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감정이 어려워 정리해 보았습니다 - 감정은 왜 그렇게 생생하고 지배적일까?
최낙언 지음 / 예문당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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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8 최낙언.

몇 년 간 뇌에 관한 책을 얼마나 읽었나 뒤적뒤적 해 보았다.

감각 착각 환각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도파민형 인간
환각-존재하지 않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마음의 오류들
뇌는 왜 아름다움에 끌리는가
여자의 뇌
남자의 뇌
우울할 땐 뇌과학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

직접 관련된 것만 해도 이 정도인데, 인용구 딴 문학 작품이라든가 뇌새끼야, 하고 탓하는 글만 추려도 마흔 번은 넘었다. (야야 번뇌 이런 건 빼야지…)
독서는 연결고리 같은 게 있어서, 아마도 시작한 책은 감각 환각 착각이었고, 거기에서 올리버 색스 박사의 책을 읽다가 이후로 뇌와 호르몬에 관한 이런저런 책을 읽어나갔다.
어쩌다보니 십 년 전 쯤 최낙언 선생님의 불량지식 까는 첫 책 부터 맛을 탐구, 탐색, 탐닉(?)하는 여정을 거쳐 미각 후각 외의 여타 감각과 뇌, (잠깐 물성책 보고 분자구조식에 한숨만 쉬다가…) 이번에는 감정에 대한 이야기까지 따라 읽었다. 맛에서 감각(주로 시각), 그리고 감정까지 이어지는 공부가 신기했다. 덕분에 남이 잘 소화시킨 지식 꾸러미를 잘도 주워먹었다.

초등학교 오학년 때 담임이 써준 통지표에는 잘 웃지 않고 표정이 어둡다고 써 있다. 오래도록 남들처럼 환하게 이를 드러내고 웃는 일이 어려웠다. 도무지 어떻게 얼굴 근육을 써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냥 무표정하게 마음을 숨기고 딱딱하게 내가 옳다 생각한 걸 말하곤 했다. 당연히(?) 친구가 많이 없었고 남들과 잘 지내지 못했다.(지금도 쫌 그렇지…)
그나마 가장 격렬하고 잦은 감정표현은 우는 일이었다. 엄마가 보이지 않아도, 친구가 생일파티에 나만 초대하지 않아도, 좋아하는 남자애에게 호되게 쳐맞고도, 울었다. 나중에야 그렇게나 싸우고 때리고 자살 시도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난리였던 양친이 모두 우울증이었다는 걸 알고 보니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이 모두 있었겠다 싶었다.
이십대 후반에야 모든 불안과 슬픔과 수면 장애와 자살 충동에 우울증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고, 다행히도 제 발로 잽싸게 소아정신과로(아기들 다니는 곳이라 심리적 허들이 낮았다) 걸어 들어갔다. 의사가 아기들에게는 모래놀이 같은 심리치료를 하더니 성인한테는 쉽게 이런 저런 하얀 약들을 줬고, 간만에 잘 잤다. 우울감을 벗어나는 데는 반 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는데, 사실 약효가 발휘되어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가 잘 된 건지, 그 사이 임신을 하면서 온갖 호르몬 홍수의 특혜를 입은 건지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임신과 출산과 수유를 경험하면서 옥시토신의 홍수를 겪어 보았다. 나름 행복한 시간이었고 나를 구원한 사람 중 하나는 마침 그때 생겨난 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맨날 구박하는 못된 어미..)

