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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 잡년 - 자유로운 사랑에 대한 실용지침서
재닛 하디.도씨 이스턴 지음, 금경숙.곽규환 옮김 / 해피북미디어 / 2020년 5월
평점 :
-20201218 재닛 하디, 도씨 이스턴.
연초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이 여름에 개봉한다는 광고를 보았다. 코로나19 덕에 극장에 가려던 계획은 번번히 무산되었다. 결국 오늘 옆의 사람이 VOD서비스에서 구매해줘서 함께 테넷을 보았다. 거꾸로 해도 테넷, 똑바로 해도 테넷. 텔넷 인터넷 네트 이런 게 생각나는 제목이었다.
영화는 훌륭했다. 얼마나 훌륭하냐면 세 살 짜리가 좋아하는 경찰차, 구급차, 소방차, 트레일러, 헬기, 배 같은 게 전부 등장해 애기는 자기가 아는 탈 것의 이름을 열심히 불러댔다. 불이야! 같은 것도 외치고. 열 살 짜리도 나름의 이해력을 발휘해 이것저것 떠들어대고 물어가며 흥미로워했다. 세 살 부터 곧 마흔인 사람까지 같이 모여 볼 만한 영화가 얼마나 되겠어. 더구나 모든 걸 비틀어보고 의심하고 거꾸로 보는 반골에게 딱인 영화였다. 하, 주인공 키 작은 유색 인종 남자로 한 것 봐. 여자랑 어린이는 건드리지 마시죠! 일어날 일은 일어나지만 우리가 노력하면 바뀔지도 몰라, 는 뻥.
인터스텔라에서 천체 사이가 아무리 멀어도, 블랙홀을 뚫고 가야 내 생애 안에 겨우 닿을까 말까 한 사이라도, 사랑하니까 나는 간다, 만나러 간다 했다면, 테넷에서는 어쩌면 나란 존재 여기에도 저기에도 있을 수 있고, 그렇게 누군가를 구할 수도 있고, 내가 망하면 아마 미래의 내가 다시 돌아와 고쳐 놓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어차피 여기의 내가 죽어도 또다른 내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고, 동시에 또는 다르게 명멸하는 존재가 나라면 아이참 많은 일이 잘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런 세계관을 상상하는 것은 겁나 희망적이고 낙천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여기저기에 존재하려면 겁나 바쁘고 정신 없겠구나 싶기도…
이 책 읽기는 호기심과 경계가 나름 넓다 하는 나에게도 도전이었다. 일단 두께가 두껍다. 책을 처음 받았을 때 노끈으로 맨 자국에 표지가 조금 훼손되고 속표지도 어디 습기 먹은 거 마냥 쭈글대서 같이 산 중고책보다 상태가 안 좋아 조금 빈정 상했다. 읽다 보면 발견되는 오타들도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런 급진적인 책을 번역하고 출간한 출판사의 시도는 높이 사고 싶었다. 가끔 근본주의자들이 스스로 급진주의로 칭하면서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타도하려는 시도를 하는 걸 보면 어이가 없다. 급진은 이만큼 액셀 밟는 걸 말하는 거 아닐까…
다양한 성소수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게 오래되지 않았다. 이 책은 그중에서도 다자연애, 비모노가미, 폴리아모리에 대해 다룬다. 저자 중 한 명은 일흔이 넘었고, 두 저자는 같이 산 적은 없지만 연구 동료이자 연인이자 친구로 오랜 세월을 함께 해 왔다. 자신들과 주변 사람들의 수많은 사랑과 연애와 성생활의 미담과 실패담과 시행착오와 경험적, 실천적 지식을 사례와 함께 나눈다.
