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제를 처음 접한 것은 복학한지 얼마안된 대학 시절이었고, 소설이 아니라 시집이었다. 그것도 자의가 아닌 친구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서였다. 여행을 앞둔 친구가 찾아왔었다. 그는 시집 한권을 들고 있었고, 나는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음반(엄밀히 말하면 테이프)에 빠져있어서 늘 귀에 이어폰을 끼고 다녔었다. 그 친구는 여행 중에 듣기좋겠다며 나의 테이프를 원했고, 내 것에 집착이 많은 나는 줄 수 없다고 했다. 결국 그의 절충안을 받아들여 나는 그의 시집을, 그는 나의 테이프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 때의 그 시집이 성석제의 시집이었다. 사실 큰 감흥이 없었는지 나에게 뚜렷한 인상을 심어주지는 못한 것 같다. 아니면 내가 기억력의 급속한 감소로 기억을 못하던가(기억력의 감소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좋아했던 음반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나, 요즘 저지르는 나의 행적들을 살펴볼때)

 어째뜬 나는 요즘 성석제의 소설들을 주섬주섬 읽고 있다. 몇 년전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는 소설집을 읽은 이후로 성석제하면 재이있다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래서 즐거움에 대한 기대로 성석제의 소설에  자꾸 손이 간다. 물론 성석제의 소설이 단순한 재미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재미있게 읽히면서도 삶이 가진 두터운 무게들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것이 그의 장점일 것이다.

최근 '홀림'을 읽고, 이어서 바로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다. 작가란 글을 쓰기위해서 많은 준비를 해야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또한번 느꼈다. 특히 두 권 모두에 들어있는 도박에 대한 이야기들을 종합해 볼때 많은 경험과 준비의 소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홀림의 '협죽도 그늘 아래서'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서는 우리 사회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힘없는 개인의 한맺힌 삶이 주는 무게감과 그 속에서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가 맞다아있어서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그러나 '황만근'에 수록되어 있는 몇 편의 단편에서는 단지 술자리에서 펼쳐지는 재미있는 입담을 옮겨적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 남자의 과장된 듯한 연애 경험이나 자아도취적 특성을 보여주는 부분에서는 그런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그의 말솜씨(아니 글솜씨)는 그러한 부족함을 쉽게 넘길 수 있도록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정말 대단하다. 절대 지루하지 않고 그 이야기 속에 푹 빠지게 하는 그의 문장들은 그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성석제를 다시 찾아보게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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