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짐승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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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1 필립 로스.

세 번째 읽는 필립 로스. 얇은 거 먼저 꺼내 야금야금 읽고 있다. 조금만 읽어도 느낌이 뽝 왔다. 이 양반…나같네…아니 늦게 난 내가 이 양반 같은 건가… 인간관, 애정관 가만 보면 빻았지만, 으아니 내가 생각했거나 생각할 걸 벌써 이십 년 전에 써놓았네…싶었다. 문득 궁금했다. 이런 책을 읽는 일이 이런 인간을 만들어내는지, 이런 인간이라서 비슷한 책을 골라 읽고 좋다고 짝짝짝 박수를 치는지. 이제는 뭐가 앞서고 뒤따르는지 알 수가 없다.
2001년 나온 이 소설은 그대로 특정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오늘(2021.9.11.) 같은 날 심상치 않게 읽히는 빈라덴 이름도 말미에 잠시 툭 튀어나온다. 이십 년 전에 삼십 대 초반이던 콘수엘라가 암에게 지지 않았다면 이제는 오십 대 초반이겠다. 그 시간이 데이비드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젖가슴으로만 결코 남지 않는, 새로운 자기만의 서사와 아바나를 찾는 시간과 결코 오지 않을 줄 알았던 행복으로 가득 찼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칠십 노인네인 화자 데이비드는 그 이야기를 모를 것이다. 나이 덕에 일찌감치 죽을 거니까. 필립 로스 할배도 그새 갔네. 순식간에 암으로 자신이 거친 노화의 시간을 따라잡은 콘수엘라를 보는 데이비드의 마음에는 안쓰러움도 있어 보였지만, 내가 못 되서 그런지 왠지 모르게 이새끼 입꼬리 올라간 거 같아… 너도 이제 나랑 같은 속도야, 하는 느낌이었다. 기분 탓이겠지… 내가 심술쟁이인거지…
야한 소설이라도, 너무나 솔직해서 으이그 대놓고 짐승이네 짐승이야, 하는 인물들만 잔뜩 나와도 잘 쓴다, 잘 써, 하고 압도하는 거장 할배의 소설 사 둔 게 아직 세 시리즈 남아서 신났다. 아껴 읽어야지… 소설을 좋아하는데도 펼칠 엄두가 잘 안 난다. 자꾸 회피스킬 쓰면서 엉뚱한 책만 본다. 좋아하는데 읽기 시작하기가 두려운 소설이라는 세계…너무 빠져 버릴까 봐…

모딜리아니의 누드는 표지 그림으로 써서 바로 확인할 수 있었는데, 길게 묘사된 스탠리 스펜서의 The leg of mutton nude는 검색해서 찾아 보았다. 글로 길게 묘사하고 써 먹을 만큼 강렬했고, 이 소설 속에서 혼인 제도를 강하게 부정적으로 보는 걸 그림 한 장에 다 눌러 그려놓았다 싶었다. 여기 올리면…검열 삭제 당하나… 이거 1937년도의 네오 로맨티시즘 계열의 예술 작품입니다…이 소설의 중요한 모티프로…엣헴…

쫄보니까 링크만 남겨 둡니다…궁금하신 분만 슬쩍…

Double Nude Portrait: The Artist and his Second Wife (The leg of mutton nude)
Stanley Spencer(1937)

https://uploads3.wikiart.org/images/stanley-spencer/double-nude-portrait-the-artist-and-his-second-wife-the-leg-of-mutton-nude-1937.jpg


+밑줄 긋기

-오직 섹스를 할 때만 인생에서 싫어하는 모든 것과 인생에서 패배했던 모든 것에 순간적으로나마 순수하게 복수할 수 있기 때문이야. 오직 그때에만 가장 깨끗하게 살아 있고 가장 깨끗하게 자기 자신일 수 있기 때문이야. 부패한 건 섹스가 아니야-섹스 아닌 나머지가 부패한 거야. 섹스는 단순히 마찰과 얕은 재미가 아니야. 섹스는 죽음에 대한 복수이기도 해. 죽음을 잊지 마. 절대 그걸 잊지 마. 그래, 섹스도 그 힘에 한계가 있어. 나도 한계가 있다는 걸 아주 잘 알아. 하지만 말해봐, 섹스보다 큰 힘이 어디있어?(88)

