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매일매일 - 빵과 책을 굽는 마음
백수린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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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3 백수린.

월요일 저녁, 직장이 아주 먼 옆 사람이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다. 손에는 케익 상자를 들었다. 기념할 일이 겹치는 날이긴 했는데 생각지 못한 케익에 모두들 즐겁게 촛불을 끄고 나누어 먹었다.
초콜릿이 겉면에 반들반들하게 코팅된 자허토르테. 11년 전 겨울 아직 이십 대일 때 옆사람이 인스부르크의 학회에 참석하게 되어 처음 유럽에 갔었다. 빈에 갔을 때 처음 만든 사람 이름을 딴 케익이라고 가이드북에 소개된 자허토르테를 먹었다. 살구쨈이 발린 초코케익이었는데 지금은 그 맛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께 함께 나눠먹은 케익은, 음, 몽쉘이 참 잘 만든 과자야, 하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맛있는데 그냥 몽쉘 맛이었다ㅋㅋㅋ쨈을 생략하고 초코만 발라놔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마 쨈을 넣었으면 빅파이 맛있지, 했겠지만…
남은 케익 조금 이따가 커피랑 먹어야겠다.

백수린 소설을 좋아한다. ‘여름의 빌라’는 작년에 읽은 소설집 중 손꼽힐 만큼이었고(그런데 연말 목록에 손 안 꼽음…왜...ㅋㅋㅋ),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읽을 때는 짧은 소설 장인이라고 칭찬했다.
그런데 빵과 단과자를 좋아하고, 소설이랑 책도 좋아하지만 이 모든 걸 버무려 쓴 백수린의 첫 산문집은 이상하게도 와 닿지 않았다. 아마도 어느 잡지에 연재한 글을 엮은 것 같은데, 정해진 분량 안에 딱 적당한 이야기 분량과 밀도 있게 예쁜 문장과 온기 같은 걸 각 맞춰 놓긴 했다. 그렇지만 책으로 묶어 놓으니 뭐랄까, 동네마다 있는 파리바게뜨에 늘 있는, 봉지에 담긴 달달하고 부드러운 치즈케이크(라고 이름 붙은 카스테라에 가까운, 납작하고 세로로 길고 모서리가 둥글고 폭신한 그 빵) 여러 개 퍼먹는 느낌이었다. 양산형 빵, 분명 거기 가야 먹을 수 있는 달달하고 위로가 되는 맛이지만, 내가 이걸 먹자고 굳이 여기에...싶은 글의 연속. 차라리 초반의 소설집 ‘참담한 빛’이나 찾아 볼 걸, 읽는 내내 시간이 아까웠다.

소설가가 쓴 산문집에는 유독 인색하고 실망도 많이 한다. 그만큼 소설을 많이 좋아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아주 짧은 글 하나하나가 완성도 있고 따뜻한데다 빛나는 문장도 많다. 다만 내가 삭이기에는 너무 짧고 가볍다 싶었다. 글에 담긴 마음까지 가벼운 건 아닌데, 풀어쓴 게 읽는 일조차 힘들 만큼 삶에 지친 사람 배려해서 일부러 짤막하게 토막내고 압축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내 취향이 아니었다. 막상 이렇게 투덜대 놓고 밑줄 친 글 다시 훑어보니 생각보다 너무 많아서 또 깜짝 놀랐잖아ㅋㅋㅋㅋ표리부동한 나새끼야...

+밑줄 긋기
-행복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상을 괄호 안에 넣어두는 휴가가 삶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것처럼, 인간에게는 때로 진실을 괄호 안에 넣어두는 거짓말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부드러운 모래가 나른한 꿈처럼 펼쳐지고, 뜨거운 태양 아래 올리브가 익는 곳에서의 휴가를 닮은, 미혹으로 가득 찼지만 아름다운 거짓말이. 하지만 여름의 끝을 알리는 폭우마저 그치고 나면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트렁크를 창고 깊숙이 넣어두어야만 한다. 틀림없이 쓸쓸하고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한 일이지만, 계절은 바뀌고, 괄호 안에 넣어두었던 것들과 대면해야 하는 시간은 우리를 어김없이 찾아오니까.

