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초에는 건강검진을 다녀왔다. 곁의 사람 사원 복지로 가족 한 사람 더 시켜줘서 나는 (관두지 않고) 직장검진까지 하면 매해 몸을 살필 수 있다. 6시에 일어나서 도심의 검진센터에 갔다. 올해 혈관 질환도 앓았어서 심장 초음파가 선택 항목에 있길래 해봤는데, 오래 구석구석 보는 것 같긴 했지만 심장 동맥 정맥까지 보는지는 모르겠고, 심장에 혈전 박혔으면 그거 정도나 보인다고, 그리고 내내 약 먹고 치료했으면 별 거 없을 거라고 했다. 위내시경은 세 번째 하는데 역시나 비수면으로 신속하게… 할 때마다 나새끼 생선비린내도 못 참는 예민쟁이면서 이런 비위는 좋은 것 같음… 


 위내시경했다고 주는 죽 한 그릇 먹고, 간만에 도심 산책을 할 생각이었다. 길을 나서보니 저 위에 남산타워(이젠 서울엔타워랬나…)가 가까워 보였다. 걸었다. 케이블카는 아주 오래 전에 타봤어서 이번엔 걸어서 남산 정복, 하고 버스정류장 지나 산책로 계단을 올랐다. 갈 만했다. 평일 오전에도 산에 오르는 사람이 많았다. 높이서 내려다 본 도심은 아침까지 내린 비로 깨끗이 씻겨 건물이며 도로며 자동차까지, 저 멀리 건너건너건너편 산맥 줄기까지 아주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8K해상도네… 타워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그 주변 뱅뱅도니 넓은 시야각으로 왼쪽에는 우리 동네 관악산, 중간에는 63빌딩 측면, 오른쪽 끝으로는 사우론의 암흑기지 롯데타워까지 한 자리에서 다 볼 수 있어서 신기했다. 그날 이전/이후 오늘까지 내내 비가 오는 걸 보면 운때가 맞았다.


 늘 올라간 길 도로 내려오는 걸 싫어해서 다른 길이 보이자 신이 나서 하산로로 골랐다. 그런데…왜 내려와 보니 반얀트리 호텔이 보이고 저쪽으로 가면 장충동이라는 거지…잘못 내려왔다. 잘못 내려온 김에 구를 넘어가기로 했다. 조금만 걸으니 굿바이 중구, 헬로 용산구였다. 한강진역 주변을 지날 때는 가로변이 무슨 공연장, 바이닐 라이브러리, 편집샵 같은 완전 힙한 건물들(사실 그냥 우리 동네엔 잘 없는 가게들…)로 채워져 있었다. 길 건너에 스타벅스 리저브 샵이 보이고, 내 휴대전화엔 어디서 받은 쿠폰도 있으니, 가서 돈 보태서 아이스크림 둥둥 띄운 콜드브루 플로트를 한 잔 시켜 먹으며 체력을 정비했다. 뭔 이 동네 스타벅스는 도서관이나 스터디카페보다도 조용해서 숨이 막혔다… 그리고 분명 1층으로 들어간 것 같은데 거기가 5층이고, 지하로 가니 4층이고, 4층이 너무 숨막히는 정적이라 6층에 가니 거기 테이블도 도서관 배치인데다 조용한 편인데 한 팀 정도가 수다를 떨길래 좀 편안한 마음으로 창가에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그러고 나서 밖에 나와 사잇길 계단을 내려와 보니 정말 내가 내려온 데가 6층이었어… 신기한 높이차였다. 


 한남동은 처음이야… 체격 좋은 보안요원이 입구를 지키는 으리쩡쩡한 주상복합 건물, 이름만 듣던 무슨 나인어쩌구, 무슨 빌리지, 무슨 힐 지나면서 세상엔 내가 상상해보지 못한 부가 있구나… 하다가 한남대교를 건넜다. 역시나 처음 가는 길인데, 오, 도보에다 이 시야로 이 맑은 낮 강을 건너는 건 외제차 탄 저곳 거주민들은 왠지 못 해 봤을 것 같다. 그래서 신나서 다리를 건넜다. 한남에서 강남으로 건너가는 다리 교통로는 생각보다 도보자 친화적이지 않았다. 보행자가 누르면 바뀌는 신호등들이 갖춰 있긴 하지만 뭔가 쌩쌩 달리는 트럭한테 받힐 것 같은 공포감이 상존했다. 그래도 안 죽고 잘 건너왔다.


