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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들 - 마음의 고통과 읽기의 날들
수잰 스캔런 지음, 정지인 옮김 / 엘리 / 2025년 10월
평점 :
[리뷰대회]
살면서 한 번쯤은 누구나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그게 사람이든, 종교든, 음악이든, 영화든, 책이든... 자신을 구원하는 대상은 모두 다르겠지만, 누구에게나 기댈 곳은 있다고. 내겐 그게 책이었고, 책이고, 책일 것이다. 수잰 스캔런 역시 책이 자신을 구원했다고 썼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다르게 얘기해 보면, 단순히 물리적인 '책'이라고만 말하는 건 맞지 않을지 모른다. 버지니아 울프가, 조엔 디디온이, 실비아 플라스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있어야 하니까.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세계로 진입할 수 있었으니까.
한동안 내가 책을 통해 얻은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할 수 없어 답답했다. 책이 뭐냐고, 책으로 뭐가 되느냐고 물을 때, 반할 만큼 멋지게 말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수잰 스캔런의 입을 빌려 비로소 나는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책은 '구원'한다. 실의에 빠진 나를, 두려움이 빠진 나를, 억울해서 미칠 것 같은 나를, 답답함을 풀고 싶은 나를, 불공평을 까발리고 싶은 나를.

『의미들』은 수잰 스캘런 자신의 병력에 대한 회고이자, 그로부터 벗어나 '자살하지 않기로 결심' 하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 살아가는 삶에 대한 고백이다. 그러나 많은 여성의 회고이고, 고백이기도 하다. 그녀는 어릴 때 죽은 엄마와 정신 병원에서의 생활 이야기를 쓰기 위해 작가가 된 것이라 생각했다. 책 속에는 두 이야기가 얽혀있으며 각각의 사건, 각각의 이야기로 들리기도 하지만 결국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그 하나의 이야기는 바로 수잰 스캘런 자신이다.
어떤 책을 읽다가 울어본 적 있거나, 자신의 이야기 같아 흠뻑 빠져들어본 경험이 있다면 짐작하겠지만, 나는 책과 사람은 연이 있다고 믿는다. 같은 이야기를 오늘 읽을 때와 다음 날 읽을 때 느낌이 다른 건 오늘의 나와 다음 날의 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 경험의 의미를 작가는 '수용의 순간'이라고 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이 작가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그 책이 그런 책이 되는 것'(p96)을 작가가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그런 책이 있다. 스무 살에 읽은 양귀자의 <<모순>>(쓰다, 2023.4.)과 마흔다섯 살의 읽은 <<모순>>은 마치 다른 책인 것처럼 다가왔다. 이십 대의 나는 그 책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마흔이 넘은 나는 충분히 그것을 허락하고 받아들였다.
만약, 자신의 인생 책이 한 권쯤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수용성을 한 번쯤은 경험해 보지 않았을까. 그 순간의 짜릿함을 잊지 못하지 않을까.
우리가 병리라 부르는 것 중에는 그 무엇도 고립된 채 존재하는 건 없으며, 우리는 맥락 속에, 그 순간이라는 맥락과 서로의 존재라는 맥락 속에 존재한다는 것, 우리는 부서지기 쉬우며 유동적이라는 것은 꼭 말하고 싶다. 우리는 존재하는 방법을 배워간다.
- <나의 정신이상과 그 밖의 것들> 중에서, p52
병원에서 보내 몇 년의 시간이 자신을 설명할 수 없음을 작가는 알고 있었다. 책 속에 담긴 모든 기록은 그래서 처절하다. 자신에게 당도한 불행과 불안과 안쓰러운 시선과 '미친' 사람이라는 시선까지 받아내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에 '의미'를 찾아보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그녀는 점차적으로 자신의 원하는, 선택한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 간다. 언어를 통해서.
"독서와 글쓰기는 내가 살고 싶어 한다는 걸 스스로 인정할 수 있게 되기 훨씬 전부터 나에게 살아갈 길을 만들어 주었던 활동이다."
어쩌면 우리도 그럴지 모른다. 자신이 인지하기 이전부터 책으로부터 구원받고 있었는지도. 아니면 그 무엇으로라도 살아갈 방향을 찾았을지도.
극적인 순간이 닥치지 않으면 잘 모르니까. 바닥까지 내려갔다는 느낌이 아니라면 그럭저럭 모른 척하며 살기도 하니까.
아주 오랜만에,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며 읽은 책이다. 그건 이 책이 나와 수용의 순간이 만들어졌단 의미일 것이다.
나는 천천히 빠져들었고, 느리게 읽었으나 강렬한 느낌을 받으며 책을 덮었다. 아직 이 책을 펼치지 않은 누군가를 부러워하면서.
김지승의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마티, 2025.)를 읽을 때 샬럿 퍼킨스 길먼의 <누런 벽지>를 꼭 읽어야지 생각했는데, 수잰 스캘런의 글 속에도 어려번 <누런 벽지>가 언급된다.
그녀는 자신이 경험에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 길먼의 책을 다시 읽었다고 했다. "이런 작가들은 나에게 돌아갈 길, 의미를 밝혀낼 길, 시간을 멈추고 병원에 머물던 그 여자를 이해할 길을 내주었다. 그 젊은 여자는 거기서 뭘 하고 있었을까? 절대적 운명 같았던 것이 사실은 다른 무언가였을 수도 있었다. 내가 그걸 알아낼 수 있다면. 이 책 역시 그 질문에 답하려는 시도다.(p205)"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읽고 쓰는 이유에 대해. 그러다 그녀의 문장들에 기대 '독서'가 나를 구원하고 있다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그 뒤에 이어지는 쓰기는 구원받은 자의 즐거움이라고.
나는 필사적으로, 동시에 전율을 느끼며 책을 읽었다. 책 읽기는 삶의 한 방식이, 혹은 사는 법을 찾으려는 탐색이 되었다. 젊은 여자가 책들의 영향, 독서의 영향을 받아 정체성을 형성하고 그 형태를 만들어가는 일은 쉽게 경시되지만, 그럼에도. 책 읽기는 내가 가진 것이었고 내겐 그것뿐이었다. - P55
책들을 읽는 일은 책에 안기는 일이었다. 그 처음 이후 나는 이 소설들을 여러 번 다시 읽었다. 각각의 독서가 저마다 중요하다. 수전 손택의 표현대로, 읽을 가치가 있는 건 무엇이든 다시 읽을 가치가 있다. 혹은 이탈로 칼비노의 말. 읽기와 디시 읽기 사이에는 아무 차이도 없다. - P57
여러 해 동안 나에게는 나의 책 읽는 삶과 정신 질환의 삶이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둘은 나란히 함께 자랐다. 전자는 나를 문학의 삶으로 이끌었고, 문학의 삶이란 읽기와 쓰기의 삶이었다. 후자는 나를 막다를 골목으로, 나를 보호해 주지 않을 침묵으로 이끌었다. 나의 영원한 굶주림. 물론 나는 여러 크고 작은 방식으로 분명히 회복했으며, 나를 지탱해 준 것, 나에게 또 하나의 삶을 준 것은 읽기와 쓰기였다. - P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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