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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1년 3월
평점 :
-20210621 가즈오 이시구로.
봄에 태어난 친구는 왠일인지 자기 생일날 내게 이 책을 선물해 주었다. 내가 소설을 가장 좋아하는 걸 알고 소설책을 건네주는 마음이 고맙고 기쁘다. 사람은 혼자일 때 오롯이 행복할 수 없고, 외로울 틈 없이 내게 다가와 나를 필요로 하고 좋아해주는 사람이 아주 많지는 않아도 아예 없지는 않아서 좋은 시절이다.
이 책도 어쩌면 그런 이야기였다. 다만 그 존재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 이건 미래의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그냥 어떤 세계의 가능성. 누군가의 바람 내지 상상.
키우던 개가 나이들어 죽고 나서 오래도록 눈물짓는 동료가 있었다. 나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셔도 그렇게 안 우시더니 개가 죽으니 삼년상을 한다고 놀려댔다. 그러면 그 분은 또 웃다가 울었다. 퇴근해서 개가 늘 앉아 있던 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보면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사람이 아닌 존재에 사람 이상의 애착과 그리움을 가질 수 있는 게 그저 신기했다.
소설 속 세계는 우리가 사는 곳과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르다. 어느 대학에 가느냐가 미래의 더 나은 삶을 보장할 것이라는 기대는 여전하다. 옷차림과 사는 곳과 집의 모습에 따라 계급이 나뉘어지는 것도 여전하다. 아이들과 부모들은 여전히 다른 사람과 교류하기 위해 파티를 열고 모임을 가지고 친분을 쌓는다. 여전히 공연을 보기 위해 공연장을 찾는다. 이동을 위해 택시나 자동차를 타고 직접 운전해야 한다. 출근을 해서 일을 하고, 집에는 가정부가 일을 돕는다. 기계 장치는 오염 물질을 내뿜으며 사람들을 불쾌하게 한다. 사람들은 상점에 들러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고른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그린 이 세상은 발달한 기술 기계 문명을 다른 방식의 삶에 적용하는 데는 큰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다만 달라진 점은 아이들은 학교에 가는 대신 집에서 오블롱이라는 기계로 먼 곳의 교수자들과 교류하고 학습을 한다. 그래서 몸이 아픈 조시도 집에서 계속 수업을 듣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은 ’향상’이라는 프로세스를 거친 계급과 아닌 계급으로 나뉘고, 향상을 선택하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대학 진학을 비롯해 사람들이 아이를 바라보는 방식까지(예를 들면 릭을 보고도 향상을 하지 않고도 똑똑하고 대학에 진학할 만하다고 평가하는 것 자체가 어떤 열등성을 전제로 한다), 삶의 여러 측면에서 제약이 있는 것처럼 그려진다. ’향상’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자세히 다루고 있지 않지만 그 때문에 조시의 언니 샐은 죽었고, 조시 또한 그 과정에서 건강을 해치고 죽음과 삶의 기로에 설 정도로 아픈 나날을 보낸다.
조시에게는 친구 릭이 있지만, 유행에 따라 조시의 엄마는 조시에게 에이에프, 인공 친구 클라라를 상점에서 구입해 준다. 소설은 기계 장치 친구인 클라라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인간이 아닌 존재의 인지, 기억, 학습 방식을 상상해서 표현하려고 한 점은 나름 새로웠다. 클라라는 조시의 곁에 늘 함께할 뿐 아니라, 조시 주변의 인물들, 조시의 엄마, 릭, 릭의 엄마 헬렌, 조시의 아빠, 가정부 등 다양한 사람과 소통하며 그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사람 사이에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관계들을 나아지도록 돕기도 한다. 태양이 힘을 발휘하면 아픈 조시가 나을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태양에게 빌기 위해 태양이 쉬러 가는 (것처럼 보이는) 먼 헛간까지 힘들게 찾아가 마음 속으로 빌고, 태양이 조시를 돕지 않는게 오염을 내뿜는 쿠팅스 머신(무슨 기계인지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클라라는 자신의 몸안의 액체를 덜어 쿠팅스 머신을 고장내는 일까지 실행한다. 대체 어떤 논리로 그런 인과관계를 이끌어내는지 아이 같고 천진해 보이기도 하지만, 클라라가 고군분투한 덕인지 알 수 없지만 하여간에 태양이 밝게 비추고, 그 특별한 볕을 쬔 조시는 건강을 회복해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집을 떠난다.