Slut을 번역한 잡년,은 우리나라에서 다수의 사람과 성경험을 한, 주로 여성을 지칭하는 걸레라는 말처럼 가치판단과 비하가 담긴 용어이다. 그 말로 지칭되던 이들은 게이나 퀴어가 그랬던 것처럼 오히려 그 용어를 받아들여 긍정의 의미로 역전하는 시도를 한다. 잡년, 걸레라는 말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문란함, 무책임함, 더러움, 무규칙, 질병의 온상 같은 이미지와 달리 다자 연애를 지속 가능하게 실천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지식과 마음의 준비와 예의 범절과 책임감과 계획과 합의와 고민이 필요하다. 이 책을 읽으면 그런 고민을 끝없이 주고 받는 관계와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질투를 이해하고 다스리는 법, 안전하고 더 즐거운 성생활을 하기 위한 지침과 팁 같은 것은 모노아모리를 고수하거나 이성애자, 동성애자 상관 없이 도움을 받을 만한 부분으로 읽혔다. 항상 스스로를 너무 미워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을 강조한다. 비슷한 책들을 읽을 때마다 접하는 이야기였다. 나를 사랑할 줄 알아야 남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건 당연한 이야기인데도 나에게는 오래도록 어려운 일이었다. 아주 조금이나마 나를 그렇게까지 미워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하고 이상하고 달라보이는 삶도 생각보다 유서가 깊었다. 결국 삶이라는 건 끝없는 자기합리화의 과정일 뿐일지도 모르지. 합리화해도 너무 창피할 정도가 아닌 정도로만 살면 되지 않을까, 완전무결한 흠 없는 삶은 환상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내용은 큰 무리 없이 받아들이고 읽을만 했는데, 책 후반부의 그룹섹스나 난교파티 참여 요령 같은 건 조금 많이 어려웠다 ㅋㅋㅋ아 나도 선이 없는 놈은 아니구나...심리적 장벽 느꼈어...무서워…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들’에서 7-80년대 프랑스에서 파르투제?하다가 실려가는 여친 나오는 장면 봐서 좀 충격받은 게 있는 것 같다. 몇 년 전 언론에서 소라넷이니 초대남이니 하면서 스와핑이나 갱뱅 같은 거 이루어지는 거 엄청 무섭게 까는 거 봐서 흠, 과연 저런 상황이 동의와 합의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저것도 또다른 방식의 성매매와 성착취 아닐까 싶었는데. 저자들은 교양 갖추고 철저한 규칙과 위생 지침을 바탕으로 강압적인 놈은 알아서 퇴출시키는 안전한 상황의 단체 친교?도 가능한 것처럼 소개하지만. 이부분은 흠좀무였다…
나는 그저 누구도 최대한 아프거나 다치지 않고 더 큰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랄 뿐. 그런 다양성을 말하는 다양한 삶의 방식을 그린 책을 조금씩 읽고 있을 뿐이다. 당장 뭘 하겠다는 게 아니고…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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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잘하라. 사랑의 핵심은 누군가의 아름다움과 강인함과 미덕에 대한 사랑이 아님을 기억하길. 오히려 누군가가 우리의 나약함, 우둔함, 초라함 앞에서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는 모습이다. 이 무조건적인 사랑이 우리가 연인들에게 갈망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 기대하는 것이다.(217)
-”그는 나의 감정을 용인한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원하는 모든 걸 말한다. 사실, 그가 내 이야기를 북돋우는 셈이다. 나는 모든 것을 말하는 것, 질투와 슬픔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것들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감정들은 내 연인에게서 어떤 저항도 받지 않아서 힘을 상실한다. 그는 그 감정들을 그저 들어주고 가만히 놔둔다.”(219)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운 마음에 대한 해결책 하나는 누군가를 사랑하면 얼마나 기분 좋은지 떠올리는 것이다.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기분이 좋아지고 싶다면 누군가를 사랑하라.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231)
-몸, 욕망, 섹스를 더럽고 나쁘다고 가르쳤던 그 믿음 때문에 성적 자존감을 개발하는 게 매우 어렵다.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경험을 어떻게 할 수 있기 한참 전인 청소년기를 성욕, 성적 판타지, 자위 행위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보낸 시간이 많다. 많은 이들이 타인과 접속할 때 자신의 수행 능력에 집착하며 시간을 보낸다. 혹 잘못하는 건 아닌지 걱정하느라 바쁘다. 이게 얼마나 좋은 느낌인지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우리의 욕망과 환상이 이성애자와의 모노가미 결혼을 넘어 뻗어나갈 때, 우리는 자기 수용에 관한 추가 공격에 시달린다. 일부 사람에게 우리는 섹스에 미친 변태이자 경멸의 대상이다. 타인의 눈에, 그리고 우리 자신의 눈에 아주 많이 그렇다. 신조차 우리를 미워할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때문에 기분이 나쁜 나머지 자신을 그저 숨기고 싶어진다면, 섹슈얼리티의 풍부함을 흠씬 느끼기 어렵다.(356)
-요리에서부터 테니스와 천체 물리학에 이르기까지, 뭐든 능숙해지고 싶다면 시간과 노력을 들여 그 방법을 배워야 한다. (3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