-성공적으로 관습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네 기질이나 가정교육과 어울리지 않는 과장된 행동이나 괴상한 옷이 필요하지 않아. 전혀 그렇지 않아. 네가 할 일은, 켄, 네 힘을 찾는 것뿐이야. 너한테는 그럴 힘이 있어. 그럴 힘이 있다는 걸 내가 알아-오직 새로운 형태의 곤경이 나타날 때만 그 힘의 동원이 불가능해져. 구호나 검토되지 않은 규칙의 협박을 넘어 영리하게 살고싶으면 너 자신의 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돼… (103, 문장만 딱 떼어놓고 보면 겁나 맞는 조언 같지만, 대화의 맥락이 여자친구를 임신시킨 아들에게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는 아버지의 대사라는 점, 그 아버지가 어린 자기 제자들과 어울리기 위해 이혼한 인간이라는 점이 난감하다…혼란하다 혼란해…)

-내 아들은 오직 올바른 도덕적 자격을 갖춘 여자하고만 씹을 할 수 있어. 제발, 나는 아들한테 말해. 그것도 도착이구, 다른 도착보다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어. 그저 그걸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렇게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 (110)

-하지만 60년대? 그 유치함의 폭발, 그 천하고 생각 없는 집단적 퇴향, 그게 모든 걸 설명해주고 모든 걸 변명해준다고요! 더 나은 알리바이는 내놓을 수 없나요? 무방비 상태의 학생들을 유혹하고, 다른 모든 사람을 잃어가면서 자신의 성적 이익을 추구하고- 정말 불가피한 일이었겠네요. 네? 아니죠, 불가피한 건 어려운 결혼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어린 자식을 기르고 어른의 책임을 마주하는 거예요. 나는 그 오랜 세월 동안 어머니가 과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과장이 아니었어요. 오늘밤까지도 난 어머니가 어떤 걸 겪으며 살아왔는지 잘 몰랐어요.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준 고통, 왜 그런거예요?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안긴 짐-아버지가 나한테, 어린아이한테 넘긴 짐, 어머니에게 세상의 모든 것이 되어주라는 짐, 왜 그런 거예요? 아버지가 ‘자유로워지려고’? 나는 아버지를 견딜 수 없어요. 절대 못 견딜 거예요. (112, 이야 도덕적 자식한테, 미래 세대에게 혼나는 게 이런 거로구나…제일 무섭네.)

-봐, 나는 이 시대에 속하지 않아. 네 눈에도 그게 보이잖아. 네 귀에도 그게 들리잖아. 나는 무딘 도구로 내 목표를 이루었어. 나는 가정생활과 그것을 보호하려고 일어서는 사람들에게 망치를 들었어. 또 케니의 삶에도. 내가 여전히 망치를 든 사람이라는 건 놀랄 일이 아니야. 나의 고집 때문에, 지금 시대에 속해 있고 지금까지 이것들 중 어떤 것도 고집할 필요가 없었던 네게, 내가 마을의 무신론자 비슷한 희극적인 인물이 된다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야. (137)

-내가 그랬지. “여기 와서 이 모든 걸 볼 수 있어 좋네요.” “네, 대단했죠, 안 그래요?” 케이트가 말했어. 그러더니 피로한 미소를 띠며 덧붙이더군. “조지가 날 누구로 생각했을지 궁금하네요.”(148-149)

-나는 카메라, 줌렌즈가 달린 라이카를 가져왔고 아이는 일어섰어. 우리는 커튼을 쳤고, 우리는 모든 불을 켰고, 나는 적당한 슈베르트를 찾아 틀었고, 아이가 춤을 추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옷을 벗기 시작했을 때 그 움직임은 약간 이국적이고 동양적이었어. 아주 우아하고 아주 무너지기 쉬워 보였지. 나는 소파에 앉아 있었고 아이는 서서 옷을 벗고 있었어. 아이가 옷을 벗어 하나씩 내려놓는 동작은 마법을 부린 듯 매혹적이었어. 마타하리. 장교를 위해 옷을 벗는 스파이. 그러는 동안에도 내내 당장이라도 부서져버릴 것 같았어. 아이는 먼저 블라우스를 벗었어. 이어 신발. 여기에서 신발을 벗는다는 것이 특별했어. 그다음에는 브라를 벗었어. 그러자 마치 옷을 벗은 사람이 양말을 벗지 않은 것처럼, 약간 익살맞아 보이는 느낌이었어. 가슴을 드러내고 스커트는 입은 여자는 나에게 에로틱하지 않아. 어쩐 일인지 스커트가 그림에 커다란 혼란을 일으켜. 가슴을 드러내고 바지를 입었을 땐 아주 에로틱하지만 스커트만 입었을 때는 효과가 없어. 스커트를 입으려면 브라를 그대로 차고 있는 게 차라리 더 낫지. 젖가슴은 드러낸 채 스커트만 입고 있으면 누구한테 젖을 먹이려는 것 같아. (160)

