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06 김민정.
한 달에 소설 다섯 권, 시 한 권, 혼자 정한 약속인데 지난 달에 읽은 열일곱 권 중에 시집은 빠뜨렸다. 그래서 김민정의 시집을 빌렸다.
벌써 2년 전이야. 시집 출간 후 제목을 보고 이것이 뭐야, 그때만 해도 시를 읽을 궁리조차 못하던 때라 그냥 특이한 제목이구나 하고 지나갔다. 우리집에 엄마가 사둔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가 그녀의 시집인 것만 알았다. 엄마가 아직도 그 시집을 읽지 않은 건 얼마 전에 알았다.
시집을 읽다 말고 괜히 시인 얼굴이 보고 싶어서 검색을 했다. 사진을 보니 나보다 훨씬 힘이 세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시인의 나이도 보았다. 그러고나서 마지막 시를 읽으니, 시가 44편, 모두 곡두라는 부재에 번호가 차례로 매겨져 있는데, 2019년에 시인이 44살이었으니 44인가봐, 혼자 넘겨짚고 나는 4를 좋아해, 하고 생각했다.
늘 시는 어려운데, 김민정의 산문시들은, 거기 잔뜩 나오는 말장난과 말놀이는 이상하게 쭉쭉 읽혔다. 나는 이런 취향이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시가 흡족하게 읽혔고, 왜때문에 어렵지가 않았다. 이 달에는 시 한 권 약속 지켰다. 헤헤. 지난 달에 안 본 것도 한 권 더 봐야 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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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성포구에 바지락 까 파는 단골 할머니 가게에 들렀는데 할머니 아프다고 오늘 쉰대서 돌아 나오다가 옆 가게 빨랫줄에 집힌 말라가는 박대에 눈이 갔는데 박대 잘 마르라고 거의 꺼져가는 연탄 하나 거기 놓인 것도 봤는데 불현듯 그 연탄 속내 좀 들여다보겠다고 쪼그려 앉았는데 나도 모르게 무릎 구부러질 때 내 입에서 나가는 소리 자…...그 자 대체 뭐니. 돌돌 말린 줄자가 데구루루 구르는데 어제의 내가 그제의 내가 그끄제의 내가 데굴데굴 굴러 나와 나를 빤히 쳐다보는데 미쳐서 지치고 뒤적이니 뒤척이는 나의 기척들아, 안녕. 원한과 원한 바의 구분이 이렇게도 프로답지 못하다는 건 있지, 내 머리가 나빠서고 내 몸이 아파서고 그런데 바둑 기사 헤이자자 7단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 건 말이지, 이름에 자자가 있어서니 뭐 나의 까짐 덕분이랄까. 전문가란 그것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라 할 때 나는 돌아 까짐의 전문가. 삶에 더 삶아져봐야 할까. 산 주꾸미는 어린애 같고 삶은 주꾸미는 늙은이 같은데 둘 다 둘 나름의 맛이 달라 좋지. 초장맛인가. 담낭 떼느라 수술한 그날부터 먹고 싶은 건 초장뿐이라 편의점에서 그 초장 몰래 사다 몰래 짜 먹다 흰색 침대 시트에 빨간 얼룩 물티슈로 지우다가 더 퍼뜨리던 2018년 4월 첫 주와 둘째 주의 일산백병원 621호 병실 창가 자리. 사물함에 두고 온 네모난 아베다 손거울은 누가 가졌을까. 누군가 버렸을 거야. 테두리 까졌거든.
(‘나의 까짐 덕분이랄까-곡두 12’전문. 나도 까진 덕분이랄까 이 시가 좋네. 김민정 언니가 병실에서 담낭 떼고 누워 있다 초장 짜 먹고 흘릴 무렵 나는 병실에서 아기 낳고 있었겠군.)
-가없지 않고 가 있다는 솔직함이 말이 되는 나의 마음. 이 마음. 발 걷고 주방 안으로 들어갔더니 비닐장갑 낀 손으로 닭발 먹다 몰래 뽀뽀하던 중년의 주방장과 홀 담당 아가씨가 있어 아 젓가락은 왜 자꾸 떨어지고 지랄일까 딴청 피우듯 말하는 나의 마음. 이 마음. 다 만나려고 이별하고 또 이별하려고 만나는 것을 끝끝내 알아버린 나의 마음. 이 마음의 쓰기는 끝끝내 말로는 끝이 안 나서 있는 연필 두고 자꾸만 새 연필 사러 가게 만드는 나의 마음. 이 마음.
(‘네 삽이냐? 내 삽이지!-곡두13’중)
-2018년 11월 9일 오늘 진달래나무 카페에서
일러준 생년월일로 사주와 주역을 보았어요.
다 얘기하라 해서 다 얘기합니다.
얘기한 거고요.
마지막으로,
민정 씨는 병진년 윤달생입니다.
윤달은 손 없는 사람들이
그때 무덤도 옮깁니다.
즉 윤달생을 통해 주검이 오가면
탈이 없고 좋습니다.
(‘모르긴 몰라도-곡두 23’ 전문. 나는 갑자년 윤달생입니다. 내 손을 통해 주검이 오가면 탈이 없고 좋습니까.)
-잊으셨겠지만 서로의 집에
데려다주기 바쁜 시절의 연인들.
잊고 싶으시겠지만 서로의 집에서
안 데리고 나가기 바쁜 시절의 연인들.
서로 손을 잡고 잡았다 한들
잴 수 있었을까 서로의 온도를.
서로 등에 업고 업혔다 한들
잴 수 있었을까 서로의 무게를.
(‘저녁녘-곡두34’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