삼십대 후반을 바라볼 즈음에야 비교적 잔잔한 마음으로 살게 되었다. 여전히 가끔은 높은 파도 같은 부정적 감정이 치솟아도, 지금 내 마음이 이런 상태구나, 하고 바라보며 나아지길 기다릴 줄 알게 되었다. 거기에 기여한 게 뭘까 생각해보니 앞서 읽은 뇌와 마음에 관한 이런저런 책들, 그리고 그런 내용은 아니지만 펄럭거리는 마음을 잠시 기대놓을 아무 책들, 무조건적인 지지와 수용을 경험하게 해준 가족, 사랑, 친구, 지금 나는 이런 상태야 하고 이런 저런 이름을 붙여보는 일기쓰기, 직장을 옮긴 이후 매일 왕복 한 시간 햇볕 내리쬐며 걷는 출퇴근길 정도가 떠오른다.
완벽하고 올바른 사람은 될 자신도 그럴 생각도 없지만, 전보다는 조금 더 행복한 사람이 된 것 같다. 행복은 강도가 아닌 빈도라는 책의 말이 와닿았다. 큰 것을 이루고 큰 사람이 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자잘하게 행복하고 큰 불행과 블랙홀 같은 우울만 피하며 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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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빨간레몬 2021-05-18 23:0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반유행열반인 님의 글을 읽으며 공감가고 안타까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뇌와 관련된 책을 이렇게 볼 정도로 자신의 문제와 치열하게 싸워왔다는 게 느껴져 존경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힘든 시절을 지났기에 지금 느끼는 행복을 더욱 가치있게 느끼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말솜씨가 없어 잘 표현되진 않지만, 반유행열반인님의 삶을 응원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5-19 07:56   좋아요 3 | URL
볼빨간레몬님, 읽어주셔서, 응원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점점 불행해지기보다 점점 나아지는 쪽이라 다행이지 싶습니다.

새파랑 2021-05-18 23:0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첫 밑줄에 홍어가 눈에 들어오네요. 먹고 싶다는 ㅋ 마지막 문장과 마지막 밑줄에 너무 공감이 되네요~! 행복은 빈도와 경험^^

반유행열반인 2021-05-19 07:58   좋아요 2 | URL
저는 홍어를 아주 좋아하진 않지만 홍어도 과메기도 열심히 도전했던 기억은 나네요. (정작 선호는 두리안과 고수 같은 불호 많은 쪽이라… 조상님 중 동남아시아 출신 있는 듯…) 강도와 소유보다는 그것이라 하네요 ㅎㅎㅎ

Yeagene 2021-05-19 15: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에 황금처럼 반짝이는 말들이 나오네요.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
큰 걸 이루고 큰 사람이 될 생각은 없다는 말도...
열반인님은 자신이 겪었던 많은 일들에 달관하신 듯해요.앞으로는 더 행복할 일들이 많으실 거에요:)

반유행열반인 2021-05-19 15:29   좋아요 0 | URL
나름 과학 교양서인데 쉽게 잘 읽혀서 좋아요ㅋㅋ 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예진님 ㅎㅎㅎ

페크pek0501 2021-05-19 15: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고 나니 반유행열반인 님의 친구가 되고 싶군요. 제가 뭔가 위로가 되는 말을 해 주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어요. 이렇게 슬며시 와서 댓글을 남기고만 가도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울할 때가 있고 외로울 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니까요.

반유행열반인 2021-05-19 16:05   좋아요 1 | URL
페크님 좋은 말씀 위로의 뜻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그런데 지금은 위로 받을 만한 슬픔이나 어려움이 없어요 ㅎㅎㅎ

공쟝쟝 2021-05-31 1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뇌과학. 몸-감정. 무의식-정신분석-꿈. 저도 좋아하는 그리고 저 자신을 다루는데 자주 참고하는 책들이예요. 도파민형 인간과 올리버색스는 한번 읽어봐야것네요!!

반유행열반인 2021-05-31 18:19   좋아요 0 | URL
넴 도파민형 인간은 흥미 위주이긴 한데 재미는 있구요 올리버 색스 박사 책은 신경정신과 관련인데도 왜때문인지 감동이에요ㅋㅋ오랜만이라 넘나 반가운 쟝쟝님!!!!!

공쟝쟝 2021-05-31 18:33   좋아요 1 | URL
오랜만에 밀린 좋아요 누르면서 이웃님들 만나니 좋아요 ㅋㅋ 참 안나카레니나 완독을 축하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5-31 19:06   좋아요 1 | URL
축하해주셔서 감사해요 ㅎㅎ종종 놀러오세요 늘 잘 지내시나 궁금합니다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