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도 야생을 산다 - 인간 본성의 근원을 찾아서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지음, 최재천.김길원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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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02 에드워드 윌슨.


내가 가진 이 책은 10년 전에 나온 1판 1쇄이다. 끝까지 읽긴 읽었지만 이 책이 말하려는 바를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사소한 오타가 너무 많이 눈에 띄었다. 지뢰밭 뛰는 기분이어서 집중력이 점점 떨어졌다. 쉬다가 읽어도 또 똥 밟고 한숨 쉬고, 몰입 자체가 불가능했다. 처음에는 생화학에 데이고 와서 아주 미세한 분자 단위 아닌 종 단위, 개체 단위로 연구하는 생물학이니까 좀 나으려나, 했는데 흥미로워야 할 이야기들도 이상하게 집중이 안 되었다. 내가 요즘 상태가 안 좋네, 내 탓을 하다가 후반부로 오니까 이 책이 심각했고 잘못했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래서 오자나 오문이 보이는 대로 베껴놨다.

책이 생물이라면, 이 한국어 번역책은 자연 선택에서 도태되었을 것이다. 책의 장점과 가르침을 상쇄할 만큼의 단점-오자, 어색한 문장-이 많았다. 에드워드 윌슨 선생의 책을 같은 출판사에서 퍽 많이 냈던데 궁금했을 주제들도 이런 식이면 믿고 거르게 생겼다. 번역/편집/교열 교정의 총체적 난국이 나에게서 윌슨 선생님과의 또다른 만남을 앗아갔어… 공동 번역이어서 그나마 뭔말인지는 읽혔던 전반부와 갑자기 왜 이 지경이 되었나 하는 후반부가 각각 누구 책임일지 나는 알지 못한다. 뱀에 대한 진화적, 생물학적, 문화적 공포의 형성 이야기가 초반부에서 제시되고 다시 후반부에 또 한 번 등장하는데, 거기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보려다가 엉망진창 문장들에 걸려 다 잊어버렸다.

책의 구성은 윌슨 선생님이 아주 길지도 짧지도 않게 쓴 생명, 생물학에 대한 에세이를 모아 놓은 형태이다. 뱀, 상어, 개미 그리고 (월리스 선생도 반했던) 극락조 같은 개별종들을 다루는 부분이 그나마 재미있었다. 그러다가 생태 윤리라고 해야 되나, 당위적으로 서술하는 부분은 원래도 재미가 없었겠지만 문장이 너무 꼬여서 뭘 말하는지 여러번 다시 읽어야 했다. 그럴 필요는 없었겠다 싶다. 생물 다양성 감소에 대한 우려와 인간이 지나치게 지구와 다른 종을 파먹고 있다는 취지의 서술에는 동의한다. 인간은 방향만 제대로 잡으면 지구 안 망치고 잘 할 수 있어! 하는 건 별로 와닿지 않는다. 가장 멍청하고 위험한 사람들이 제일 큰 힘을 가지고서 같은 종끼리도 뚜드려 패고 있는 마당에, 인간에게 그런 거시적 안목과 자비와 희망을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밑줄 긋기
-사회 생물학에는 위험한 함정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비판 없이 존재의 당위성을 규정하는 윤리학의 자연주의적 오류다. 그것은 지속적인 경계를 통해서만 피할 수 있다. 인간 본성의 대부분은 구석기 수렵 채집인의 유산이다. 그러나 어떤 유전적 편향의 증거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 존재하며 미래 사회에도 지속될 관습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될 수는 없다. 우리 대부분이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전혀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상, 그러한 관습을 따르는 것은 생물학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잘못된 생물학이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재앙을 불러올 것이다.(118)

-인간 중심적이 된다는 것은 인간 행동의 한계, 인간 행동의 바탕이 되는 생물학적 과정의 의미, 장시간에 걸친 유전적 진화의 보다 깊은 의미를 모두 무시하는 것이다. 인간종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 의식적으로 거리를 유지하고 바라볼 때에야 비로소 좀 더 포괄적인 시야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126)