 잠원동, 반포 이런 곳으로 들어섰는데, 신반포에 3천 가구 넘게 거의 도시 하나를 짓고 있는 공사판을 가로질러 지났다. (거기가 어딘지는 나중에 검색해보고 안 것이긴 했지만..) 이미 주변에도 으리쩡쩡 재건축된 초고층 아파트들이 즐비한데, 그런 걸 또 엄청 넓은 면적에서 바삐 짓고 있었다. 공사뷰 산책로를 한참 질러 반포역이 나오고 또 고속터미널이 보이자 이제 좀 아는 데가 나왔다고 안도했다. 그런데 지상 건널목 찾다 안 보인다고 지하 상가 입구를 보고는 거기로 들어갔는데…그것이 던전 입구 일 줄은….


 오후 세네시 사이의 고속터미널 인근 지하상가(고투몰? 고터몰?)는 어머니들의 천국이었다. 아직 학원에서 돌아오지 않은 아이들, 퇴근 안 한 남편들 치닥거리 전, 주말 끄트머리를 붙잡는 젊은이들의 불타는 거리처럼, 수많은 중년 노년 여성들이 지하에 몰려들어 전투적으로 의류, 가발, 반려견 액세서리, 꽃 등등을 구경하고 같은 처지 또래들과 수다떨며 지하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와…겨울에 나무둥치 속이나 땅 속에 몰려 있는 군집 생물체들 같았다… 너무 더웠고 답답했고 그런데 생각보다 이 구간이 너무너무 길어서 내가 죄가 많아 지옥에 간다면 이런 곳이겠구나… 했다. 생물학적, 인구학적 유사성은 있지만 아마도 나보다 경제적 지위는 높을 엄마들인데… 나는 왜 거기에 동화되지도, 이런 곳을 즐기지 못하고 오히려 벌받는 느낌을 혼자 받고 있는가ㅋㅋㅋ이것이 군중 속의 고독…ㅋㅋㅋㅋㅋ

 

 산행 실컷 잘 하고 강 건널 때만 해도(커피랑 아이스크림 빨로) 체력 딸리는 느낌이 아니었는데 ,지하 아케이드에 너무 오래 갇혀 있다가 거기서 한 HP 80퍼센트 쯤 닳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고속터미널 가서 세일하는 2500원짜리 주니어 와퍼 하나 먹고 도보 여정을 종료. 겨우 지하철+버스 타고 돌아왔다. 숭실대입구의 깊은 지하에서 고개 넘어 마을버스 타고 구불구불 산길 돌아오니까 와…지역간 격차가 무언지, 도시의 내부 지역 분화, 지대 이론(지리할 때 나옴)이 무언지…도심, 부도심, 주변지역 한 큐에 체험한 하루였다. 


 그날의 선명한 이미지, 온도, 감각 같은게 아직 남았는데 사진 한 방 찍지 않은 날들이라 휘발되기 전에 글로라도 남겨야지 싶어서 늦은 일기 적고 앉았음…


 이른 기상도 건강검진도 여러모로 고된 날에 20킬로미터 남짓 걸었으니…그날 저녁부터 두통을 앓기 시작해서 진통제 먹고 일찍 쓰러져 자고, 다음날도 컨디션이 안 올라와서 또 이른 저녁 쓰러지고, 그 다음 아침에 어휴, 컨디션 난조로군, 실내자전거나 탈까…하다가 섹스앤시티 앤저스트라잌댓 시즌2도 다 봤고 이제 뭐 틀어 놓고 타지…하다가 OTT메인에 왠 새대가리가 눈에 띄었다. 

이런 파란 새머리…


 망겜만 하던 고2 남자애가 갓겜을 시작하는 뭐 그런 이야기라는데, 오, 시놉시스만 봐도 뭔가 끌려서 1화를 봤다. 20분 좀 넘는 이야기가 너무 빨리지나가서 자전거 타다가 손목밴드에서 몇 분 경과, 알림 울리면 왜 벌써…하고 아쉬워지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만화도 보고, 운동도 하고, 삼일만에 몸과 마음을 추스리고(?) 오늘 아침에는 만화 너무 재미있어서 운동 핑계로 그만 두 화나 봐 버리고…그러고 나니 벌써 또 지치는 기분…


 거의 20년 전 대항해시대 피씨게임이랑 온라인 게임에 푹 빠져가지고 그 게임을 10년 좀 못 되게(큰어린이 낳기 전까지) 했다. 이후로 모바일 게임은 크래시오브클랜? 6-7년 전 그 게임을 마지막으로 하는 게 없다. 기빨리고 눈아파서 이젠 순식간에 화면 전환되고 번쩍이는 게임들은 정신 없어서 못하겠다. 그런데 게임하는 애가 게임하는 걸 지켜보는 만화는 뭔가 좋았다. 주인공이 주절주절 혼자 설명충이라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건 나름 게이머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전개! 애니메이션에서 의식의 흐름을 볼 줄이야…ㅋㅋㅋ 원래 완결되지 않은 시리즈를 잘 보지 않는데 운동할 때 하루 한 개씩만 보자…상으로 빼 먹는 곶감 같은 것… 

모짜렐라슈나이저-만렙스타. 게임 폐인의 체험은 훗날 노래 한 곡을 남기고…그런데 너 누군데 남의 노래 유튜브에 올려놨니…고맙네…ㅋㅋㅋ



 알라딘에 찾아보니 이 애니메이션의 원작만화도 있던 것이다! ‘샹그릴라 프론티어’!!!! 다음 전자책 수집은 너로 결정했다. 