-그런데 이제는 오히려 너무나 명료한 것들이 더 두려울 때가 있다. 이를테면 칼로 벤 자국처럼 선명한 말이나 확신에 찬 주장 같은 것들.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음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이상한 신념들.

-괜찮아, 나에게는 소설이 있어.
소설이 삶을 닮은 것이라면, 한길로 꼿꼿이 가지 못하고 휘청휘청 비틀댄다 해도 뭐 어떤가. 내가 걷는 모든 걸음걸음이 결국엔 소설 쓰기의 일부가 될 텐데. 길 잃고 접어든 더러운 골목에서 맞닥뜨리는, 누군가 허물처럼 벗어놓고 간 쓰레기들과 죽은 쥐마저도 내 빵에 필요한 이스트나 밀가루가 될 텐데. 그러므로 그림자처럼,
한낮의 시간에는 더욱 짙어지는 익숙한 열등감과 수치심이 찾아오면, 이제 나는 그것들을 양지바른 곳에 펼쳐놓고 마르길 기다리며 찬찬히 들여다본다. 오븐의 열기는 하오의 볕처럼 공평하니까 어쩌면 내가 소설을 쓰는 사람인 한, 나에게도 언젠가는 따뜻한 식빵 한 덩이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믿어보면서.

-소설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모르겠고, 나는 매번 백지 앞에서 초심자처럼 두렵고 막막하지만, 한 가지 그래도 지난 시간 동안 바뀐 것이 있다면, 소설을 쓰는 재능에 대한 회의나 의구심이 불쑥불쑥 찾아올 때마다 그것들을 곱게 접어 서랍 한구석에 넣어둘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내 소설이 지닌 효용이나 가치에 대해 묻는 일도 관두기로 했다. 좋은 소설을 나는 어쩌면 끝끝내 쓰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어지러움만 남기고 입속에서 녹아 사라지는 지독한 달콤함처럼, 어떤 아름다움은 고통만을 남기는데도 어째서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걸까.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비밀스러운 영역이 예술의 영역이라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내가 마음을 뺏긴 이유는 이 책의 저자가 인생이 매끄러운 서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저자가 연구를 위해 조사 대상자의 사연을 듣던 도중, 갑자기 죽어버린 늙은 개에 오래도록 마음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좋아졌다. 그러니까 서사가 중단되고 찢겨나가는 그 순간에 주목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음 날 나는 데이트를 마친 후 헤어지던 집 앞 골목에서 간밤에 구운 초코칩 머핀이 담긴 쇼핑백을 건넸다. “집에 가서 열어봐.” 그리고 심야 버스 안에서 쇼핑백을 열어본 후 놀라서 전화를 걸어왔던 나의 어린 연인. “정말 네가 만든 거야? 네가 만들었어?”라고 연거푸 묻더니, “지금 내가 너희 집 앞으로 돌아갈 테니까 잠깐이라도 다시 나오면 안 돼?” 하던 그의 한껏 들떠 있던 목소리.
그 후로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와 연애를 했고, 긴 시간 동안 집 앞 골목에서 헤어질 때마다, 혹시라도 그가 돌아가는 길에 사고를 당해 내 인생에서 사라져버리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두려워지곤 했다.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열정이나 도취를 쉽게 떠올리지만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청춘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한 게 아닐까 가만히 생각해본다. 넘치는 건 젊음뿐, 상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릴 여유는 조금도 갖지 못해 서로를 오독하는 시기를 지나야 우리는 사랑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해볼 수 있는지도 모른다고도. 공고한 ‘나’의 성을 허물고 타인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 마침내 사랑은 그 눈부신 폐허에서 시작할 테니까.

-다다르기를, 정박하기를 기다리며 부유하는 사람. 그것은 틀림없이 쓸쓸한 일이지만 머물기보다는 도착하길 기다리는 우리의 고독은 부드럽다. 드러난 피부를 감싸는 봄날의 대기만큼. 달콤하고. 밤공기를 타고 날아오는 꽃향기만큼.