-공포심은 극단적이고 불합리한 두려움으로서 메스꺼움, 식은땀, 그 밖에 중추 신경계에서 일어나는 다른 반응들을 수반한다. 먼 옛날 인류의 환경 속에 존재했던 가장 큰 위험들, 예를 들면 밀폐된 공간, 높은 곳, 뇌우, 급한 물살, 뱀, 거미 등은 이러한 공포심을 쉽게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총, 칼, 차, 폭탄, 전기 컨센트 등 현대 산업 사회에 존재하는 가장 큰 위험 요소들에 의해 공포심이 환기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 점은 주목할 만하다. (147, 저자의 입장과 다르게 나는 후자로 열거된 모든 것에 공포에 가까운 불안감이 있어서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나만 그러냐...)

-인간의 정신은 확률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같은 선택을 하는 구성원의 비율이 사회마다 동일할 수는 없으며 이에 따라 문화적 다양성의 패턴, 달리 말해 ‘민족지학적 분포의 형태’가 형성된다.(153)

-다윈의 주사위는 지구의 형편을 나쁘게 하는 쪽으로 굴러왔다. 많은 과학자들이 생각하듯이, 좀 더 상냥한 동물이 아닌 육식 영장류가 큰 발전을 이룬 것은 생태계에게는 엄청난 불운이었다. 우리 종은 파괴적 충동을 부추기는 유전적 형질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종족 안에서 뭉치기를 좋아하고, 공격적으로 세력권을 방어하며, 최소한의 필요 이상으로 개인적인 공간을 가지려 하고, 이기적인 성격과 성적 욕구에 의해 행동한다. 가족과 종족의 수준을 넘어선 협동은 어려운 일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육식에 대한 우리의 선호이다. 이것은 태양 에너지를 낮은 효율로 이용하도록 만든다. (215, 인간이 대역 죄인이긴 하네…)

-그리고 나는 생태여성주의와 같은 일종의 잡종 운동(hybrid movements)은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이다. (221, 나는 이 문장도 번역의 ‘잡종’ 단어의 선택도 불편하다. 생물학에서는 잡종이 중립적인지 (정말 그런지는 잘) 몰라도 용례로는 되게 폄하하는 말을 굳이 골랐다. 혼합형, 융합형 이 정도까지만 해도 좋았겠다.)


+오자/워스트 번역문들
-상광하지->상관하지(88, 이전에도 종종 보다 더는 못 참고 잘못된 글자 다 옮겨 적기로 했다.)
-다라->따라(100)
-니나니벌같이-나나니벌 같이(103)
-연향을->영향을(138)
-나타나틑->나타나는(149)
-사시이다. ->사실이다.(154)
-약간 떨어져서 보면 수컷은 마치-펄럭인다.(161, 버퍼링 난 것처럼 같은 문장 반복)
-회정 방향->회전 방향(185)
-추적하는 곳이다.-> 추적하는 것이다.(200, 맥락상 그렇다. 아씨 진짜 오타 이렇게 많은 책 너가 처음)
-지중해서 기후의->지중해성 기후의(203)

-야생종들은 새로운 제약, 농작물, 섬유, 펄프, 석유 대체품, 토양과 물의 복원을 통한 미개발 자원들이다. 이 주장은 명백한 사실이고 확실히 반보존자유주의자들의 진로와 주장을 막을 수 있다. (205, 여기 나만 호응 이상하고 번역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인가. 두번째 문장은 뭔 말인지는 알겠는데 진로와 주장을 막는다고 저렇게 동사 하나에 퉁쳐도 되냐)

-살아 있는 생물종의 권리에 대한 단순한 청원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원리에 대한 단순한 요구로 회답될 것이다. (207, 끔찍한 문장들이 후반부에서 갑자기 빈도가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인간에게 도움이 되도록 생태계가 이해되고 사용될 그날까지 생물계의 현명한 이용은 살아남은 생태계들을 보존하고 그들이 담고 있는 생물 다양성을 구하기에 충분하도록 그들을 면밀하게 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230, 마지막 문장까지 싸우자는 건가...좀 끊어서 말이 되게 쓰라고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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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29 읽기 중단. 닉 레인.



