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 인간의 시계로부터 벗어난 무한한 시공간으로의 여행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보희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10828 카를로 로벨리.

한국 나이 열여덟 살이 되면 갈림길 앞에 선택을 요구받는다. 이후로 세계를 보는 눈과 도구와 생계 수단까지 영향을 받는 그 질문. 나는 별 고민 없이 결정을 내렸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러자 남들로부터 또다른 질문들이 쏟아졌다.
너 왜 이과 안 가?
요즘은 문이과통합이니 고교학점제니 교육과정이 많이 달라진 모양이지만, 대학 입시에 요구되는 과목들을 훑어보면 여전히 문과냐 이과냐 하는 경계는 지워지지 않은 듯보였다. 내가 고등학생이던 2000년대 초반에는 그 구분이 뚜렷했고, 고3 때 이과에서 포기(?)하고 문과로 전과해서 오는 친구들은 제법 있었지만 문과에서 이과로 건너가는 사람은 (없지는 않았겠지만) 나는 못 봤다.
어쨌거나 그렇게 정해진 진로에 맞춰 제한된 과목을 이수하고 수능을 치고 대학에 가고 지금 일하는 곳까지 오게 되었다.

수학을 잘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과학에는 내내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벌써 이십 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모르는 분야에 관해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이라도 고교 과정 수준의 이과 수학이나 과학을 다시 공부해보고 싶다. 카를로 로벨리 책을 세 권째 읽으면서 그런 뽐뿌는 더욱 심해져서 일단 2015개정교육과정의 기본수학, 수학1,2, 미적분, 기하, 물화생지1 교과서를 모조리 구해두었다. ㅋㅋㅋㅋㅋㅋㅋ아무래도 며칠 못 갈 것 같지만…

지각을 하면 혼이 나고 약속 시간을 못 지키면 비난을 받고 마감일 납품 기한 제출일 등등 정해진 일시를 지키지 못하면 무능하거나 책임감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 여럿 살아가는 세상이 돌아가려면 시간을 준수하는 일이 중요할 수 있다. 시간은 사회적인 필요에 의해 발명된 제법 효과적인 발명품이다.
과학자 입장에서, 특히나 매우 작고 작은 세계를 다루는 양자 중력 연구를 하면서 루프 이론을 옹호하는 학자로서 카를로 로벨리는 시간이란 공간과 마찬가지로 관계를 나타내기 위한 한정적인 방법이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재미있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고 하다가 이제는 어떤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하니까.

남들보다 유독 작고 작은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그래서 시간이 크게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어떤 한순간은 무한에 가깝고 어떤 긴 시간은 찰나처럼 느낀다.

시계가 하나 생겼다. 알라딘 전자책을 세 권 사고 키링 시계를 받아 독서대 하나에 걸어 놓았다.
시계 하나가 고장났다. 역시 알라딘에서 참고서를 사고 타이머와 스탑워치를 갖춘 자석 시계를 받아 냉장고에 붙여 놨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액정이 나갔다. 이 세계의 숫자가 아닌 무늬만 보여줘서 쓸 수 없게 되었다.
시계를 또 하나 샀다. 화이자 백신을 맞고 자꾸만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어렵고 맥박이 불규칙한 느낌이 들었다. 병원에 가니 심전도와 혈액검사를 하고는 별 이상 없다며 맥박 안정시키는 약이랑 공황장애 약을 주었다. 내 심박수가 멀쩡한 걸 지켜 본다면 조금 안정이 될까 싶어 중국산 스마트밴드를 샀다. 걸음 재고 수면 시간 재는 건 유용하다. 심박수는 심방세동 같은 걸 잡는 기능은 없어서 솔직히 쓸모를 잘 모르겠다. 9일 동안 밤마다 약을 먹고 잘 자서 좋았는데 약이 없어지니 수면이 엉망이 되었다.

