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도어
서보 머그더 지음, 김보국 옮김 / 프시케의숲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10104 서보 머그더.

새벽에 눈이 내린 날이었다. 아침까지 추웠고 출근길이 미끄러울까 걱정이 되었다. 바깥으로 나섰을 때 걱정과 달리 내 발이 닫는 곳마다 비로 그린 지그재그 무늬로 눈이 쓸려 있었다. 길이 아닌 화단, 나무, 세워둔 차 위는 아직도 새하얬다. 단지 안은 경비 아저씨들이 부지런히 쓸었겠지만, 밖으로 나가는 육교는 내린 눈이 얼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가로지르는 육교 위, 그리고 건너편 내려가는 계단까지 눈이 모두 치워져있었다.
누군지 모를 눈을 치워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 차는 아침이었다. 문득 나는 나중에 할 일이 없어지면 집 주변의 눈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며칠 지나고 보니 왜 나중에인가, 싶었다. 지금 하지 않으면 결국 잊어버리고 나중에도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할 것 같다. 감사와 따뜻함에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가, 결국 나중으로 미루는 나는 비겁하고 나약하다.

눈이 오고 얼마 후 이 책을 읽으며 책 속 공동주택 관리인이자 화자의 집안일을 돕는 에메렌츠가 밤이든 새벽이든 이웃의 눈을 쓸어주는 장면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볼 뿐 한 번도 빗자루 들고 함께 눈을 쓸지 않은 화자의 모습은, 나를 닮았다. 읽는 내내 작가인 화자가 굉장히 꼴보기 싫었는데 그 이유를 뒤늦게 알았다. 제일 나쁜 부분들만 나 같아서 그랬다. 에메렌츠에게 오롯이 기대고 있지만, 그에 대해 궁금하지만 직접 다가서고 묻는 대신 뒷문이나 옆문을 곁눈질하고, 자신과 생각이 다른 그를 자기 방식대로 책을 읽게 만들려고 시도하거나, 텔레비전 볼 시간도 없는데 텔레비전 선물하면 좋아할 거라고 믿거나, 교회에 함께 나갔으면 하고 바라고, 그의 호의와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그를 받아들이는 대신 화를 내고 삐지고 의심한다. 으으으, 그게 다 나였어ㅋㅋㅋㅋ
한편, 권위와 권력과 종교와 남의 도움을 거부하고 혼자 서겠다고 고집부리는 에메렌츠의 개샹마웨 하는 반골 기질을 보며 저것도 또 나야ㅋㅋㅋ했다. 다만 에메렌츠는 자기 자신만 일으키고 챙기는 대신, 온 마을 온 세상 어려운 사람을 다 돌보는 이였다. 한 명이 한다고 믿기지 않을 에너지와 체력, 거의 고행과 극기에 가까운 일에 대한 집요함. 그런 모습은 사실 익숙해서 더 슬펐다. 돌아가신 할머니, 구십이 훌쩍 넘은 외할머니, 우리 엄마가 그랬지. 지금도 그렇지. 여럿의 삶을 유지하고 생활을 쾌적하게 하기 위해 끝없이 음식을 만들고 청소하고 쓰레기를 치우고 아픈 이를 돌보았지. 그런데도 철딱서니 없는 자손들은 그들을 비참한 순간에 내버려두고 유다처럼 배신 때리고 아픈 말을 쏟아 놓곤 했다. 새삼 너무 슬프고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

이 책의 존재는 알았었는데 읽을 마음은 없었다. 그러다가 읽게 된 건 오은이 진행한 황정은 작가 인터뷰를 우연히 본 이후였다. 황정은 작가가 지난 해 읽은 책 두 권을 꼽았는데 하나는 이주혜의 ‘자두’, 또 하나는 바로 이 책이었다. 읽고나서 일 년에 한 두 번 하던 육식마저 끊었다고 해서 작가가 그런 마음을 먹게 만든 부분이 정말 궁금했다. 짐작컨대 비올라에 얽힌 에메렌츠의 어린 시절 이야기일 것 같다. 인상적이고 잔혹하고 슬픈 삽화이긴 했지만 나는 그 정도로 큰 마음을 먹지는 않았다. 같은 책을 읽어도 누군가는 그렇게 결심하고 달라지는데, 그만큼 섬세한 감수성이 있는데, 나는 아직 멀었다.