부록과 참고 문헌 소개 등을 제하고 나면 이 책은 320쪽 남짓이다. 162쪽까지, 절반쯤 읽었을 때, 남은 뒷부분을 챠르르 넘겨 보았다. 여전히 분자에서 전자가 왔다갔다 양전하를 띠다가, 음전하를 띠다가, 자기들만 떨어져 나갔다가, 난리가 난다. 일반적인 화학 구조식 아니고, 닉 레인 선생님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생화학 반응에 대해 말로 얘가 저기 갔다, 여기 갔다, 하는 걸 쉽게 설명해주려고 애쓰셨다. 그렇지만 내 눈은 그저 글자를 좇을 뿐, 내 뇌는 글자와 그림, 그림 속의 화살표를 연결할 수 없었고, 그 조그만 것들의 끝없는 변화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은 놓아주기로 했다.

고1 과학의 공유 결합, 이온 결합 나오는 부분까지 ebs강좌를 듣다가 그만두었다. 기본만이라도 갖추고 싶었는데. 휴가 때니까 여흥으로 그런 공부라도 할 생각을 한 거지, 퇴근하고나서 수학 문제나 과학 문제를 풀 기력도 여유도 이젠 없다. 결정적으로 이해력이 딸렸다. 정말 그랬다… 또르르...

고등학교 화학 과목까지 제대로 공부하고 나서 이 책을 읽으면 따라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닉 레인 선생님은 더 읽을거리를 소개하면서 ‘이 책은 교재나 연구 논문이 아니’라고 (340) 하시지만, 그렇다면 이 책의 정체성은 뭘까요… 적어도 과학에 큰 흥미를 느끼지만 더하기 빼기에서 혼선을 겪는 (나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즐길 거리로 읽기에는 너무도 힘들었다.

선생님이 책 후반에 제시한 읽을 거리 목록은 국내서 번역이 되어 있는 것 위주로 미리 훑어 보았다. 본인이 지은 ‘생명의 도약’, ‘미토콘드리아’, ‘산소’ 같은 걸 이 책을 쓸 때 참고한 책으로 넣어 뒀다. 산소 빼고 제일 유명한 책들은 두 권 봤으니 됐잖아… 그때도 너무 어렵다 싶긴 했지만 재미있기도 했다. 지금처럼 이온이나 분자의 형성, 변화 과정을 계속 따라가기란 어려운 것을 넘어 나는 안 되는 것으로...개미에게 드레스를 입히긴 좀 그렇다. 그나마 내가 가진 책 중에 ‘태양을 먹다’를 참고했다고, 광합성의 역사를 흥미롭게 다룬 책이라고 하니 그걸 나중에 천천히 봐야겠다.

책을 읽는 동안 뭘 건진 게 있나 돌아보려 해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일단 이 책에서 크레브스 회로, 역 크레브스 회로 이런 말을 처음 들어봤다. 아직도 그게 어떻게 작동되는지 원리를 어렴풋이도 이해 못하겠다. 뭐에 쓰는 건지도 잊었다. 캘빈-벤슨 회로에서 캘빈이 벤슨한테 무슨 이유인지 빈정 상해서 해고해 버리고 자기 혼자 노벨상 탄 건 기억난다. 과학자가 등장인물인 대하 드라마 같은 게 펼쳐질 땐 조금 재미있었다. 똑똑한 선생님들조차 물질 대사의 중간 과정이 이 회로냐, 저 회로냐, 이게 맞냐, 아닌 거 같은데, 하는 걸 보고서 그나마 깨달은 건, 과학은 완벽하고 완성된 무언가를 찾아내고 만들어내는게 아니라, 끝없이 틀리는 걸 반복하고 참아가며 실낱 같은 뭐라도 건지면 다행인 작업이었다. 어차피 답이 없어서 사람이 선택하고 방향을 잡아가는 일들이 있지만, 과학은 그런 일은 아니었다. 에휴.

닉 레인 선생 책은 이거랑 전에 읽은 두 권 말고도 ‘바이털 퀘스천’이랑 ‘산소’도 사 놨다. 그것들은 이 책보다는 덜 어려울까… 일단 좀 더 묵혀뒀다 만나는 게 좋겠는데 점점 더 바보가 될 텐데 걱정이다. 읽고 싶어도 읽지를 못하는 이 느낌 정말 안타깝다. 내 탓하지 말고 내 눈높이 못 맞춘 과학자 선생님 탓을 해야지...논문이나 교재 아니라면서요...

