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커 군과 실험실 친구들 - 실험기구들의 신나는 요절복통 과학수업 비커 군 시리즈
우에타니 부부 & 야마무라 신이치로 지음, 오승민 옮김 / 더숲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30731 우에타니 부부.


A가 전학을 오면서 열두 살을 나기가 조금 더 힘들어졌다. 조현병 발작이 온 아빠가 몇 날 며칠 날뛰다가 어느 날 아침은 내 등교길을 막아섰고, 엄마는 어서 학교에 가라고 했고, 나는 어떻게 하라는 거냐며 울부짖었더니 아빠가 그럼 학교 가, 대신 집으로 오지 말고 멀리 도망 가, 어쨌거나 학교에 갔다. 망설이다 귀가한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학교 가는 사이 구급차가 와서 아빠를 폐쇄병동으로 싣고 가버린 뒤였다. (아무도 안 말해줘서 다 커서 알았지만 그때도 눈치로 그랬겠거니 했다.)
집안은 뒤숭숭하고, 비쩍 마른 몸에 바글바글 거리는 머리카락, 이차성징이 막 시작되어 이도 저도 아닌 몸을 가지고 산수왕 문제집이나 풀고 앉아 있던 내게도 즐거운 시간이 잠시 잠깐 있었다. 언제부턴지 좋아하게 된 B군과 과학실험 시간에 무릎 맞대고(조별로 둘러 앉는 좁은 책상이라 가능) 떠드는 시간이었다. 시험 볼 때마다 점수 가지고 경쟁할 만큼 승부욕 불태우던 일 외에는 크게 겹치는 관심사가 없었지만, 어느 날부터 B군과 당시 유행하던 터보나 알이에프의 노래를 쉬는 시간에 같이 부르기도 하고, 반의 다른 아이 험담도 하고, 그냥 내내 수다 떠는 게 좋았다.

전학 온 A는 나보다 큰 키에 이미 어른 같은 몸, 하얗고 보송보송한 피부, 아기처럼 동그란 볼 위에 웃으면 귀엽게 쏙 들어가는 보조개가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내가 산수 숙제를 틀리면 막대기나 책으로 머리를 한 대씩 쳤는데, 이 아이에게는 모르는 부분을 따로 설명해주는 것을 보았다. 드잡이가 일어나면 나와 서로의 멱살을 휘어잡고 관자놀이와 귀 주변 볼때기가 빨개지도록 주먹으로 치고박고 싸우던 남자아이들도, A앞에서는 얌전히 굴고 때때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일부 아이들은 장난을 걸어 A가 난처해 하는 걸 보기도 했지만, B는 그런 짓은 하지 않고 A에게 제법 다정했다.

내가 느낀 감정은 생애 최초의 질투였을 것이다. 시기와 질투가 심한 사람이라는 걸 그 무렵부터 알게 되었다. 나는 반 여자아이들과 전반적으로 잘 못 지냈지만, 그래도 처음에는 새로 반에 온 A와 친해지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과학 시간, A가 갑자기 시험관 주둥이를 내 코에 들이댔다. 맡아 봐봐, 하면서.
코를 찌르는 냄새에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면서 손으로 코를 쥐었다. 여러 용액을 탐색하는 시간이었고, 용액의 냄새를 맡을 때는 시험관을 쥔 손은 코와 조금 거리를 둔 채 다른 한 손으로 바람을 일으켜 휘휘-이렇게 하라고 선생님의 설명도 막 들은 참이었다. 여름 재래식 화장실의 썩는 냄새가 나는 암모니아 용액을 예고도 없이 코에 댄 건 고의적인 테러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항의를 하자 A는 그냥 특이해서 맡아보라고 한 건데...하면서 우물쭈물했다.

A가 나를 골탕먹이려고 일부러 그랬다는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질 않았다. A에게 복수하기로 다짐했다. 여러 악행을 궁리하다 떠오른 생각은 A의 안경을 훔쳐다 부숴버리는 것이었다. 고도 근시여서 아침에 눈뜨자마자 내 몸의 일부처럼 안경을 떼지 않는 나와 달리 A는 필기할 때만 안경을 쓰고 나머지 시간에는 자기 필통에다 안경을 넣어 두었다. 체육 시간을 앞두고 모두 교실을 비운 사이, 나는 A의 필통에서 안경을 꺼내 내 신발주머니에 담아 들고 나왔다. 체육 시간이 끝나고 아이들이 교실에 들어가고 나면 어디 화단 같은 데서 벽돌로 박살을 내줄 계획이었다.

체육 시간이 끝나고, A가 다른 친구와 함께 내게 다가왔다. 과학 시간의 일은 미안했다고, 괴롭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고, A는 나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그 말 한 마디에 내 마음은 누그러졌고, 나도 화내서 미안했다고 잘 지내자고 했다. A가 친구와 자리를 뜨고 나니, 아, 이젠 안경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게 문제였다.