-사진. 콘수엘라가 나한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 걸 결코 잊지 못할 거야. 밖에서 훔쳐보는 사람에게는 포르노그래피의 한 장면처럼 보일 뿐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포르노그래피와는 가장 거리가 멀어. “카메라 있어요?” “카메라 있지,” 나는 말했어. “저 좀 찍어주실래요? 선생님이 아시던 제 몸을 사진으로 갖고 싶어서요. 선생님이 보시던 대로. 곧 달라질 테니까요. 이런 일을 부탁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해요. 다른 남자한테는 이걸 부탁할 수가 없어요. 그럴 수 있었으면 선생님을 귀찮게 하지도 않았을 거에요.” “그래,” 나는 아이에게 말했어. “해보자. 뭐든지. 원하는 대로 말만 해. 뭐든지 해달라고만 해. 나한테 다 말해.” “음악 좀 틀어주실래요?” 아이가 말했어. “그러고나서 카메라를 가져오세요.” “어떤 음악을 원해?” 내가 물었어. “슈베르트요. 슈베르트의 실내악.” “알았어, 알았어.” 나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속으로, 하지만 <죽음과 소녀>는 안 되지, 하고 중얼거렸어.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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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9-11 21:3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39금 느낌이 나네요 🙄

반유행열반인 2021-09-11 21:40   좋아요 4 | URL
저 아직 그나이 안 되었는데…너무 일찍 읽었습니까…

scott 2021-09-11 21: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안돼 ㅋㅋ 열반인님 로스옹이 최애로 자리 잡으시면 ㅎㅎㅎ
정영목님의 번역이랑 찰떡인 로스옹,,
열반인님 네미시스 사알짝 추천 ^ㅅ^


반유행열반인 2021-09-11 21:43   좋아요 3 | URL
왜 안 되나요… 왜죠… (빻은) 소설 세상을 떠받치는 산 기둥 쿤데라 할배랑 죽은 로스 할배랑… 유럽 할배 미국 할배 골고루 재밌네요ㅎㅎ 네메시스도 다른 쟁인 책 다 소진하면 모셔보도록 하겠슙니다!

라로 2021-09-11 22: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저도 그게 궁금해요, 어느 것이 먼저인지,,,건 그렇고, 저는 에브리맨하고 울분 좋았어요. 죽어가는 짐승은 안/못 읽어봤는데 읽어봐야겠다요.

반유행열반인 2021-09-12 08:39   좋아요 1 | URL
같은 작가 읽은 거 보니...저희 비슷한 과?!?! ㅋㅋㅋ(맘대로 엮는다...) 읽은 게 안 겹치셔서 저도 그 두 권이 궁금해지네요 ㅎㅎ여태 읽은 포트노이 전락 짐승 보면 꽤나 일관성 있는 할배 그리고 소설로 보이긴 합니다 ㅋㅋㅋ반가운 라로님!!!

Yeagene 2021-09-13 11: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 표지보고 깜짝 놀랐는데,링크 걸어주신 그림 보고는 더 놀랐네요 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1-09-13 11:40   좋아요 2 | URL
실례가 많았습니다...후방주의라도 달아놓을 것을...그런 깜짝 놀랄 소설입니다...

blanca 2021-10-28 15: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거의 실신했던 기억이...정말 잘 썼죠. 여러 문장이 아직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너무 잔상이 길었던 작품이에요.

반유행열반인 2021-10-28 17:3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blanca님 같은 책을 인상 깊게 읽으셨다니 반갑습니다. 속내와 경험을 이토록 섬세하게 까발리는 작가가 귀한 것 같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