+밑줄 긋기
-센트죄르지는 그(비타민C)구조를 결정하기 위해서 씨름했다. 개구쟁이 같은 유머 감각을 지닌 그는 처음에는 이 물질에 “모른당ignos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nose˝는 당의 성질을 나타내고, “ig˝는 자신의 무지ignorance를 나타낸다). 이 이름이 거부되자, 그는 ”신만안당Godnose˝이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결국 이 물질은 항괴혈병적anti-scorbutic(비타민C결핍증인 괴혈병을 예방하는) 특성이 있다는 의미로 아스코르브산ascorbic acid이라는 화학명을 얻게 되었다. (57, 비타민C를 처음 분리해낸 센트죄르지의 작명도 재미있고, 이걸 소개하는 닉레인도 유쾌하고, 모른당, 신만안당으로 번역한 번역가의 센스도 마음에 들었다.)

-산소는 광합성의 폐기물이다.(133, 우리는 폐기물 재활용사!)

-생명은 심해의 열수 분출구에 있는 이산화탄소와 수소에서 시작되었을까? 아니면 밀러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생물적 화학의 유서 깊은 전통적 주장처럼, 지표수에서 시안화물 같은 기체가 자외선으로부터 에너지를 얻어서 시작되었을까?
이 생각들은 사실상 모든 측면에서 상반된다. 심해 대 따뜻한 연못, 빛에너지 대 화학적 불균형, 물질대사 우선 대 유전자 우선, 독립영양 대 종속영양, 빠른 화학 대 느린 축적, 국지적 규모 대 행성적 규모, 생물학 대 화학, 이 중 생명의 기원으로 이끈 궁극적 길잡이는 어느 쪽이었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135, 과학자님들도 아직 답을 내지 못하고 서로 대립하고 있는 근원에 대한 주제가 많다. 그러니 내가 뭘 잘 못 알아들어도 너무 스스로 뭐라고 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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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6-03-29 2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레브스 회로는 우리가 수업 시간에 배운 TCA 회로를 말해요. 올려주신 화학 구조 나온 페이지가 바로 그 😊😊크레브스 회를 보여주는 그림인데, 보고 있자니 알던 것도 모르겠는 걸요.

반유행열반인 2026-03-29 22:25   좋아요 0 | URL
TCA회로도 뭔지 모르겠어요...우리에 들지 못하는 서글픔...

잉크냄새 2026-03-30 1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그림이 개구리알이나 올챙이로 보여요. ㅎㅎ

반유행열반인 2026-03-31 19:06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 개구리알 올챙이 버블티 ㅎㅎ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민음사 모던 클래식 4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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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260328 조너선 사프란 포어.


‘사랑의 역사’와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동시에 선물 받았다. 둘은 부부이고 둘다 작가라고 했다. 제법 그럴싸한 선물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에게 들었다. 그 둘은 진작에 헤어졌다고, 남자 작가 쪽이 모델과 바람이 났다고 했다.
이 책 시작에는 헌사가 있다. ‘니콜 내 아름다운 여신 당신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13) 끝난 사랑 이야기를 들은 뒤 읽는 헌사는 조금 우스웠다. 그렇지만 사랑을 거둬간다고 바친 책까지 거둘 수는 없으니까, 이불을 팡팡 차며 사랑의 흑역사를 곱씹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작가님.

니콜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를 먼저 읽었다. 딱 4년 전 3월이라고 한다. 책 이야기는 별로 안 해 놓고, 내가 나중에 소설집을 내게 되면 ‘사랑의 흑역사’라는 제목을 붙일 거라고 야심차게 차례까지 짜 놨다. 이거야 말로 흑역사잖아.

