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로토닌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10810 미셸 우엘벡.

작년 이맘쯤 ’소립자’를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꽤나 재미있어서 이미 읽었다는 친구들한테 왜 이 재미있는 걸 니들만 읽었어…했더니 한 친구가 자기가 가지고 있던 소립자 책을 줬다. 나는 신이 나서 친구가 플래그 붙여둔 페이지들을 이리저리 넘기다가 다시 볼 지 어쩔지 모를 책을 책꽂이에 잘 꽂아 뒀다. 그리고 신간으로 나온 ’세로토닌’도 샀다. 일 년 푹 묵혔다가 이번 여름 가기 전에 읽었다.

중년의 플로랑클로드, 플로드클로랑, 이름 자꾸 헷갈리는 주인공 남자가 몇 달, 몇 년, 시간이 잘 가늠되지 않는 동안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옛 연인을 회상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나온다. 서서히 죽어간다는 생각이 절로 들도록 심심하고 외롭게 지낸다. 비슷한 느낌이었는지 왠지 모르게 필립 로스의 ’전락’도 생각나고 ’죽어가는 짐승’도 읽고 싶어졌다.
읽을 수록 드는 생각은, 책에 등장하는 기간 동안은 내내 섹스 한 번 못하는 주인공이 끝나버린 성생활이 인생의 끝이고 세계 종말인 듯 허무와 목적상실의 소용돌이로 빨려들어가는 모습, 그래도 목숨을 이어가겠다고 세로토닌 흡수 억제제 열심히 먹으면서 결국 자살을 생각하는 이 남자에게 나는 아무런 동정심이 들지도, 공감하지도 못하겠구나, 였다. 이런 나새끼가 잔인한 건지, 작가가 그러라고 의도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찮은 삶이란 없는데 또 한없이 하찮게 보이고 어쩌면 흔하고 평범하고 또 조금은 나쁜 놈 같은데 완전 나쁜 놈도 아닌 이 남자 이야기를 따라가는 게 나한테 무슨 의미인지 회의도 약간 느꼈다. 행복해지고 싶지만 행복할 수 없어, 행복할 뻔 했는데, 그 여자와 함께 였다면, 그 전과 후의 여자는 아니야, 다 환멸이야, 심지어 남들이 행복하겠다고 이런저런 열정 다하는 모습조차 다 쓸모없는 짓으로 심드렁하며 내내 그러고 있는게 그냥 좀 답답했다.
오래전 연인 카미유의 집까지 뒤쫓아가 그녀의 아이에게 총구를 겨눌 때는 진짜 이새끼가, 하고 역겹기도 했다. 그 장면에 빡쳐하다가 식사 시간이 되어 꼬물거리는 곁의 네 살 꼬마에게 김에 밥을 싸서 먹이는데, 밥을 입에 넣어주고 뽀얀 볼을 만지고 입도 맞추면서 아, 저런 장면에서 빡치는 거 보니 나 생각보다 아이들에게 기대는 삶이구나, 했다.
조금만 어렸어도 삶이란 뭐냐, 행복이란 뭐냐, 죽어가는 거냐, 살아가는 거냐, 하면서 몰입해서 읽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느끼기로는 이런 게 소설이라면, 문학이라면, 소설도 문학도 예술도 이 남자처럼 노쇠하고 소멸되어 가는 중이 아닐까 싶었다. 반으로 쪼개지는 작고 하얀 알약에만 기대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달라지려고, 나아지려고 시도하지 않는다면. 그냥 죽을 날만 세고 있는 거지 뭐.

향정신성 물질이 몸에 작용할 때의 느낌을 안다. 죽고 싶고, 그러다 살고 싶고, 무기력하고, 그러다 또 조증으로 날뛰고, 그런 기분을 안다. 리비도가 삶의 원동력이 될 때가 많았고, 많고, 주위에 함께 밥 먹고 무엇이든 함께 할 사람이 있는 게 축복이고 행복의 원천인 것도 안다. 지금 누리는 모든 게 사라지면 나도 저렇게 무감각하고 애쓰지 않는 인간이 될까. 행복해지려는 어떤 시도도 포기한 채 그저 과거만 돌아보는 인간이 되는 날이 올까. 아직은 덜 늙었는지 나는 최대한 무엇이든 붙들려고 애쓸 것도 같다. 아니면 그냥 조용히 책 읽으며 홀로 늙어가는 삶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플로랑이 책 읽는 모습도 제법 나오고(심지어 세 든 집에서 사드 전집도 찾아 내고), 이런 저런 시구 인용도 하는 거 보면 이 인간이 독서에서 즐거움 찾지 못하고 저렇게 공허해하고 나중에는 텔레비전에서 푸드 포르노나 쳐 보고 있는게 이해가 안 되기도 했다. 어이어이 살 만 한 거냐. 벌써 우울증과 무기력감을 잊어버린 거냐. 휴가 내내 집안에 처박혀 있었더니 잊었던 짜증과 화가 기억나려고 하는 것도 같은데, 다시 열심히 걷고 열심히 몸을 써야겠다.

