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린 M의 성생활
카트린 밀레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20210923 카트린 밀레.

1년 전 9월에 아니 에르노의 ‘세월’을 읽고 재미없다, 했다. 그가 훗날 2001년을 회고하면 9월 11일보다 캐서린 M의 성생활 출간을 먼저 떠올리는 것에 깜짝 놀랄 것이라고 하는 장면에서 이 책을 건졌다. 오, 번역도 되어 있어. 그러나 절판. 그러나 알라딘 중고샵에서 무려 34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즉시 모셔올 수 있었습니다. ㅋㅋㅋ지금도 이 광활한 우주점에서 아주 쉽게 구하실 수 있습니다… 중고로 싸게 나왔다는 것은 그 책이 가치 없다는 의미 보다는 당시에 엄청나게 팔렸고 그래서 매물로 나온 것도 많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잊혀진 보물이라는 신호일 때가 많다…

책에 다룬 날것의 솔직함이 파격이어서 선정성 쪽으로 유명해진 책 같지만, 그것만으로 후려치기에는 카트린의 섬세하고 치밀한 기억력, 묘사, 표현이 뛰어났다. 지난 성애에 관해 이토록 덤덤하고 다른 사람 이야기하듯 그런데도 그때 그 장면과 기분과 뒤늦게 알게 된 것들을 집요하게 써나간 점이 놀라웠다. 책을 낸 때가 50대 무렵인데 처음 성생활을 시작하던 십대 후반의 장면들을 저만큼 기억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그가 말하는 것처럼 거듭해서 자신의 경험을 남들에게 말하고, 또 말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이미 이런 글쓰기의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나 싶었다. 미술 잡지에 비평을 기고하고 미술 관련 전문 서적을 발간하는 등 계속해서 예술 작품에 관한 글을 쓰고 그러기 위해 끝없이 외부 세계와 그걸 지켜보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 사람이라서 내공이 쌓인 덕에 이만큼 세세하게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열린 성애 관계, 파르투즈, 야외와 공공장소, 더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니 궁금하면 직접 책에서 확인을… 문득 이런 삶이 쓰인 게 드물 뿐 사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적지 않은 삶이 이런 형태였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뒤늦게 사회 제도와 금기와 규제가 생겨나 칸막이를 세우고 그 안에서만 살아가는 게 맞다고 열심히 가르친 덕에 감춰야 하는 것이 되었을 뿐.

하여간에 무덤덤한 듯 생생하게 지난 이야기를 눈앞에 그려내는 글재주, 부럽다. 그게 글일 뿐 아니라 정말로 상처 받지 않고, 아프지 않고, 내가 읽은 대로 자유롭고 편안하고 안전하고 행복한 삶으로 주욱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글에 카트린 밀레를 검색해 나온 사진을 보면 최근까지도 그렇게 큰 무리 없이 사는 것처럼 보여서, 글에서 느낀 차분함만큼 사진 속 눈빛도 그래 보여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이 책의 역자는 작년에 읽은 소립자를 번역한 작가였는데, 감창소리, 뜸베질 같은 고급진(?)언어를 구사하며 성애 장면을 잘 묘사했다. 소립자 이전에는 이 책이 있었구나…많은 수련?단련?숙련?하여간에 감탄하며 검색해보니 열린책들의 베르나르 베르베르 소설도 거진다 이 분이 번역하셨다. 그렇다면,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읽었던, 최초의 제법 야한 외국소설!! 타나토노트도 이 번역가셨다…어쩐지 고향에 온 듯 익숙하고 편안한 문장… 처음 뵌지 벌써 25년이 흘렀군요… 몰라 뵈서 죄송합니다… 문장에서 느껴지는 살결과 숨결과 냄새와 온도…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사둔 건 여럿인데 저 책 빌려본 것 말고는 안 봤다… 번역 솜씨 봐서라도 더 읽어야 겠는데…