왠지 조너선 사프란 포어가 얄미워서 읽긴 해야 하는데 어쩌다보니 밀리고 밀렸다. 그러다가 읽었다. 신경과학적 실험을 한다고 책 곳곳에 이런 저런 그림과 텍스트로 장난치는 책을 함께 읽고 있었는데, 동시에 읽는 소설도 비슷하게 사진과, 겹친 글씨들과, 빨간펜과, 역재생되는 누군가의 소생 장면 같은 게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우연이었다.

오스카는 대놓고 양철북의 악동을 떠올리게 하려는 이름 아냐? 하고 어린 아이를 화자로 내세우는 건 치트키지...하면서 처음에는 조금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런데 화자는 오스카와, 오스카의 할머니와, 할머니를 떠났던 할아버지를 오간다. 조금 정신 없긴 했어도 페이지는 잘 넘어갔다. 열쇠와 블랙을 찾아라! 뭐 이런 미션 내지 추리물처럼 오스카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아빠의 흔적을 찾고자 한다. 가보지 않았던 퀸즈와 스태튼 아일랜드에도 걸어간다. 911 테러로 아버지를 잃은 오스카는 이런저런 불안장애에 시달리는 모습이 언뜻 보인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차라리 찾아다니는 일에 몰두하느라 힘들어하거나 슬퍼하는 걸 덜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학교에서 갑자기 방송부 애들이 텔레비전으로 세계무역센터에 비행기가 충돌하는 장면이 나오는 뉴스를 틀어줬었다. 무슨 기분이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20년이 넘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화씨911 같은 영화를 보면서 부시가 잘못했네...하는 생각을 했다. 영화 속 부시는 유치원에서 애들 책을 읽어주다가 귓말로 사고 소식을 전해 듣고 어쩌지, 하는 표정으로 망연자실해 있었다. 정말 이건 어쩌지. 안타깝다는 생각 정도는 했겠지만 머나먼 나라의 무고한 사람이 무수히 많이 죽는 일이 벌어진 게 피부에 와닿지는 않았었다.

이 책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고통과, 그럼에도 살아갈 수 있는 건 남은 사람들끼리 아직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걸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들여다 보게 해 주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그저 멀리 떠났다가 40년 만에 나타나서 내 손자, 하는 토마스 할아버지는 왜 떠나고 왜 돌아왔는지, 아버지와 오스카와 이어지는 연결고리 내지 땅 파는 일 시키려고 소환한 건지, 조금 납득이 안 되었지만 말이다. 폭격에 사랑하는 사람과 뱃속 아기와 가족을 동시에 잃는 건 말을 잃을 만큼 충격적인 일일 수는 있겠다. 그래도 자기 삶이 박살난 걸 애나의 동생한테 과거의 무언가를 찾으려다 잘 안 되니까 아이를 가진 그녀를 버리고 떠나고, 뒤늦게 자기 아이인 토마스가 죽고 나니 돌아와서 뭔 사모곡도 아니고 사자곡 같은 편지를 줄줄 풀어 놓고 있어서 보기가 싫었다. 집안에도 비슷한 사람이 있어서 더 그랬다.

오스카가 아이어서 그런가, 뉴욕의 사람들은 대체로 친절했다. 아이의 고통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모르는 척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 방식대로 애도하는 걸 냅두는 엄마도 그렇고, 한동안 오스카와 블랙 씨들을 만나러 함께 다녀준 위층 블랙 할아버지도 그랬다. 할머니의 보살핌이며, 경비 아저씨들이며, 리무진 기사랑 그 모든 블랙들까지, 다 오스카를 애 취급하지 않고 진지하게 짧게나마 이야기를 나눴다. 나에게도 그런 어른들이 조금 더 많았다면 덜 불행했을까. 그런 어른들이 많진 않지만 그래도 있긴 있었어서 이만큼이나마 버틸 수 있는 인간으로 자랐을까. 나는 그런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아직도 왜?를 향해 헤매는 아이인 것 같은데 말이다.

