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친지 딱 3주째다. 오늘 처음 집밖에 나갔다 왔다. 좌절만 한아름 안고 거동 부자유자의 괴로움 체험하고 돌아온 오늘은 우연히도 장애인의 날이다. 하여간에 앞으로 3주도 안 나갈 것 같다.
다치자마자 정형외과 가서 엑스레이 찍고, 골절 소견은 당장은 없고, 인대나 실금은 뼈사진에는 안 나온다 하고, 보호대 차고 소염제 먹고 물리치료 부지런히 받으세요, 하고 물리치료 한 번 받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아…앞으로 한 동안 바깥에 못 나올 듯… 집과 병원은 700미터쯤 떨어져 있고, 그 사이는 오르락내리락 비탈길이다. 더구나 내가 사는 곳은 국사봉 올라가는 산비탈의 과거 봉천동 판자촌을 밀고 재조성한 동네라 그냥 산이다. 아파트가 막 굽이굽이 비탈길 위에 듬성듬성 서 있어… 평소에도 숨가쁘지만 다친 뒤라면 그냥 칩거가 답이다 싶었다. 반깁스도 안 하는 거 보면 뭐 안 심하겠지…
곧 부종이 생기고, 삼일 쯤 지나니 막 발 안쪽과 바깥쪽으로 시퍼렁 멍이 띠를 두르고 그래도 안 나가고 안 쓰면 늘어난 건 줄고 찢어진 건 붙겠지… 잘 때 베개에 다리 얹고 책상 앉아 공부할 땐 밑에 책꽂이 가져다 다리 받쳐 거상하고 잘 때도 보호대 하고(꼬랑내 나서 병원서 받은 거 말고 하나 더 사서 번갈아 빨아가며) 지냈다.
다리 불편하니까 예전에 읽은 소설들이 생각나더라. 막 형이 다리 불편한데 어두컴컴한 골방에서 저 혼자 뭐하고남매는 그 형 무서워하다가 죽여버리겠다고 물에 밀어버리고…푹 젖은 채 돌아와 맹랑한 것들, 하던 형은 다시 스스로 물에 빠져 죽어버리고 뭐 그런 소설 있던 거 같은데… 김승옥 생명연습?! 중고등학생 때는 진짜 김승옥 많이좋아했다. 다 커서도 막 짱이야 이러고 여러번 읽고 과외 학생 김승옥 단편집 빌려줬다 과외 짤려서 못 돌려 받아서 전자책으로 전집 하나씩 모아야지…하다가 오프 알라딘 들렀다 우연히 전집 발견하고 이만원 후반대에 횡재다!!! 하고 질러서 무거운 걸 이고 지고 집에 온 기억도 났다. 왜 내가 그 형 같은 거야…골방은 아니지만…안방에처박혀 다친 다리 올려 놓고 수학 문제 풀고 나의 남매들은 방바깥에서 저들끼리 싸우다 놀다 하고…가엾은 어린이들…
몽실언니도 자주 생각났다. 어려서 드라마도 보고 소설도 본 걸 다 커서 책 다시 사서 읽었다.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몽실이가 다리를 심하게 다쳤는데 치자 반죽 붙이고서 뼈가 붙긴 했는데 삐뚜로 붙었어… 막 절뚝거리면 애들 놀리고 그런 슬픈 장면…다리 절뚝거리고 화장실이나 주방 갈 때면 자꾸 불쌍한 몽실이… 내가 몽실이가 되었네… 그런데 인터넷 검색하다 보니 요즘 세상에도 치자 반죽 붙이는 사람 있어…하나가 아니었어…
2주쯤 되어도 차도 없으면 병원가자, 했는데 그땐 왠지 낫고 있는 기분이었는데, 오늘 보니까 막 발 안쪽 바깥쪽발목 둘레가 부종도 더 심해진 거 같고 이쯤 되면 1도 염좌면 나았을 건데 난 그게 아니었나 봐… 실금은 엑스레이 안 나온대… 나는 빠른 자연치유력 따윈 없는 중년배였어… 노화만 확인하고 큰 마음 먹고 가장 가까운 정형외과에가 보기로 했다.
