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안 느끼한 산문집 - 밤과 개와 술과 키스를 씀
강이슬 지음 / 웨일북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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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4 강이슬.

7월에는 소설 읽을 거라며! 또 에세이 빌렸어. 6월에 예약한 게 자동으로 빌려져서 어쩔 수 없었어…

내내 운동화만 신던 발에 발등이 드러나는 여름 신발을 꺼내 신었다. 작년 여름에도 재작년 여름에도 신던 크록스 재질 신인데, 삼십 분 쯤 걸어서 출근하니 발뒷꿈치가 다 까졌다. 엄지발가락 옆 튀어나온 뼈 부분이랑 새끼발가락에도 물집이 잡혔다. 예쁘지도 않은 걸 편할 거라 생각하고 자꾸 고무신을 사 모았는데 내 발은 말랑한 고무신에도 복숭아껍질처럼 막 벗겨진다. 멘탈만큼 약한 내 피부.
스무 살 여름 이맘쯤에도 새로 산 슬링백을 신고 우리 학교에 놀러온 아이를 데리고 경사 심한 교정을 걷다 발뒤꿈치가 칼에 벤 것처럼 너덜너덜해졌다. 아이는 후생관 신발 가게에서 내게 못생기고 발은 편한 남색 슬리퍼를 사줬다. 나중에 화장실 슬리퍼로 썼지. 아무튼 챙겨주는 모습이 퍽 다정하게 느껴져서, 한 달 후쯤 사귀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성인 되고 첫 연애였어! 그러나 겨우 두 달 만나는 동안 그 아이는 충남에 있는 대학 앞 하숙집에서 이 학교 너무 싫어, 부모 몰래 휴학하고 공무원 시험이나 준비하게 먹여살려줄래? 하고 문자로 징징대기 바빴고, 나는 그런 아이한테 나는 네 엄마가 아니니까 그만 징징대고 네 문제는 네가 알아서 할래? 하다가도 아냐아냐 내가 먹여살릴게, 그러니까 전화기 끄고 술먹느라 잠수타지 말고 제발 연락좀 자주 해줘 징징징 하다가 찬 바람 불 무렵 문자로 안녕. 하고 말았다.
그러고나서 스물 한 살에 지금 옆에 있는 사람 만났으니 내 연애경험이란 거의 없는 거나 다름 없고, 짝사랑만 한 가득이었다. 이런 사람 뭐라고 부르던데...연애고자였나…

왠 연애타령이냐면 나보다 싱싱하고 젊은 이십 대 청춘 방송작가인 저자도 망한 연애와 짝사랑 이야기를 한바탕 늘어놓길래 생각이 났다. 요즘은 자꾸만 지난 일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생각이 나면 적어두어야 한다. 기억력이 너무 좋아 힘들다고 하던 시절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나는 점점 멍청이가 되어간다. 망각은 축복인데 뭘 잊었는지도 모르는 삶은 또 슬픈 것 같다.
온갖 섹드립이 난무하며 피실피실하는 웃음 주던 SNL를 이런 사람들이 살을 갈고 피땀눈물 짜서 만들었구나 그와중에 무너져가는 허름한 옥탑방에서 겨우 잠을 자고 먹고 사랑하고 차이고 그런 이야기를 백지에 적으며 버텨왔구나 하면서 짠하게 읽었다.
이십 대로 다시 돌아갈 거냐고 물으면 절대 안 가, 할 것이다. 돈도 없고 우울증 심하고 꼰대들은 네가 젊으니까 일을 더 하라고 대놓고 떠맡기고 곁에 있든 없든 사랑은 불안정하고 애를 낳겠다니까 아직은 돈도 기반도 없으니 나중으로 미루라는 소리나 듣고. 그러니까 으르신들은 젊은이들을 보며 그때가 좋은 거야, 젊음은 돈 주고도 살 수 없어, 하고 그짓말 좀 안 했으면 좋겠다. 돈이 있으면 젊음을 왜 사 테헤란로에 빌딩을 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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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07-04 08: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발이 잘까져지는 사람이라 한여름에는 샌들 양말을 신는 패션테러리스트가 됩니다... 마지막 테헤란로의 빌딩에서 피식했어요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0-07-04 08:58   좋아요 2 | URL
이건 원문 출처가 따로 있어요 ㅎㅎㅎ각주 표기라도 하고 싶은데 못했네요...

수이 2020-07-04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테헤란로는 바라지도 않고 서울 저기 촌구석에 일곱 평짜리 허물어져가는 이층짜리 건물이라도...... 근데 반유열님 연애고자였다니 반전이다. 내가 다 아쉽네. 근데 부제 마음에 드네요. 밤과 개와 술과 키스를 씀.... 이라니. 모두 다 좋아하는 어휘들인데.

반유행열반인 2020-07-04 09:51   좋아요 0 | URL
저렇게 관능적인 단어는 다 열거해놓고 온갖 궁상 다 떨면서 웃기고 울리는 걸 보면...작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봐 싶기도 해요.

반유행열반인 2020-07-04 09:52   좋아요 0 | URL
서울 저기 촌구석 일곱평 이층 건물 모두 병렬될 수 없는 단어인 거 아시죠? 서울-과 건물-로 이미 금테 아니 금가루 도금 입히고 환상 속 무언가가 된다는..,

수이 2020-07-04 10:17   좋아요 1 | URL
근데 밤과 개와 술과 키스라는 단어들에 더 이상 흔들리기 어려운 갱년기..... 서울 저기 촌구석 일곱평 이층 건물_ 우리 동네에 있는데......

반유행열반인 2020-07-04 11:28   좋아요 0 | URL
그런 공간의 존재 자체 부정이 아니고요 그런 걸 소유하는 일은 환타지가 맞는데...설마 수연님 환상 속의 그대 아니시죠...

수이 2020-07-04 12:08   좋아요 1 | URL
아 부끄러버.......

syo 2020-07-04 1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모아놓은 동전을 전부 탕진하여 테헤란로 빌딩의 꿈이 저만큼 도망갔습니다....

저도 이 책 읽어봤지만, 반님도 강이슬 선생님 못지 않게 쓰신다니까요.

반유행열반인 2020-07-04 13:17   좋아요 0 | URL
코노도 못 가는 시절이니 다시 차곡차곡 모으면,,,무얼 살 수 있을까요.
한 십 년쯤 더 쓰면 syo님이나 강이슬님이나 이슬아님의 발목 만큼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직은 무리무리.

바다그리기 2020-07-19 1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과 부제(?)부터 읽고픈 의욕을 마구 샘솟게 하네요. 재미있게 잘 읽다가 역시나 마지막 문장에서 또 감탄을.. ㅋㅋㅋ 그르게요 주님 위에 건물주인 세상에서^^ 사이다 잘 마시고 갑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7-19 13:31   좋아요 1 | URL
저도 이웃님 인용과 책 소개 읽고 뽐뿌와서 봤어요. 마지막 문장은 제 것이 아니랍니다...사이다 병 하나 가지고 막 입대고 돌려 먹는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