이 시절도 온갖 공습 폭격으로 삶터가 다 망가지고 언제 또 죽음의 가능성이 다가올까 숨죽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지금 ‘우리는 무사할 것이다.’(456)는 닿지 않을 말이다. 그 우리는 살아남은 미국인들로 한정된다. 소설 속엔 제일 끔찍한 건물인 트럼프타워와 아름다운 건물인 유엔 본부가 잠시 나온다. 평화 대신 돈과 피를 택한 나쁜 사람들은 그만큼 되돌려 받았으면 좋겠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상상도 잘 안 되는 먼 곳의 사람들은 최대한 무사할 수 있었으면, 그래서 남은 고통도 사랑으로 문지르며 삶을 이어갔으면 좋겠다.

+밑줄 긋기
-나는 어떻게 하면 덜 느낄 수 있는지를 배우는 데 평생을 바쳤어.
날이 갈수록 느끼는 감정들이 줄어들었지.
이런 것이 늙어간다는 것일까? 아니면 늙는다는 건 뭔가 더 나쁜 것일까?
슬픔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려면, 행복으로부터도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단다. (248, 요즈음엔 비슷한 생각을 해요.)

-태어난 것은 모두 죽어야 한다. 그 말은 우리 삶이 고층 빌딩과 같다는 의미이다. 연기가 번져오는 속도는 저마다 다를지라도 불길에 휩싸여 있기는 다 마찬가지이고, 우리는 모두 그 안에 갇혀 있다. (340, 이런 세계관, 인생관을 아홉 살에 갖는다는 건 참 슬픈 일이다. 그런데 내 아홉 살도 딱히 다르진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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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29 1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3-29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의심한다 - 세계적인 신경과학자 보 로토의 ‘다르게 보기’의 과학
보 로토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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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27 보 로토.

책의 편집이 재미있게 되어 있었다. 책 모서리에는 어렸을 때 한 번씩은 만들어봤을 프레임 애니메이션 같은 것이 양면으로 새겨져 있고, 감각을 자극할 만한 그림들, 착시를 보여주는 예시들, 어느 페이지는 처음에는 옅게 인쇄되어 있다가 점점 그라데이션처럼 글씨가 진해지기도 하고, 두 페이지를 맞닿게 해야 문장이 완성되는 때도 있다. 저자는 ‘이 책을 이 책이 기술하는 것 그 자체가 되게 만들려고 애썼는데, 이 책이 기술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다르게 보는 과정을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것’(10)이라고 했다. 흥미로운 시도였다.

그렇지만 어찌저찌 이 책을 (별로 집중하지는 못한 채) 며칠에 걸쳐 다 읽고 나니, 신경과학에 대해서 더 알게 되었나 하면 잘 모르겠고, 신경과학에 기반하여 나의 지각과 인식을 바꾸게 되었냐 하면 그것도 잘 모르겠다. 내가 달라졌구나, 할 만한 상황에 맞닥뜨리거나 해결할 과제를 이전과 다르게 수행하는 경험을 아직 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

궁금하긴 하다. 사람은 자신이 예전과는 달라졌음을 쉬이 인식할 수 있을까? 어쩌면 스스로 난 달라질 거야, 달라졌어, 하고 선언하고 그렇게 믿는 것이 곧 달라짐이 아닐까 싶다.

나는 항상 버릇처럼 일부러 남들이 보는 방향이 아닌 반대로 가기도 하고, 기본값이 상대에 대한 신뢰보다는 의심이고, 막상 저지른 일과 말 같은 것을 반추하며 그게 맞았나? 다른 건 없었나? 고민하는 일도 잦다. 나를 둘러싼 물건들을 자주 위치와 배열을 바꿔가며 조금 더 내게 맞는 느낌이 될 때까지 다시 놓고 치우고 반복하는 습관도 있다. 그렇게 나 자신 또한 놓고 치우고 다시 놓고를 반복하며 살았다.

다양한 연구와 작품과 사례를 들며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지 이렇게 해 봐, 저렇게 해 봐, 하는 것들이 많은데, 나는 과학책이라고 생각하고 펼쳤는데 하는 말은 자기 계발서랑 비슷한 것 같아… 생각을 바꾸면 사람이 바뀌고 미래가 바뀌고 어쩌고 저쩌고.

