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의 신호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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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7 프랑수아즈 사강.

소설을 읽다 보면, 생각을 한다. 내 삶은 어쩌면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의 복제판이 아닐까. 이미 남들이 살고 간대로 나도 모르게 서투르게 흉내낸 모방작. 아류작. 완전 판박이는 못 되겠지만 여기저기서 조금씩 훔쳐내 누덕누덕 기워 놓은 해적판. 똑같이 살지 않겠다는 몸부림은, 어느새 사는 거 똑같지 뭐, 하는 체념으로, 청기 올리지 말고 백기 올려(황인찬, ‘청기가 오르지 않고’에는 안 나오는 말), 손들어라 광복된 것처럼(놀랍지만 이 비슷한 건 나옴, 태양, ‘링가링가’에도 나옴), 나는 손을 들고 처음 사강을 읽었다.

녹색광선 책은 사진 찍으면 참 예쁘게 나오게 생겼는데 나는 인스타그램은 하지 않고,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읽었을 때는 책이 겉만 번드르르 하고 별로네…했었다. 같은 번역가가 옮긴 ‘세로토닌’도 아 안 맞네 문장이…특히 반복을 막기 위한 지시대명사 이, 그, 저, 쓰임새랑, 하여간에 나라면 한국어 문장 저렇게 안 쓸 건데…하고 그러다가 생각보다 같은 번역가가 옮긴 프랑스 소설 좀 사놨다 어쩌지… 망설이다 이 책을 들였다. 처음에 조금 비슷한 기분이었는데, 우왕 읽다보니 다 잊어버리고 재미있게 읽었다. 나는 옛날 영화 본 건 별로 없는데 사강은 영화를 아주아주 많이 봤을 것 같고, 신통하게도 소설을 옛날 영화 보는 기분으로 읽게 만드는 집요한 표현력이 있었다.

기생충에서 충숙이 “돈이 다리미여” 하는 말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너무 뼛속까지 와 닿아가지고, 이 책에서도 돈다리미로 빳빳하게 편 듯한 샤를의 관대함, 여유로움, 나는 기다리는 거 잘 하고 결국 내가 이기지, 그게 조금 슬펐다. 문득 관대함을 모르고 가난하고 집착이 강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젊음과 열정(곧 유효기간 만료)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랑, 이제 치졸할 짓은 할 만큼 다 하고 세월과 경험을 통해 냉소하고 삐딱해지는 대신 다 허허 하고 넘길만한 너그러운 마음과 두둑한 주머니를 갖추고 다만 더는 예쁘게 보기 힘든 육체를 가진 늙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랑(써 놓고 보니 늙은 쪽이 너무 많이 더 가졌네? 불균형 기우뚱) 우열을 가릴 수가 있을까? 싶었다. 아니 왜 양자택일일까… 셋이 사이좋게 지내면 안 되는 거니…
이 소설은 하여간에 제목부터, 주머니 사정부터, 연령대부터, 봄, 여름, 가을 밖에 없는 차례부터, 결말 다 까고 시작하는 데도 읽는 내내 지루함이 없었다. 통속적이더라도 우리 독자들에게 교양을 갖춰줘야죠? 하고 틈틈이 기욤 아폴리네르,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윌리엄 포크너, 랭보, 골고루 나온다. 깔게 없다. 내가 졌다. 루실처럼 독서랑 사랑 만으로 살 수 있는 사람, 온 하루를 빈둥대며 지내고 싶은 사람 많지 않나? 그거 너무 쉬운 일 아닌가? 그치만 이미 너무 많이 먹고 너무 많은 물욕을 가졌고 모아둔 책들을 담는 공간을 유지하는 데만도 돈이 드니까, 내 사랑은 샤를도 앙투안도 닮지 않았으니까, 제네바에 가지 않았으니까, ‘레베이’에 적응해야 한다… 제롬을 잘 보살펴야 한다…ㅋㅋㅋㅋㅋ