그런 기억들을 마냥 회상하며, 아이가 자라나 더 이상 인공 친구라는 역할을 요구받지 않는, 낡고 잊혀진 곰인형처럼 클라라는 야적장에 놓여있다.
작가는 최대한 조심해서 그리려고 한 것 같다. 사람들은 인공 친구에게 예의를 차리려고 하고, 무례하게 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탓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존중하고 조심하는 듯해도 인공 친구는 사람이 만든 새로운 노예처럼 보였다. 의도적으로 노동이 어원인 로봇 같은 말은 쓰지 않은 것 같지만, 인공 친구가 도맡는 것은 감정 노동이다. 인간처럼 노여움도 없고, 훨씬 더 관대하고 상대의 감정을 살필 줄 알고 사람 간의 관계를 원만하게 이어갈 말을 골라 할 줄 아는 존재. 나와 싸울 일이 없는 친구. 클라라 같은 존재가 우리 곁에 있다면 이 이야기 처럼 마냥 아름다운 결말을 맞을 수 있을까. 사람들은 그들을 감정적으로 학대하거나 착취하지 않고 저렇게 존중하며 품위 있게 굴 수 있을까. 그렇게 용도를 다한 친구를 멀리 치워버리고 냉장고 버린 것 마냥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을까.
낭만적이지만 나름의 고민의 흔적이 있지만 그다지 특별하지도 만족스럽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감정과 친밀함을 나눌 존재는 상점에서 뚝딱 살 수도 없고, 누군가 신제품으로 바꾸거나 폐기할 수 있는 일방적인 입장에서는 권력관계가 너무나 명확할 수 밖에 없고, 서로 삐지고 삐질까 봐 겁내고 하는 와중에 조심성과 존중이 발생하지 마냥 긍정해주고 다정하도록 프로그램된 존재에게서 진정성을 느끼거나 위로를 받지는 못할 것 같다. 가혹한 나새끼ㅋㅋㅋ 에이에프 친구보다는 같이 책 이야기 주고 받고 책 주고 받는 친구가 더 절실하다 이겁니다.
+밑줄 긋기
-“죄송합니다. 그냥 제가 좀 놀랐어요.”
“음? 왜 놀랐는데?”
“그게, 저는……솔직히 말해서 릭과 관련한 헬렌 씨의 요청에 강한 진심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 놀랐어요. 사람이 자신에게 외로움을 가져올 방법을 원한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그게 놀라운 일이야?”
“네. 전에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외로움을 선택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외로움을 피하려는 소망보다 더 강력한 힘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몰랐어요.” (229)
-“너 이걸 진심으로 믿는구나? 조시한테 도움이 될 거라고.”
“네. 네, 그렇게 믿어요.”
아버지가 어쩐지 달라진 것 같았다. 아버지는 몸을 세우더니 나처럼 열심히 왼쪽 오른쪽을 둘러보았다.
“희망이란 게, 지겹게도 떨쳐 버려지질 않지.” 아버지는 분한 듯이 고개를 흔들었지만 한편 새로 힘이 솟는 것도 같았다. (325)
-“내가 카팔디를 미워하는 이유가, 마음 깊은 곳에 카팔디 말이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인 것 같아. 카팔디의 주장이 실은 옳다고. 내 딸만의 고유한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현재 기술로 파악해 복사하고 전송할 수 없는 것은 없음을 과학이 확실하게 입증했다고. 사람들이 지금까지 수세기 동안 내내 서로 사랑하고 증오하며 함께 살았지만 모두 잘못된 가정에 근거해서 그랬던 거라고. 우리가 무지했기 때문에 일종의 미신 같은 것을 지니고 살아온 거지….(생략)” (329)
-릭은 발끝으로 자기 앞쪽 자갈을 살살 찼다. 그러더니 말했다. “클라라. 네가 조시의 건강을 위험하게 할 말을 할 필요는 없고, 이 말만 할게. 네가 우리가 진정으로 서로 사랑한다고 전했을 때는 그게 진실이었어. 네가 속였다거나 오해를 일으켰다고 할 사람은 없어. 하지만 우리는 어린애가 아니니까. 서로 잘되길 빌어 주고 각자의 길을 가야 해. 내가 대학에 가서 향상된 애들하고 경쟁한다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일이었어. 지금은 나도 나름의 계획이 있고 그게 최선이야. 그래도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어. 그리고 이상한 이야기지만 지금도 거짓이 아니야.“ (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