책에서 이렇게 저렇게 해 보라는 걸 실험해 보고 싶긴 한데, 뭘 하라고 하는 게 많이 추상적이다. 그리고 이걸 읽고 내 뇌를 바꾸기 전에 잠시 전에 뭘 하라고 했는지 기억해 내는 게 더 어려웠다. 뭘 바꾸고 달라지려고 해도 그게 뭐였는지 인상 깊게 남아야 가능한 일 같다. 그러니까 책을 코로 읽었을지도 모른다는… 여튼 이 책을 읽고 저자의 말을 믿고 정말 독서와 함께 내가 조금은 달라졌어, 하고 더 나은 쪽(혹은 저자가 말하는 더 나쁜 쪽)을 향하는 사람이 있길 바란다. 바라면 또 이루어질 지도, 달라지는 게 나일지도-나는 빼고, 난 별로, 를 꾹 참은 것 만으로도 달라진 게 아닐까.

+밑줄 긋기
-우리는 실재를 보지 못하며, 따라서 우리는 과거에 보기에 유용했던 것을 보도록 진화했다. 이것은 모든 것은 착시이거나 아무것도 착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착시가 아니라는 것이 현실이다. (161)

-지각의 관점에서 볼 때, 의미의 과거 역사(즉, 우리의 내러티브)에 의미를 재부여하기 위해 자유 의지를 행사하면,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의 미래 역사가 바뀌고, 따라서 우리의 ‘미래 과거’가 바뀐다. 그리고 미래 지각도 자신의 경험적 역사에 대한 반사 반응이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 과거’를 바꾸는 것은 ‘미래’지각(아이러니하게도 각각의 지각은 자유 의지의 작용이 없는 상태에서 생겨난다)을 변화시킬 잠재력이 있다. (262)

-“나는 갑자기 사람의 운명은 흔히 죽기 오래전에 완성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263, 밀란 쿤데라의 ‘농담’을 재인용하며 미래 과거의 변화 방법을 이야기 한다. 이후 이 문장을 부인한다. ‘왜’라는 질문이 누적되면 예측 불가한 일들이 가능해진다고 한다.)

-이것은 어떤 것이 기분을 상하게 했을 때, 실패한 가정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게 하는 실용적 과제를 제공한다. 이러한 사후 상황 분석은, 그것이 직업적인 것이건, 개인적인 것이건, 자신의 행동을 인도한 보이지 않는 가정을 찾도록 하기 때문에 아주 소중하다. 그 가정을 일단 보는 순간, 선택의 잠재력이 생긴다. (311-312)

-존재 방식의 다양성에 노출되는 경험은 공감뿐만 아니라 창조성 자체까지도 높인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315)

-(우리 조상들의) 세계는 적대적이고 불규칙한 장소로, 미래가 캄캄한 ‘어둠’속에 싸여 있는 불확실성이 전형적으로 펼쳐진 곳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예측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주 나쁜 생각이었고, 예측을 하는 것은 아주 좋은 생각이었다. (335)

-사람들은 확실성을 제공하는 제도를 중심으로 사회를 조직했다. 그런 제도로는 법원, 정부, 경찰, 그리고 슬프게도 교육 제도(심지어 대학 수준에서도)와 이것들과 관련된 과정들이 있다. (345, 정말이지, 슬프게도.)

-가트먼 부부는 그들이 ‘네 기사’라고 이름 붙인 것을 확인했는데, 이것은 거의 예외 없이 커플의 붕괴를 초래하는 네 가지 행동을 말한다. 그 네 가지는 비판(단순히 불만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경멸, 방어적 태도, 완고함이다. (350)

-멈춤은 덜 알 기회, 우리가 항상 확인하려고 노력하는 인지 편향의 지각을 좁히는 힘을 막을 기회, 무릎 반사에서 반사를 제거하고 자극의 무의미성(설사 무의미하게 느껴지지 않더라도)과 함께 가만히 앉아 있을 기회를 준다. (354)

-특히 불안 발작의 경우, 거기서 벗어나는 경로 중 하나(설사 최선의 경로는 아니더라도)는 그것을 무시하는 것이다. 정말로 싹 무시해야 한다. 유명한 심리 치료사 카를 융은 문제는 결코 고쳐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단지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바꿀 수 있을 뿐이다. (357)