+밑줄 긋기
-서로 간에 불꽃이 일어난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 그들에게 일어났다. 순식간에, 그들은 예전에 알았던 쾌락을 더는 기억하지 못했고, 자신들의 육체의 한계를 잊었다. 수치심이라든지 담대함이라든지 하는 단어들이 그만그만하게 추상적이 되었다. 이제 한두 시간 뒤에는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이 부도덕하게 여겨졌다. 그들은 이미 상대의 어떤 동작도 결코 불쾌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고, 육체적 사랑에 관해 서툴고 유치한 날것이 언어들을 재발견하며 소곤거렸다. 그들은 주거나 받은 쾌락에 대한 자랑과 감사를 끊임없이 서로에게 돌렸다. 또한 이 순간이 특별하다는 걸, 한 인간에게 자신의 반쪽을 찾는 것보다 더 멋진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다. 예기치 않았으나 이제는 필수적이 되어버린 육체적 열정이- 하마터면 그들 사이에서 스치고 지나갈 뻔했던-진정한 이야기를 만들려하고 있었다.
하늘이 어두워졌다.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시계를 보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고개를 젖히고서 담배를 피웠고, 녹초가 된 두 전사처럼, 두 정복자처럼 함께 발산한 땀과 난투와 사랑의 냄새를 고스란히 간직했다. 이불이 바닥에 나뒹굴었고, 앙투안의 손은 루실의 엉덩이에 놓였다. 루실은 말했다.
”난 이제 얼굴을 붉히지 않고는 널 볼 수 없어, 마음이 아프지 않고는 네가 떠나는 걸 볼 수 없고, 시선을 돌리지 않고는 다른 사람 앞에서 너한테 얘기할 수 없을 거야.“
(70-71, 국밥이나 얼음맥주 같은 걸로 기만하는 놈들한테 마, 이게 섹스지! 하고 훅들어오는 문단들 ㅋㅋㅋ)

-그들은 점차로 서로의 몸을 정확하게 파악했고 그것으로 거의 학술을 정립할 수 있을 정도였으나 오류가 많은 학술이었다. 상대의 쾌락을 배려하는 데 기반을 두었으면서도 자신의 쾌락 앞에서 무력하고 허술해지며 흐지부지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런 순간엔 두 사람은 자신들이 지난 30년간 서로를 모른 채 살아올 수 있었다는 걸 믿기지 않아했다. 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진실이 아니며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몇 번이고 서로에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 이렇게 길게 생생하게 풀어 놓는 것이 작가의 일, 존나 좋군! 네 음절로 외칠 일을 말이야…)

-그가 “집에서”라고 장소를 말했을 때, 루실은 푸아티에 가의 원룸은 단 한순간이라도 떠올리지 않았다. 푸아티에 가에 있는 건 방이었다. 그건 집이 아니었고, 집이었던 적도 없었다. 설령 그곳이 지옥이 뒤얽힌 천국이었을지라도.
(248, 와…돈이 아프고 가난이 아픈 장면…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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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7-07 18: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열반인님의 리뷰로 사강의 이 소설을 다시 마주하니 주구장창 떡볶이 데이트만으로도 행복했던 가난한 연인이었던(왜 이리 문장이 길어지...) 제 모습이 떠오릅니다.ㅎㅎㅎ 사강 참 잘쓰죠! 일기장에만 남기더라도 나도 사강처럼 한 번 써보고 싶다 하하하

반유행열반인 2023-07-07 18:47   좋아요 1 | URL
저도 가난한(?)연애 밖에 기억이 없네요 ㅎㅎㅎ 사강처럼 잘 쓰면 일기장에 남기면 안 되고 저도 보여주셔야 되요 ㅎㅎㅎㅎㅎㅎㅎ