작가인 화자에게 에메렌츠는 그의 작업과 예술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듯 하면서도 거짓된 무언가, 그 무용함에 대해 뼈 때리는 말을 자주 남긴다. 에메렌츠가 돌봐주지 않으면 작가는 생활을 유지할 수도, 창작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도 없다.
고용주와 고용인 관계에 대해 생각하면, 에메렌츠가 완전 을이 아니라 자기 주관과 의지를 가지고, 제 고집대로 일하는 것처럼 작가가 상황을 디테일하게 설명하고 묘사하려고 애쓰고는 있지만, 관계와 신분의 한계 같은 게 느껴졌다. 결국 화자가 에메렌츠로부터 불편하고 무례하게 느끼는 부분은 에메렌츠가 자기 생활에 훅 들어오는 것에 대한 불쾌감도 있겠지만, 가사일을 명한 자와 돈을 받고 그 일을 행하는 자 사이의 상하 관계가 개입되는 부분도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존에 읽었던 공지영의 ‘봉순이 언니’나 손보미의 ‘가정 교사’ 같은 글도 읽는 중에 조금씩 생각났다. 결국 먹물들은 손에 물 묻히고 몸 쓰는 위치보다는 누군가의 육체적 조력에 기대는 입장인 경우가 많고, 그래서 화자도 그렇게 고용주 입장에 서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일해주는 사람에게 기대고, 그가 안쓰럽고, 고맙고, 그래도 친밀하게 느껴지고, 고용인을 대리 엄마처럼 여기게 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에메렌츠의 입장에서 글을 풀어갔다면 화자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진행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하고 다정한 순간도 있겠지만 결국은 남이지. 소모되고 착취되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내패대기치고 자기 가족들끼리만 뭉치는 거지. 흠 이건 너무 나갔을까. 엄마가 몇 년 간 남의 아기 보는 일을 하셨었는데 오래 좋은 분들 아이를 돌봤지만 계약이 끝나면 결국 남이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시니컬한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런 관점이라 그런지 일하는 사람의 위치에서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던 루시아 벌린의 ‘청소부 매뉴얼’의 등장은 진짜 반가웠다. 정신 없이 바삐 일하는 사람들에게 짐을 더 지게 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그래도 일하는 사람들이 쓰는 글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누구나 한 60살 까지는 일하다가 남은 생애는 자기가 일하던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 써서 건네는 것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되면 가능할까. 꿈도 크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yo 2021-01-04 09:5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새해벽두부터 한층 더 따뜻하고 멋진 리뷰로 치고 나가시는 반님, 올해의 반님은 더 크고 더 많이 사랑받겠다 싶어요^-^

반유행열반인 2021-01-04 09:54   좋아요 3 | URL
변변찮은데 좋게 봐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ㅋㅋㅋ

파이버 2021-01-04 14: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반유행열반인님께서 사시는 동네에는 눈이 내렸었군요. 따뜻한 아랫지방에 살때는 눈이 쌓이지 않아 몰랐는데 윗지방으로 올라오니 눈을 제때 쓸지 않으면 빙판길이 되어버리더라구요… 미처 생각치 못했는데 저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겠습니다ㅜㅜ

반유행열반인 2021-01-04 14:37   좋아요 3 | URL
앗 저 눈 온 날은 12월 20며칠 쯤이었어요 ㅋㅋ안 그래도 첫 문장 쓰면서 오늘 눈 온 걸로 혼동드릴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멀었네요 전 ㅋㅋ 따뜻한 눈 안 오는 동네에 살아보는 것도 제 소망 중 하나입니다 ㅎㅎㅎ

파이버 2021-01-04 14:47   좋아요 2 | URL
아닙니다 제가 잘못 읽었어요ㅎㅎㅎ 이번 주말 눈은 오지 않았어도 엄청 춥더라고요ㅜㅜ 항상 건강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1-04 17:51   좋아요 2 | URL
파이버님도 추위 잘 이겨내시고 건강 조심하세요!!!

하나 2021-01-04 17: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예전에 가게할 때 오지랖 넓게 골목까지 다 눈치우는 사람이었는데요. 앞집 쌀집 할아버지가 삼십년 장사하면서 눈 치우는 건 저 아가씨밖에 못 봤다고 하니까 이상하게 하기 싫어져서 이거는 병이닼ㅋㅋㅋ 이런 기억이 나네요. 새해에는 끝까지 착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1-04 17:50   좋아요 2 | URL
하나님은 이미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었’구나 ㅋㅋㅋ 착해야 할 때만 착한 사람 되어주세요! 예를 들어 저한테나 ㅋㅋㅋ

공쟝쟝 2021-01-06 2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이 책 읽다 말았어요!!!! 띠지에 나온 부분이 인상적이어서 집어 들었던 듯?? 근데 재밌었는 데, 왜 읽다 말았지? 다시 읽어야지~~ 전 에메렌츠가 정말 좋았는데!! (뭔가 받은만큼 돌려주는 본인만의 견고한 선??) 반님같다니 ㅋㅋㅋ 반가워요~~!!

반유행열반인 2021-01-06 22:29   좋아요 2 | URL
저도 에메렌츠 좋은데, 거쳐온 어려움 굴곡 이런 걸 관찰자이자 화자인 작가 아줌마가 호들갑 떨고 놀라워하고 그런 관점이 좀 짜증나더라구요 ㅋㅋㅋ 되게 귀족주의적이라 해야 되나 뭐라해야 하나 먹물이 반인텔리 노동자 보면서 삐지다 경탄하다 하는 구성은 늘 애매하게 읽혀요 ㅋㅋㅋ

공쟝쟝 2021-01-06 22:30   좋아요 2 | URL
맞아요 ㅋㅋㅋ 화자가 짜증나서 읽다 만거 같아 ㅋㅋㅋㅋ 에메렌츠한테 가서 저 아줌마랑 놀지마 퉷퉷 하고 싶었엌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1-06 22:32   좋아요 2 | URL
근데 그게 설마 작가가 의도한 읽기라면 되게 자기비하 자기디스 쩔고 치밀한 구성 아닐까 싶더라구요 ㅋㅋㅋ얘 이거 일부러 이렇게 쓴 거야? 아님 진심이야? 이러고 되게 헷갈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