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05 필립 로스. 대부분 끝을 먼저 생각하며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지는 않는다. 직업이든 예술이든 자아실현이든 성취의 정점에서 추락을 예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필멸자인 인간, 늙음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 거기에 속한 나와 당신은 언젠가 무릎과 허리와 이와 눈이 약해지는 날이 온다. 빛나던 재능이 무르익고 숙성되어 죽는 날까지 존경 받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퇴물이 되어 밀려나고 더이상 누구도 우리를 찾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렇게 쇠락하고 기우는 시기에 나보다 이십 오년은 더 살 것 같은 누군가가 찾아온다면. 그의 탄생과 젖 빠는 모습을 보았고, 당장은 내 곁에 머문다고 해도 어느 날 바람 한 번 훅 불면 또 멀리 날아갈 것 같은 당신이 나타난다면. 그때 내미는 그 손을 나는 마다할 수 있을까? 떠나가는 날 울지 않고 붙들지 않을 수 있을까? 혼자 남아 다시 기울다 못해 나락으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몸뚱아리에 총알이든 약이든 21층 아래 바닥이든 뭐든 박아 넣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그래도 말야. 그런 비탈길에서 구르다 하트 모양의 치명적인 돌부리에 걸려 대롱대롱 잠시 머무르며 희망을 가지다 다시 죽 미끄러지는 노인네 이야기를 그 노인네보다 열 살은 더 먹은 필립 로스 할아버지는 썼단 말이지. 그리고 그 망한 노인네도 마지막 순간에는 한참 하지 못했던 연기를 하면서 방아쇠를 당길 용기를 냈단 말이지. 그러니까 죽는 순간까지는 살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