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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는 밤 ㅣ 민음의 시 259
김안 지음 / 민음사 / 2019년 8월
평점 :
-20210319 김안.
2014년 아이가 네 살이던 이맘때 봄에, 곁의 사람은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꼭 수영 가르치자. 우리도 배우자.
열한 살이 된 아이는 삼 년째 다니는 수영장에 어제도 다녀와서는 선생님으로부터 실력이 정말 많이 늘었다고 칭찬 들었다고 저녁 내내 기분이 좋았다. 그런 아이를 보는 부모는 아직도 수영을 못하면서도 흐뭇하다.
그렇게, 알아서 살아남고 안도해야 하는 국가는 여전하고, 오히려 해를 거듭할수록 지독해진다. 수영을 할 줄 아는 아이와 따뜻한 방안에서 샷시 문을 이중으로 닫고 안온한 삶만 느낄 줄 안다면 조금 더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바깥으로 나서면 상판 없이 철제 뼈대만 남은 거대한 테이블의 잔해를 차도 위로 천천히 끌며 나아가는, 아마도 고물상을 향해, 손에 쥘 동전 몇 개 운 좋으면 지폐 한두 장 기대하며 남은 삶을 짜내는 중인 건너편 쭈그러진 노인에게 자꾸 눈길이 가고, 철로 된 뼈가 아스팔트에 끌리는 쇠로 된 비명이 귓가에 맴돌고, 그래서 얼마를 받고 밤에는 온몸이 얼마나 쑤시고 고철은 녹아 다음 생에 무얼로 다시 태어날까 궁금한 날들이 자꾸만 생겨서 그런 기억들이 편안한 하루를 덮는다.
불가촉천민이 여덟 번, 파산된 노래가 다섯 번, 가족의 행복이 네 번, 피그말리온이 두 번, 숫자는 대충 세서 다 틀렸을지도 모르지만 같은 제목의 다른 시가 여럿 실려 있었다. 국가와 딸과 말과 뼈와 살과 지옥이 자주 나왔다. 그래서 시집 제목은 아무는 밤이지만 사실 그건 바람일 뿐이고, 밤은 오히려 상처를 더 벌리고 긁고 만져 덧나게 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자꾸 반복되지. 다무는 밤, 저무는 밤, 허무는 밤, 깨무는 밤, 나무는 밤, 애무는 밤, 이런 말장난을 자꾸 하게 되었다.
한 달 시집 하나 읽기는 덕분에 완수했는데 소설을 통 안 본 이 달, 열흘 밖에 안 남았다 ㅋㅋㅋ꼴랑 한 권 봄...한 달에 다섯 권 본다더니 망했다ㅋㅋㅋ
+밑줄 긋기
-세상의 모든 집들마다
감람나무가 심겨 있으니 우리에겐 진리가 불필요할지도
비유를 버리고 선언을 버리고 신념과 엄살
마저 버리고 예언하듯
당신은 자정 넘은 시각 구로역 지붕 아레에 서서
애인을 버리다가 부둥켜안다가
눈발을 맞다가 진창이 되다가 부끄러움이 되다가 비밀이 되다가 돌아오지
않다가 그러니 우리에겐 공동체가 불필요할지도
사소한 우리에겐,
영원히 난해할 것처럼 사사로운 우리에겐 드잡이할
당신만이 필요할지도
인간이란 단어와 사람이란 단어의 간극처럼
눈발이 진창이 되어 딸아이의 새 신발을 더럽히는 것처럼
전향과 변절처럼
옛 애인이 가고 싶어 했던 파타고니아와 눈 퍼붓는 낡은 구로역처럼
우리가 악과 사랑으로 나뒹굴던 날들이
젖과 꿀이 되어 감람나무에 스미더라도 우린 그저
샅과 샅으로 이어진
사사로운 오역의 터널에 불과할지도
진리와 사랑이라 믿어 왔던
멜랑콜리한 오역과 비문에 혹란하며 우리는 우리란
진창이 될지도
나무 위에는 죽어 버린 악기들의 무덤처럼 둥글게 눈이 쌓이고
또 다시 해가 뜨면 젖은 발 꽝꽝 얼어 땅에 박히고
사소한 것만이 영원한 관습이 되듯
창고에 적재되어 있다가 한데 불태워지는
단 한 번도 울려 본 적 없던 악기들의 마음처럼
이토록 사사로운
마음의 잿가루만 폴폴 날리는
(‘우리들의 서정’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