책식동물 2023-07-07 18: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강 안 읽어봤는데 열반인님 리뷰 읽으니까 제 취향일 것 같네요^-^ 찜!! 찜해둡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07-07 18:48   좋아요 1 | URL
기묘한고라니님!!! 소설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저는 처음 읽는 사강이었는데 나는 사강 좋아하겠구나 싶었습니다. ㅎㅎㅎ

책식동물 2023-07-07 21:44   좋아요 1 | URL
넵. 현재의 독서는 영프러소설읽기로 시작해섴ㅋㅋㅋㅋㅋㅋ 11년 됐는데 사강을 단.한.번.도. 읽지 않았어요. 반성하고... 읽어야겠습니다...^^ 또 어떤 소설가 좋아하시나요!!?? 저는 오스틴 톨스토이 나보코프 졸라 좋아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07-08 19:05   좋아요 0 | URL
오래오래 읽으셨군요 ㅋㅋㅋ그게 뭐 반성 거리인가요 좋은 소설 너무너무 많은데 온갖 작가를 어찌 다 읽겠어요 ㅋㅋㅋ 어떤 소설가를 좋아하시나 물으시면…그게 그리 단순하지 않은 것 같아 제가 뭘 좋아하나 함께 차차 알아가시면 감사하겠습니다 ㅋㅋㅋ

책식동물 2023-07-09 23:51   좋아요 1 | URL
.......아니!!!!!!!!!!!!!!!!!!!!!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앞으로 열반인님 리뷰 꼼꼼히 읽으면서 뭘 좋아하시는지 차차 알아가는 시간 갖겠습니다. 저도 글을 열심히 많이많이 올릴 테니 기다려주세용!!!

은오 2023-07-08 03: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놨는데 어서 읽겠습니다. 하 근데 읽을책이 너무많네.... 녹색광선 책 예뻐서 하나씩 모으다보니 4권이네요 언젠간 다모으게될거같음 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3-07-08 19:06   좋아요 1 | URL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 사랑하고 수집하는데 저는 그걸 잘 이해 못허구 ㅋㅋㅋ그 시리즈 첫 책 뒤라스가 저한테는 땡탈락이어가지고 심지어 그거 어디다 팔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책꽂이에서 민트민트 발견하고 화들짝 ㅋㅋㅋ

새파랑 2023-07-08 09: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루실처럼 책만 읽으면서 살아봤으면 좋겠네요 ㅜㅜ 역시 문제는 돈인가요 ㅎㅎ

열반인님과 사강은 좀 안어울리긴 하는데 🤔

근데 이책 정말 재미있습니다. 사강이 그리는 사랑이야기는 낯설면서도 좋더라구요.

전 녹색광선 다 모았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07-08 19:08   좋아요 1 | URL
루실처럼 살려면 디안이나 샤를을 만나지 않으면 그냥 (주)레베이에서 존버해야 하는 삶입니다 ㅜㅜ 안 그래도 미미님과 새파랑님이 작년의 우수도서(?)로 선정해주신 덕에 사강과 첫 단추 잘 끼웠어요. 녹색광선은 제가 첫 책에서 너무 단호박 별로 이래가지고 이 책들일 때도 고민 많았는데 다행히 괜찮았습니다 ㅎㅎㅎ

Yeagene 2023-07-08 1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엔 사강 책 좀 읽었는데 어느날부터 안읽게 되더라구요...왜 그런지...;;;;;

반유행열반인 2023-07-08 19:10   좋아요 1 | URL
어쩌면 읽다보면 고만고만 되바라진 젊은 여자가 주변 인물과 펼치는 막장 드라마와 부유층 한량들 띵가띵가하다 사랑타령하다 어이규 왜저러고 사냐 이게 반복되서 읽다 보면 으으 지리멸렬… 아닐지 한 권 읽어놓고 지레짐작 해 봅니다 ㅋㅋㅋ

2023-07-11 0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11 14: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16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16 16: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16 18:1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