 결국 만화책 하나 보게 된 사연 적는 게 이렇게나 프롤로그가 길었다.ㅋㅋㅋㅋ 망겜/ 갓겜 이게 무슨 망생/ 갓생 비유로도 읽히고, 갑자기 판타지 세계로 훅 건너가는 것보다는 게임 세상에 푹 빠지는 이야기가 나한테는 진입장벽이 낮았던 것 같다. ㅋㅋㅋㅋㅋㅋ


아직 1,2권만 모음…애니는 3화까지만 봄… 쪼렙 주제에 유니크 몹 잡겠다고 설치는 모습이 마치…ebs수능특강 하나 보고서 수능 잘 보겠다고 날뛰던 나새기를 보는 것 같구만…하하하하… 그런데 저 새대가리 너무 내 취향임… 뭔가 ‘도로헤도로’의 스토어의 식칼 든 스토어 오마주한 느낌이다.


일부러 도로헤도로 올스타 명감 찾아왔는데…스토어의 식칼…산라쿠의 식칼…이게 아닌가…아닌가 봄….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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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2023-12-15 1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건강검진으로 시작해서 식칼로ㅋㅋㅋㅋㅋㅋ
근데 정말 게임하는 걸 지켜보는 재미는 또 따로라고 하대요. 책 읽었다고 얘기하는 책 읽는 재미랑 비슷할까? 다 나름인 거겠죠ㅋㅋㅋ 덕분에 서울 잘 다녀왔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12-15 12:39   좋아요 1 | URL
안 그래도 버거킹에서 와퍼 먹고 나오면서 와 여기 유수님이랑 처음 만난 곳이야 ㅋㅋㅋㅋ갬생에 젖음 ㅋㅋㅋㅋ 저는 유튜버가 게임 스트리밍 하는 건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이 만화는 뭔가 주인공 자체가 망겜 헌터(?) 저 같은 놈이라 ㅋㅋㅋㅋㅋ게임 튜토리얼 안 따라가고 지맘대로 하는 애라서 좋더라구요… 이 망할 취향…ㅋㅋㅋ

유수 2023-12-15 15:40   좋아요 1 | URL
이쯤되면 취향 아니고 정체성 아니실까요☺️🫡

반유행열반인 2023-12-15 16:39   좋아요 1 | URL
정체성도 바뀌는 거라던데…바뀐다고 말해줘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3-12-15 1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건강검진 당일에 그렇게 걸으셨다고요?!?!
이야기책 읽는 기분으로 따라 가는데 한남대교에서 우와 기권!!!

반유행열반인 2023-12-15 16:40   좋아요 0 | URL
제가 아직 19살 꼬꼬마인 줄 알고 그만…아직도(?) 대가를 치르는 듯 피곤하네요 ㅋㅋㅋㅋ어둠의 반포 지하상가는 앞으로 근처도 가지 않는 것으로…

희선 2023-12-17 0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십킬로미터는 걷는 데 몇 시간 걸릴지... 여러 시간 걸었을 것 같네요 그렇게 오래 걸으면 잠을 잘 자야 피곤함이 풀릴 듯합니다


희선

반유행열반인 2023-12-17 10:06   좋아요 1 | URL
중간에 먹거나 쉬긴 하는데 저렇게 걸은 날은 너댓시간 걸겼던 것 같아요 ㅎㅎㅎ한 번에 너무 무리하지 않는 걸로...ㅋㅋㅋ

라로 2023-12-22 0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위내시경 했는데 죽 준다고요!! 와 ~~ 대한민국~~~ 한국 진짜 멋지다!! 그런데 그럼 다리는 다 나은 거죠?? 읽으면서 건강검진 후 20 킬로미터, 2 킬로미터도 아니고 걸으신,,,,, 계속 다리 걱정;;;; (뒤늦게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12-22 08:54   좋아요 0 | URL
다리도 다 나았고, 아픽사반(엘릭퀴스)도 11월 말로 치료 종료했어요 ㅎㅎㅎ 늘 염려해주셔서 감사하고 송구하고 라로님도 늘 건강 잘 챙기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