길 하나 건너 500미터 거리. 평소 같으면 5분도 안 걸려 (내리막이니까) 후다닥 도착했을 거리를 일단 단지 비탈을 겨우겨우 내려가서 입구 쪽 편의점 의자에 앉아 한참 쉬다, 신호 바뀌는 걸 보고 느릿느릿 걷지만 당연히 신호안에 건너지 못했고 (버스가 치고 갈까 봐 무서웠다), 다친 곳은 심하게 아프진 않은데 보호대로 고정해 두니 절룩절룩 걸으면서 자꾸 종아리에 쥐가 걸려서 캄다운 긴장하지마 하면서 천천히 걷다가, 정형외과 간판이 올려다보이는 곳 쯤에 버스 정류장이 있어서 거기 의자 앉아서 좀 쉬다가 병원에 겨우 들어갔다.
처음 가는 곳이라 이것저것 적고 앞의 환자 나오고도 또 한참을 기다리다가 진료실에 들어갔다. 음 엑스레이로 아무 것도 안 나왔으니 초음파나 뭐 이런저런 다른 거라도 찍어보자면 할 거야…했는데 그런 게 없을 것 같은 오래된 느낌의 병원이었다.
다친 지 3주 됐구요. 네 3월30일이요. 엑스레이 찍고는 다른 소견은 없다고 하셔서 소염제 먹고 보호대 하고 제가 병원은 더 안 갔어요…그런데 안 나아지는 것 같아서 병원이 멀어서 여기로 왔어요. 선생님은 자꾸 그 병원이 어딥니까 하다가 내가 보호대 슬쩍 푼 걸 보자마자 초진 병원으로 가세요. 멀어서 여기도 겨우 왔는데요. 그건 제가어떻게 할 게 아니고 역 근처면 멀지 않으니 그리로 가세요. 3주면 회복될 시기인데 이런 상태이면 그동안 받은 치료나, 아 제가 첫날 말고는 병원을 안 가서 다른 조치가 없었어요… 하여간에 진료를 안 봐준다고… 울듯한 얼굴로 절룩이며 진료실 나서는 뒤에서 등산 지팡이 같은 거 집에 있으면 짚고 다니란다…없는데… 하여간에 체중 부하하고 막 걷고 그러면 안 되는 상태인가 봄…
여기서 초진 병원까지 비탈길 오르락내리락 600미터 더 가야 한다… 가다가 진료 마감 될 것 같다… 걸어갈 자신이 없어서 (이게 막 대로 따라 가는 게 아니고 골목 주택가 이런데 가로 질러 가는 거라 택시나 대중교통도 마땅치않다…) 그냥 더 가까운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정류장 앉아서 눈물 좀 닦고 흑흑 나 진료 거부 당했어…너무 늦게 왔대… 갔던 병원 가면 왜 이제 왔냐고 또 혼나겠지 근데 혼나더라도 가면 좋겠는데 힘들어서 못 가겠어…
내리막은 그래도 조심조심 왔는데 급경사를 보호대 하고 절룩대며 오르기는 정말 힘들었다. 난 그냥…몽실이처럼삐뚜로 붙더라도 그냥 집에 있어야 겠다… 야 누가 뿌러졌대? 하여간에 마음이 삐뚜로 붙을 것 같았다.
우리 동네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주 많다. 허리가 거의 구십도로 굽은 노인들이 보행보조기 조심조심 밀며 지팡이 짚고 얼음판을 디디듯 몇 밀리미터씩 나아가며 (실제로 겨울엔 비탈 빙판에 넘어져 다치는 노인들도 많았다) 드나드는 모습을 보고 심드렁하게 힘드신데 그래도 부지런들 하시다…하고 말았었다. 염좌로 영구 장애까지는 안 생기겠지만 노화야말로 비가역적 진행 상태이고, 또 일하다가 다니다가 사고로 다쳐 평생 불편하게 다니는 사람들도 이 동네에 많을 것이다. 건강할 때는 산동네인게 뭔 대수야 운동 되고 좋지..했는데 겨우 다치고 귀가 한 번, 외출한 번에 아… 힘든 곳에 살고 있구나 했다. 운전을 못 하고 차가 없는 사람은 많다. 모든 곳에 택시가 다니지는 않는다. 가파른 경사에서는 보행보조기도 전동휠체어도 위험하다. 당장은 내 다리 아픈 거랑 진료 안 봐준 게 서러운데나보다 더 오래 서러울 사람들도 쪼끔 생각했다. 병원이 가기 힘들어서 그냥 집에서 앓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잘 못 해 봤다. 이제는 그게 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