-“목을 조를까봐서요.” 나는 이 소설을 무척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소녀의 이야기를 다 들은 이후, 아버지가 들려준 대답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한단다.” 그리고 그 대답을 들은 ‘나’는 그제야 불면을 극복하고 다시 일상을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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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1-01-13 11: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잘 읽어놓고 뭔가 헛헛할 때가 있죠. 아마도 쓴 사람의 마음이 머물러 있는 자리를 내가 지나와서거나 비슷하거나 그래서가 아닐까 생각해봤어요. 여름의 빌라 궁금해요!

반유행열반인 2021-01-13 11:39   좋아요 4 | URL
뭔가 좋은 문장 작정하고 그러모아 글 한편한편에 다 때려넣고 꼭 마지막에 몇 줄로 꾹 눌러서 번쩍뻔쩍 칠해놔서 아이씨 왜 이렇게 교훈적이야...그런데 밑줄 치고...교훈 싫어함 ㅋㅋㅋ작위적 따뜻함도 싫어함ㅋㅋㅋ오랜만에 까까까리뷰 쓰네요...백수린 좋대면서 모질다 나...여름의 빌라 좋았어요. 전작들 읽고 읽으니 점점 나아져서 포텐 팡 터지는 느낌 들었어요. 백수린 딱 한 권 읽으라면 그거요ㅋㅋㅋ

hnine 2021-01-13 12: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백수린 소설 좋아하면서 산문집 읽기는 미뤄두고 있는 심리가 바로 이런건가봐요.
자허 토르테가 사람 이름에서 붙여진 이름이었군요.

반유행열반인 2021-01-13 12:13   좋아요 2 | URL
저처럼 한 번에 우루루 읽지 않고 다른 책 읽으며 한 편씩 쉬엄쉬엄 읽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어요. 하긴 초코케익 한 통 다 퍼먹는 게 미련한 일이지...한 조각씩 한 입씩 먹어야지...제가 잘못했네요 ㅋㅋㅋㅋ

2021-01-13 1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13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Yeagene 2021-01-13 23: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간의 궤적>,작년에 올해의 단편소설로 뽑을만큼 무척 좋아서 <참담한 빛>을 읽어봤는데 전 기대가 커서인지 그저 그랬어요^^;;
<여름의 빌라>나<오늘밤은 사라지지 말아요>중에 하나 읽어볼까 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1-13 23:51   좋아요 2 | URL
네 저는 참담한 빛 다음의 폴링인폴을 제일 처음 읽고 말씀하신 뒤에 두 개를 읽어서 그런가 둘다 좋았어요. 누군가 점점 나은 글 쓰는 거 보는 일 흐뭇해요. (반대로 좋아하던 작가가 후져지면 마냥 슬픔...ㅋㅋㅋ)

syo 2021-01-15 01: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뭔가 구성이 정형적이어서, 짜 놓은 틀에 내용이랑 먹을 거리만 바꿔넣는다는 느낌이 있죠? 한 꼭지만 읽으면 와 좋아 이렇게 되는데 한 권을 다 읽으면 그 틀이 더 크게 느껴지면서 어쩐지 멀어지긴 하더라구요 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1-01-15 09:30   좋아요 2 | URL
소설 잘 쓰는 사람이랑 에세이 잘 쓰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아요. 에세이스트 중에 소설가 되고 싶은 사람은 많이 봤는데 된 사람도 못 꼽겠고 ㅋㅋ

붕붕툐툐 2021-01-17 01: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백수린 작가 좋아하는데, 제가 읽은 건 다 초기작이군요!!(좋아하는 거 맞겠죠?ㅋ) 소개해 주신 소설집 읽어봐야겠어요!!

반유행열반인 2021-01-17 09:22   좋아요 1 | URL
네 처음부터 좋아하셨으면 요즘 책들 보시면 뿌듯하실 거에요 이렇게 컸군 하고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