-1. 불확실성 찬미하기: ’멈춤‘과 이 멈춤에서 생겨나는 모든 질문에 손실의 관점이 아니라 이득의 관점에서 다가가기 위해.
2. 가능성에 열린 태도 보이기: 사회적 변화에서부터 진화 자체에 이르기까지 변화의 엔진인 경험의 다양성을 장려하기 위해.
3. 협력: 가능성 공간을 확장시키는 집단이나 시스템의 다양성에서 가치와 동정을 발견하기 위해-이상적으로는 순진성과 전문성을 결합함으로써.
4. 내재적 동기 부여: 창조성 과정이 자체 보상이 되도록 하기 위해. 이것은 엄청난 역경 앞에서 불굴의 인내력을 발휘하게 해준다.
5. 의도적 행동: 궁극적으로는 왜의 관점에서 자각을 가지고 행동하고 의식적으로 관여하기 위해.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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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7
잭 케루악 지음, 이만식 옮김 / 민음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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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21 잭 케루악.

길 위에서 1권을 언제 봤나 찾아봤더니 2024년 12월이라고 한다. 와. 그렇게나 미룰 만큼 재미없긴 했나 보다.
그때 독후감도 다시 보니 순 책 이야기는 안 하고 계엄 얘기랑 며칠간 여러 동네를 떠돌던 내 이야기만 잔뜩 했다.
2권을 펼쳤을 땐 뭔가 익숙하고 와 봤던 동네 다시 온 느낌으로 1권을 읽을 때 보다는 잘 읽혔다. 샐과 딘은 자동차를 타고 미국의 서쪽과 동쪽, 북쪽과 남쪽, 멕시코까지 누비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술을 마시고 밴드 음악을 신나게 감상하고 여자들을 꼬시고 다닌다. 멕시코를 도달할 꿈처럼 여기며 남쪽으로 떠난 길에선 기껏 그 멕시코 가자마자 하는 짓이 매춘부들하고 놀며 돈 잔뜩 쓰고, 마리화나 피우고 노는 거라 와 멍청이들, 했다.

매인 사람들은 그렇게나 자유롭게 마음만 먹으면 휘딱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고, 그 짓을 반복하는 샐과 딘이 부럽기도 했겠다. 미국 횡단기는 길 위에서보다는 올리버 색스 박사가 모터사이클 타고 혼자 한 여행-온더 무브-이 조금 더 재미있고 감동 느끼며 읽었던 것 같다. 그것도 7년 전이라 이제 기억도 안 나. 얘들은 그냥 어느 동네든 시궁창 밑바닥 같은 데서 뒹굴고 벌레에 쏘이고 몰고 가던 차는 다 고장내고 개고생을 하는데도 그게 고생이라 생각 안 하고 들짐승들처럼 에너지 넘치게 신나게 쏘다닌다.

지금은 이 이야기 속 인물상을 빌려온 사람들 다 죽었을 것 같다. 술에 마약에 아무데나 돌아다니다가 몸뚱이가 일찍 닳았을 것 같다. 그래도 쓰니까, 쓰이니까 남는다. 개고생도 방탕함도 자유와 스릴로 치장할 수 있다. 진짜 길은 못 떠나고 글로 못 가본 세상을 상상하고 그릴 수는 있겠는데 지금은 그것도 잘 못하겠다. 그러니까 재미없을 거 알면서 꾹 참고 읽는 거지. 읽는 건 내 몫이다.

그나저나 2권은 남은 소설만큼 엄청 두꺼운 해제 모음이 부록으로 딸려 있는데 그건 안 읽었다. 저자의 삶을 이해해야 받아들일 수 있는 소설이라면 쓸데 없다. 케루악의 인생은 안 궁금해. 샐과 딘이 미국과 멕시코 구석진 곳들을 보여줬으니 그랬구나 하고 됐다.

+밑줄 긋기
-근사한 차가 바람 소리를 내고 평원을 두루마리처럼 펼쳐 가며 뜨거운 콜타르를 가로질렀다. 당당한 배였다. 눈을 뜨자 부채같이 펼쳐졌다. 우리는 그 새벽 위로 곧바로 내던져지고 있었다. (89, 문학은 치장이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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