기억은 안 나지만 그냥 고이 다시 필통에 넣어 두었고, 아무도 내가 A의 안경을 훔쳤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여기에 내가 써서 당신이 읽기 전까지는 ㅋㅋㅋ내 비밀을 알았으니 죽어주셔야 겠습니다!!!! 농담입니다…

언젠가 이 일을 가지고 어린이 동화나 소설을 쓸까 했는데 독후감에 써 먹어 버렸어… 뭐 그렇습니다… 다른 건 의욕이 없습니다…


이 책은 표지 그림이 귀여워서 몇 년 전 사뒀는데 집의 어린이만 보고 나는 이제서야 보게 되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 과학 실험은 흥미진진했고, 과학실의 냄새는 별로 좋지 않았고 실험 도구 세척하고 정리하는 게 늘 귀찮긴 했지만 직접 해 본 실험들은, 사용해 본 기구의 이름들은 수십년이 지나도 기억에 남았다.

실험실에서 자주 쓰이는 실험기구들의 이름과 특징에 맞춰 다양한 캐릭터로 의인화하고 짤막한 만화로 구성한 책이었다. 사람은 참 별 것에 다 인격을 부여한다. 자기 신체 일부에 이름 붙이고 말 거는 놈들도 있었으니까…(우웩) 거 왼손이 여자로 변해버린 일본 만화랑 오른손에 외계 생물체가 들어와 친구가 된 일본 만화를 말하는 거였습니다...헤헤

만화는 엄청 재미있지는 않고, 그냥 특색있게 성격이랑 표정 귀엽게 꾸며 놓은 걸 보는 소소한 즐거움 정도가 있었다. 이번 독후감은 길게 안 쓰고 제일 마음에 드는 캐릭터나 따라 그려서 그걸로 대체해야지! 했는데 결국 썰 풀기 욕구를 참지 못한 나야...예쁜 A야 잘 지내니? 애기 같은 얼굴의 너도 아줌마가 되었니…

+뭘 그릴까 하다가 리트머스 종이 보는 순간 이거야 ㅋㅋㅋ뭔 테이프모양 젤리 같기도 하고 광고 풍선 같기도 하고 육포같기도 한 게 마음에 들어서 그렸다. 그러고나서 주연급인 비커랑 진지해 보이는 삼각 플라스크도 그려 보았다.

+가장 화려한 페이지는 전대물 연상하게 하는 불꽃반응 7남매! 바륨 ㅋㅋㅋ조영제로 혐오감을 일으키는 공격이다!!! 칼륨은 비누, 비누를 주워다오…

+와, 독후감 올리려다 이 시리즈가 그새 5권이나 나온 거 보고 깜짝 놀람 ㅋㅋ나는 그냥 이것만 볼게...내가 비커 만질 날이 오겠니...휴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건수하 2023-07-31 20: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시리즈 저희 집에서 사랑받았지요 ^^ 덕분에 열반인님의 비밀을 알게 되다니!

반유행열반인 2023-07-31 21:33   좋아요 1 | URL
수하님 댁에는 시리즈가 완비되어 있으시군요!!! 제 비밀을 아셨으니!!! 만수무강하시길 ㅎㅎㅎ

유수 2023-07-31 23: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썰 풀기 참지 마세요.. 풀고 싶어도 말을 못해서 못 푸는 사람도 있대요.

반유행열반인 2023-08-01 16:47   좋아요 3 | URL
유수님 아직 입이 안 터져서 그렇지 한 번 열리면 청산유수라서 유수 맞죠? ㅋㅋㅋㅋ

우끼 2023-07-31 23: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후후.. 죽지 않고 되돌아오는 것은 어떻습니까? 다음 독후감때 뵙겠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08-01 16:48   좋아요 1 | URL
늘 돌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ㅋㅋㅋ우끼님도 이거저거 읽고 요거조거 많이 남겨주세요!!! 보면 막 엄청 어려운 책 많이 보시든데!!!

2023-08-01 0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01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01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01 1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Yeagene 2023-08-02 14: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이 이 이야기로 동화를 쓰셨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음...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3-08-02 15:38   좋아요 3 | URL
나아아중에 마음에 여유가 잡히면 잘 각색해서 써봐야겠네요 ㅋㅋ감사합니다 예진님 ㅎㅎㅎ

은오 2023-08-02 1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A이야기 소설같네요 ㅋㅋㅋㅋㅋ 주작의심아니고 소설읽듯이 넘 재밌게읽었다는 뜻 ㅋㅋㅋ 빛과물질이론 읽다가 이거보니 안경 잠깐 훔친 비밀은 순한맛에 천사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ㅋㅋㅋㅋ 글고 애기 유열님 넘 귀여웡....

반유행열반인 2023-08-02 21:10   좋아요 0 | URL
뭔가 A의 이미지가 은오님 프사에서 좀 더 아기아기한 느낌이랄까... 그거
부쉈으면 지금 여기 글도 못 쓰고 진짜 흑역사 암흑의 비밀로 남았겠죠?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