+밑줄 긋기
-도덕적인 원칙을 충실하게 지키는 사람들은 어쩌면 자유분방하게 사는 사람들보다 질투의 표출에 대처하기 위한 준비가 더 잘 되어 있을 것이다. 자유 분방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철학 때문에 치정의 폭발과 마주치면 도무지 어찌해야 할 지를 모른다. 너그러움과 편협함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자기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몸에서 얻는 쾌락을 남과 공유함에 있어 지극히 관대한 모습을 보여 주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커 보이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처럼 보이던 그 너그러움이 느닷없이 편협함으로 돌변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그 편협함의 정도는 그가 보여 주던 너그러움과 정확하게 비례한다. 그 질투심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찰랑대고 있던 샘물이었는지도 모른다. 거기에서 튀어 오른 물방울들이 리비도의 영역을 은밀하게 규칙적으로 적셔 주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하나의 강물을 이루어 그의 의식을 송두리째 삼켜 버리는 것이리라. 숱한 문학 작품과 실화에서 묘사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관찰뿐만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도 그것을 알게 되었다.

-나 역시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어딘가에 있으면 이내 다른 곳에 있고 싶어했고, 벽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지 보러 가고 싶어했다.
산책이나 드라이브를 나갔다가 돌아올 때, 나는 갔던 길을 되짚어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지도를 꼼꼼하게 연구해서 새로운 길을 찾아낸다. 내가 아직 보지 않은 풍경이나 건물이나 명소로 나를 이끌어 줄 새로운 길 말이다. 이 지상에서 내가 갈 수 있는 곳 가운데 나의 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은 호주이다. 나는 거기에 갔을 때, 여정에 대한 나의 태도가 성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마음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아이를 낳고 기뻐하는 것 역시 같은 계통의 감정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에릭의 행동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는 우리의 저녁 모임이 늘 새롭게 진행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말마따나, <여행 알선업자>가 새로운 코스를 제공하려고 애쓰는 것과 비슷했다. 중요한 것은 <공간을 넓히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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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gene 2021-09-23 22: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잉?타나토노트가 야했나요?저 너무 오래전에 봐서 기억이 가물가물...ㅎㅎ

scott 2021-09-23 23:03   좋아요 3 | URL
이책 번역가 이세욱님이 타나타노트 번역을 하셨습니다 타나타노트는 전여 야하지 않은 15세 이상용 ^ㅎ^

반유행열반인 2021-09-23 23:16   좋아요 3 | URL
초딩이 보기엔 충분히 야했어요…아직도 카펫 위에서 뭔가(?)를 했던 장면이 어렴풋이… 15세 이상이니 만11세에겐 과했습니다
ㅋㅋㅋ

오거서 2021-09-23 23: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중고서점에서 값을 매기는 기준이 연도와 상태라서 싸게 나왔다는 것은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것이지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죠. 잊혀진 보물의 신호는 감별사가 아니면 포착하지 못하죠. 진정한 감별사이신 듯. ^^

반유행열반인 2021-09-23 23:17   좋아요 2 | URL
그렇게 집은 폐지수집창고가 되어갑니다 ….ㅋㅋㅋㅋ

얄라알라 2021-09-23 23: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너무도 자연스럽게 저에게 홍보를 하시는^^ ˝지금은 잊혀진 보물˝ 요렇게 말씀해주시니, 3000원대할 때 광활한 우주 들려야해? 하는 마음이 ^^

반유행열반인 2021-09-23 23:18   좋아요 2 | URL
그러나 호불호 취향이 많이 갈리는 솔직함이니 감안하시고 마음을 많이 열고 보시거나 싸더라도 외면하시는 편이 정신 건강 및 저를 안 미워하시는데 도움이 됩니다 ㅎㅎㅎ

새파랑 2021-09-23 2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ㅋ 다시 맘잡고 읽어야 하나요😅

반유행열반인 2021-09-24 07:07   좋아요 1 | URL
오히려 마음 내려놓고 읽으시면 의외로 잘 썼네 할 거예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