아, 그리고 번역. 이전에 뒤라스 책 읽으면서 문장이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같은 역자가 우엘벡 책 번역했다니 걱정이네, 했는데 역시나 이번 책 읽을 때도 으 왜 이렇게 썼대 하는 부분이 종종 있었다. 프랑스어는 하나도 모르지만 대명사 처리, 조사 같은 디테일한 부분에서 거슬렸다. 원문 느낌을 살리는 건지 어쩐 건지 몰라도, 적어도 한국어 문장을 쓸 때 나라면 저렇게 불분명하고 불명료하게 옮겨 오지는 않을 거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건 뭐 1개국어 구사 독서인의 한계 ㅋㅋㅋㅋㅋ

+밑줄 긋기
-자고로 자유란 주체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상부에서 하달된 수칙에 대한 하급자의 반감이나 일종의 불복종, 또는 제이차세계대전 직후에 등장한 다양한 실존주의 연극에서 이미 묘사된 개인의 도덕심에 의한 반항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72)

-마지막으로 찍은 케이트의 사진이 아마 내 컴퓨터 안 어딘가에 있을 테지만, 그녀의 모습을 되새기기 위해 굳이 컴퓨터를 켤 필요는 없다. 그저 두 눈을 감는 것으로 충분하다. 당시 우리는 그녀의 집에서, 그러니까 그녀의 부모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낸 참이었다. 코펜하겐은 아니었는데, 도시명이 가물가물하다. 어쨌든 나는 기차 여행을 하면서 파리로 천천히 돌아오고 싶었다. 여행의 초기는 묘했다. 기차가 발트해 위를 달렸고, 잿빛 바다 표면과 우리의 거리는 불과 2미터 남짓이었다. 이따금 거센 파도가 더러 우리 객실의 현창을 철썩 때리고 갔다. 우리는 하늘과 바다라는 두 추상적인 광활함 사이에서 단둘뿐이었고, 나는 인생에서 그토록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어쩌면 내 삶은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철썩거리는 거대한 파도와 발트해와 영원히 합체된 우리의 육신.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기차는 목적지(로스토크였나, 아니면 슈트랄준트였던가?)에 도착했다. (113-114)

-결과적으로 그녀의 부친은 공증증서 작성과 담보 등기라는 단순한 부동산 행위 하나로, 내가 근 사십 년의 세월 동안 힘겹게 모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번 셈이었다. 노동은 결코 돈으로 보상된 적이 없었다. 그 둘은 엄밀히 말해 아무 상관이 없었다. 어떤 인간사회도 노동에 대한 보상을 토대로 건설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미래의 공산 사회도 그 원칙에 기반을 두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마르크스는 부의 분배원칙을 다음의 공허한 말로 요약했다. “각자의 필요에 따라.” 혹여 우리가 그의 말을 실행에 옮기는 불행이 일어났더라면 끊임없는 억지와 궤변의 원천이 되었을 것이나, 다행스럽게도 나머지 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공산국가에서도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돈이 돈을 부르고, 돈에 권력도 따른다. 그것이 사회조직의 최종 결론이었다. (157-158)

-사랑을 일종의 둘이 꾸는 꿈에 비유하는 건 틀린 생각이 아닐 것이다. 물론 만남과 엇갈림을 반복하는 게임 같은 시간들과 각자 꿈을 꾸는 소소한 순간들이 있겠지만, 사랑은 어쨌든 우리가 지상에 존재하는 시간들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어쩌면 세상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유일무이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194)

-정말이지 우리가 다른 이들의 삶에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정도 연민도 정신분석도 이성적인 상황판단도 전혀 유용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스스로 불행의 메커니즘을 만들어낸 뒤 의미를 최대로 부풀리고, 그렇게 메커니즘은 하릴없이 계속해서 돌아간다. 질병이 개입하면 작동 오류나 결함이 생기지만 계속해서 돌아간다. 끝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260)

-심장이 고통스러운 경련으로 옥죄어들었고, 추억들이 쉬지 않고 속속 되살아났다. 우리를 죽이는 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다. 자꾸만 되살아나서 우리의 가슴을 에고 우리를 좀먹고 결국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327)

-그는 그래도 조금은 머뭇거리며 입술을 살짝 떨더니 말했다. “선생은 현재 깊은 슬픔으로 죽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368)

-어쨌든 이 세상은 이미 죽었다. 나에겐 죽은 세상이었고, 비단 나에게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세상은 그냥 죽었다. (392)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미 2021-08-10 21: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 아 로스트에서 저 배우의 한국어 발음에 한 번 놀라고 자막에 두 번 놀란 기억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8-10 21:05   좋아요 4 | URL
저 정작 짤만 실컷 보고 드라마는 본 적이 없어요. 요태까지 날 미행한고야? ㅋㅋㅋㅋ

미미 2021-08-10 21:08   좋아요 4 | URL
그럼 다 보신거예요ㅋㅋ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8-10 21:10   좋아요 4 | URL
왜 난 햄보칼수업서!!!

scott 2021-08-10 21:0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분 말 알아듣는 1인 🖐 이렇게 자막으로 읽으니 한국어 받침이 을마나 어려운건지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8-10 21:10   좋아요 4 | URL
꽈찌쭈처럼 여기 주인공이 저렇게 포효라도 했다면, 남의 불행가지고 웃는 거 나쁘지만 하여간에 실소라도 했을 텐데 우엘벡 할배 진짜 웃음 한 톨도 허용 안 하더라구요…..

붕붕툐툐 2021-08-10 21: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요즘 열반인님 페이퍼는 맨 마지막 짤 보는 재미!ㅋ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8-10 22:05   좋아요 4 | URL
소설 내내 온몸으로 주인공이 저렇게 쥐어짜는 거 같은데 도무지 웃기지를 않아서 오랜만에 추억짤 소환했네요 ㅎㅎㅎ

2021-08-11 1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8-11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21-08-11 1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립자때 내가 쪼렙이어서 그랬던건지 아니면 진짜 소립자가 짱이었던건지 그걸 모르겠단 말이지요... 🤔 아무래도 소립자 재독이 필요하겠네요.

반유행열반인 2021-08-11 13:52   좋아요 0 | URL
이 책보다는 역시 소립자가 짱이에요 야한 거든 뭐든 더 젊어서 쓴 거라 아직 에너지도 느껴지고 ㅋㅋ이 책은 너무 희망이 안 보여서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