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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 - 저들은 대체 왜 저러는가?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20년 11월
평점 :
-20210521 진중권.
우리집 책장에는 읽지도 않은 미학 오디세이 네 권이 꽂혀 있다. 내가 산 건 아니니 동생 아니면 엄마가 산 것 같다. 전3권인데 왜 네 권인가 하니 1권은 별이라는 친구가 내게 준 것이 한 권 더 있다. 진중권에게 친필 사인을 받은 거라며 넘겨주는 걸 난 시큰둥하게 받았다. 집에 세트로 다 있는지는 미처 몰랐지만. 겉표지를 넘기면 별이 이름과 진중권의 사인과 별이가 다니던 대학에 진중권이 강연을 왔던 날짜가 적혀 있을 것이다. 받은 직후 잠시 펼쳤다 덮은 게 다라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별이는 십대 후반 내가 놀던 피씨통신동호회에서 알게 된 경상도에 살던 동갑내기 소년이었다. 나중에 별이 사진을 다른 친구에게 보여주니 우웩 못생겼어 할 만큼 못났지만 왠일인지 나는 별이에게 푹 빠져서 십대 후반과 이십대 초반 긴 시간 동안 별이와 종알종알 수다떠는 것을 즐겼다. 우리는 김승옥과 무라카미 류를, 마릴린 맨슨과 나인인치네일스와 펄프와 매닉스트리트프리쳐스를 같이 읽고 듣고 또 뭐라뭐라 떠들었다. 우리는 술주정뱅이 아버지라는 불우한 가정과 고등학생의 경제적 빈곤과 학교의 부조리함과 연애의 고충 같은 것들을 공유했다. 나는 별이에게 호감을 가지고 몇 번을 들이댔지만 다 차였다. 별이는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지조를 지키는 나름 순수한 애였다. 사실 동호회에서 일 년에 한 번 있는 행사에나 얼굴을 볼 만큼 거의 만난 적 없는 애였는데도 나는 글 잘 쓰고 어린 주제에 인생 다 산 듯한 허무와 초월의 분위기를 풍기는 애들, 특히나 딱딱한 경상도 사투리 쓰는 아이들을 그때부터 좋아했다. (그리고 스물한살에 지금까지 이어질 연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경상도 남자를 하나둘셋넷…하여간에 많이도 짝사랑했다.)
내가 더는 별이를 이성으로 좋아하지 않게 되었지만 친구로 남게 된 어느 날 부터, 별이와 나는 사소한 일로 다투고 연락을 끊다 다시 내가 미안해, 하고 연락을 주고 받는 일을 몇 년을 반복했다. 상주에서 군복무와 대학 공부까지 마친 별이는 상경했고, 조그만 특수 직종 신문 만드는 회사에 취업해서 기자겸 편집인겸 영업겸 하여간에 혼자 가상의 여러 이름을 돌려 써 가며 지면 대부분을 채우는 일을 하게 되었다. 우연히도 내가 살던 동네 가까이에 집을 구해서 우리는 퇴근길 버스나 지하철에서 마주치기도 하고, 일부러 만나서 커피 한 잔 나눠마시고 헤어지고, 내가 가진 만화책을 빌려주고 받고, 동네 놀이터에서 만나 수다 떨다 헤어지고, 별이가 자기 사무실(명색이 신문사인데 왜 직원이 너만 나와 있어…)을 구경시켜주기도 했다. 생애주기를 겪는 방식도 공통의 지인도 소비하는 문화컨텐츠도 달라지면서 점점 공통의 이야기거리가 떨어지면서 특별히 통할 말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 이사를 가면서 저절로 거리가 멀어졌지만 그래도 멀지 않은 지역에 살아서 가끔 안부나 주고 받곤 했다. 그냥 수다일 뿐인데 이상하게 싸우고 기분 상하며 대화를 끝내는 일이 잦아졌다.