우주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찾는 책들을 보면서 자꾸 더 작아지는 동안, 시간에 집착하지 않는 삶의 태도를 배우는 동안, 역설적으로 시계를 더 찾는 내가 이상하기도 하다. 조그만 닻처럼 안심을 주는 토템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치만 겨우 그 작은 물성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걸 알잖아. 세상을 보는 내 눈과 그걸 걸러내는 내 뇌가 중요하다. 우리는 그걸 마음이라 부르지. 마음이 차곡차곡 쌓여 삶이 된다. 마음은 이리저리 변하고 나아지거나 물러난다. 일부는 내가 하는 일이고 일부는 내가 어쩔 수 없는 바깥의 사람과 상황과 세상이 하는 일이다.

그래서 내가 하기로 한 일들을 열심히 해 봐야지. 책도 계속 읽고, 다시 열여덟 살 처럼 수학이랑 과학도 공부하고, 일도 하고, 내가 만들어 놓은 사람과 관계를 잘 챙기면서 부지런히 변하는 나를 쫓아가야겠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eagene 2021-08-28 14:03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과수학 과학에 미련이 많아요..그 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 다시 보면 어떨지 궁금합니다..
근데,다시 볼 생각은...없을 듯해요;;;;

반유행열반인 2021-08-28 14:06   좋아요 6 | URL
이미 가보신 길이니까 잘 아시잖아요 ㅋㅋㅋ저는 다항식 풀다 네 문송합니다 하고 빠꾸칠 거 같네요 ㅋㅋ

새파랑 2021-08-28 14:3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 밑줄이 46개나 되네요~!! 우주에 비하면 인간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을것 같아요 🙄 그래도 나만의 시간이 가장 소중함~!!

반유행열반인 2021-08-28 16:35   좋아요 4 | URL
가끔 출판사에서 고소 들어오는 걱정을 조금 합니다… 저 진심 좋아서 홍보하려고 그런 건데…ㅋㅋㅋ 시간도 관계라 하니 나와 무언가와의 (책이든 사람이든 책쓴 사람이든) 상호작용이 있어야 시간도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배운대로 써먹기…는 오독오해 ㅋㅋㅋ)

미미 2021-08-28 15:07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도 문과인데 카를로 로벨리나 칼 세이건의 책을 읽고 어? 이쪽도 사실 재밌나봐? 정도였다가 <페르마의 마지막정리>읽고 엄청 뽐부받아 수학문제집 사모은(일단 사모으기만;) 1인입니다. 이 저자들 책 읽다보면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게 과학,수학 같다는 착각에 물드는 것 같아요~♡ 신기한 경험ㅎㅎ

반유행열반인 2021-08-28 16:36   좋아요 4 | URL
우와 수학책 사 모은 게 나만 그런게 아니라 신기! 미미님이 저랑 같은 짓(?)하셨다니 역시 카를로 로벨리랑 칼 세이건(저는 꽂아만 뒀는데도!)이 꼬신 거임!!!

syo 2021-08-28 15:4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씩씩한 독후감이네요 ㅎㅎㅎㅎ
진짜 열여덟 청소년처럼, 으쌰으쌰 열공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게 귀여워요.....

반유행열반인 2021-08-28 16:37   좋아요 4 | URL
훌륭한 사람이라곤 안 했는데 ㅋㅋㅋ일단 열여덟 쓰는 욕부터 줄여야 훌륭에 가까워질텐데 말이죠…(아닌가 청소년이 욕을 더 하는가…인과의 오류)

2021-08-28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8-28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붕붕툐툐 2021-08-28 18: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허~ 카를로 로벨리가 그렇게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역설했건만, 시계를 또 사셨단 말이요. 허허...

반유행열반인 2021-08-28 18:55   좋아요 1 | URL
만보계 겸 심박수 측정기에 시계 기능이 있더라구요? 시계 아님 ㅋㅋㅋㅋ 고양이 그려진 열쇠고리인데 바늘도 달렸더라구요? 시계 아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