯선 동네에 자리 잡으려는 청년이 등장하는 <보선>과, 낯선 고려인 이주지에 임관한 장교 이야기를 담은 <벌집과 꿀>, 탈북한 뒤 스페인에서 청소 일을 하는 여자가 등장하는 <코마로프> 세 편의 소설은 특히 마음에 남았다.
소설이 왜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지, 우리가 읽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 세상은 어떠한지...... 작가의 이야기를 따라 가며 마음껏 읽고, 듣고, 상상하시길.
# 그가 아는 한 그는 혼자였다. 이상한 동시에 전혀 이상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는 그들의 얼굴을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 마주치던 상사와 다른 운전사들의 얼굴을. 그다음엔 카드 게임을 하던 바의 주방 직원들과 빨래방 할머니의 얼굴도 잊어버렸다.- <보선> 중에서, p15
# 저는 그에게서 늘 보아온 익숙한 분노의 폭발을 예상했지만, 놀랍게도 그의 얼굴은 온화하고 진지하면서도 상처받은 사람의 얼굴로 변해 있더군요. 그는 차분하게 말했습니다. "부탁이니 우리를 그냥 놔둬줘요. 우리는 아무도 원치 않고 관심도 없는 땅에서 ㅅ살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당신이 와서 이 땅을 다시 차지하려 들기 전까지는 모든 게 괜찮았다고요."- <벌집과 꿀> 중에서, p198
# 아버지, 저는 지금 당신이 어디 계신지 상상해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제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도요. 왜 누군가는 저주받은 장소를 떠나지 않으려 하는지도요. 아이는 이제 멀리 있습니다. 온통 햇빛으로 둘러싸인 채, 아주 조금만 보일 뿐입니다. 숨겨진 자신의 왕국으로부터 돌아오던 벌은 이제 더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벌집과 꿀> 중에서, p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