나도 변했겠지만, 별이는 확실히 변했다. 살이 찐 여자친구 흉을 보았고, 느끼한 아저씨처럼 살이 찌고 변한 얼굴이 담긴 셀카를 보내고, 자기 집에 놀러오라고 집요하게 말하고, 음식을 만드는 중이라고 했더니 뒷모습이 섹시할 것 같다고 하고(으으 난 그 때 임신중이었다고), 비가 오니 같이 만나 전이라도 사먹자고 하면서 이상한 소리를 늘어 놓았다. 그무렵은 이미 만나지 않게 된지 몇 년이 흐른 뒤였다. 적당히 넘기고 거절하다 못해 조금 세게 말했다.
그렇게 멋있는 척 하던 애가 왜 이렇게 병신 같이 변했어?
병신이라는 말 나쁘다는 생각하면서 지금은 안 쓰려고 최대한 노력하는데 하여간에 저때는 정말 심한 말을 해주고 싶을 만큼 질린 상태였다. 갑자기 급발진 하는 데 당황했는지 별이는 우물쭈물 변하는 것들에 대해 주워삼킨 것 같은데 하여간 그러고나서 얼마 되지 않아 별이가 이제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작별인사를 했다. 그렇게 이십년 조금 못 되는 인연이 정리가 되었다. 나는 우리가 포레스트 검프의 검프와 제니 같은 사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각자의 삶을 살며 시대에 세월에 휘말려 가다 어느 순간 다시 마주하고 서로의 변한 점과 변하지 않는 점을 찾으며 나름 위로를 주고 받는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런 위로보다 비루함을 드러내는 지점이 찾아오자 나는 그 친구를 패대기칠 수 밖에 없었다.
사람은 변한다. 세상도 변한다. 나 자신도 과거와 많이 달라졌고 달라질 것이다. 입장과 환경과 가진 힘이 달라지면 선택도 말도 행동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그걸 인정한다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들을 알고 자신을 순수하고 위대한 불멸의 절대선 같은 존재로 여길 수는 없을 것이다. 노무현의 죽음 이후 세상 초월한 듯 제대로 사는 삶에 관해 고민하는 듯하던 유시민의 글을 많이 좋아했고 대부분의 책을 읽었다. 그러면서 다시 정치로 그가 돌아가려 하는 날이 오면 손절하겠다고 했다. 이유는 다르지만 손절의 시기는 더 빠르게 찾아왔다. 진보가 그 지저분하고 위선적인 조국 일가와 윤미향을 지키겠답시고 그들의 잘못을 겨누는 이들을 악으로 규정한 순간 나는 정치와 진보에 대해 최소한으로 남아 있던 희망마저 버렸다. 진짜 해도해도 너무한 새끼들 아냐. 그런 생각을 진중권도 했나 보다. 자기도 부역자였지만 도를 넘었다 싶었나 보다. 강준만의 책도 비슷한 울분으로 튀어나온 것 같았는데 진중권의 책이 조금 더 재미있게 읽혔다. 빡치긴 한데 조금 더 차분하게 조목조목 깐다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읽는 내내 읽을 수록 열받네, 하면서도 왜때문인지 재미있었다. 진중권 책은 처음 읽고, 그가 떠드는 건 십여년 전 처음 트위터 등장했을 때 진종일 떠들어대는 게 신기해서 팔로우하다가 개소리 비중이 높아지길래 언팔하고 트위터며 SNS며 다 집어치우고 귀를 막고 있었는데 그냥저냥 재미있는 책이었다. 미학 책은 당장 읽을 생각은 들지 않지만 언젠가 읽을 일이 있으려나. 진중권을 여전히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하여간에 저 빡쳐하는 심정이 이해가 된다. 그리고 이 정권이 끝나고 나면 또 어떤 뉴스거리들이 죄와 벌과 보복과 응징의 서사가 이어질지 궁금하지만 알고 싶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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