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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나는 고백한다 1~3 - 전3권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자우메 카브레 지음, 권가람 옮김 / 민음사 / 2020년 11월
평점 :
조용히 살고 싶은데 도대체가 말야, 할 일도 많고 약속도 왜 그리 많은지 원. 연말도 아직 멀었는데 거참 평안한 날이 많지가 않다. 그래도 바쁘게 지내서 좋은 점은 현재를 알차게 살고 있단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요즘의 나는 어떤 계기로 각성하여 더 이상 과거의 아픔과 미련과 후회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한평생의 과제가 해결된 지금에야 비로소 번데기를 탈피한 나비가 된 기분이다. 구름 위를 떠다니는 이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질 못했으니, 고것은 묻지마 범죄같이 기원을 알 수 없는 복잡하고도 난해한 카탈루냐의 어느 고전 작품 때문이렸다. 한때나마 반짝 떠들썩했었던, 이름하야 <나는 고백한다>가 되시겠다. 털썩.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인이 쓴 회고록이라는 설정으로, 다소 두서없는 전개가 내내 반복되니 집중을 잘 해야 한다. 물론 나님은 반쯤 내려놓고 읽었으므로, 이번 글은 읽었다는 데에 의의를 둘 생각이다. 이 작품은 한 개인의 일대기뿐만 아니라 16~17세기 스페인의 역사와 미술, 음악, 철학, 종교, 언어, 문학 등 온갖 분야를 넘나든다. 또한 예고 없는 장면전환과 설명 부실한 등장인물도 워낙 많아서 나처럼 가방끈 짧은 독자들은 애먹을 것으로 예상되오니 부디 건투를 빈다. 전에도 말했지만 분량의 압박이 심한 작품에는 꼭 없어도 그만인 구간들이 넘쳐나는데, <나는 고백한다> 역시 예외는 없었다. 어느 정도는 병든 노인에게 주어진 핸디캡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온갖 테마를 다루면서 발견해낸 악의 근원 치고는 뭔가 김빠진 콜라였단 말씀. 한마디로 과했다는 겁니다, 예.
출판사의 소개 글은, 골동품 거래상인 부친이 구해온 바이올린과 얽힌 사건 사고와 함께, 그 계보를 거슬러 악의 역사를 살펴본다는 식으로 나와있다. 그러나 막상 읽어보면 바이올린을 중점적으로 흘러가는 서사가 아니었다. 주인공 아드리아는 어려서부터 부친의 강압에 따라 여러 언어 공부와 바이올린 연습을 해야 했다. 총명했던 소년은 언어학에 재미를 느끼는 반면, 악기 연주는 점점 흥미를 잃어간다. 그러다 부친의 죽음이 그 바이올린 때문임을 알게 된 아드리아는 그 악기의 배경과 역사를 알아내어 독자들에게 설명한다. 그 악기의 마지막 주인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간 유대인 가족 중 하나였고, 나치 장교들이 악기의 소유권을 두고 피를 묻혔다던 비극마저 드러난다.
어쨌거나 흐름은 바이올린의 장인이 저지른 살인죄가 악기에 저주라도 씐 듯, 세대와 주자를 거듭해서 악이 계승된다는 식으로 몰아가는데, 솔직히 악기를 거쳐간 사람들이 다 저주에 걸리고 악에 물든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악기 자체가 문제인 것도 아니니, 이 추상적인 악의 근원에게 접근하려면 관점을 좀 달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다가 2권에서 주인공의 공상 친구인 보안관이 말하길, 아픈 이들은 멀쩡한 사고를 못해서 자신들의 악에 갇힌다고 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작품에서는 유독 머리가 비상하거나 사회적 위치가 높은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들의 방대한 지식이 곧 탐욕으로 번지면서 시야가 좁아져 마침내 선악을 분별치 못하게 되는데, 이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 악이란 무엇인가를 알 것도 같았다. 이것은 과거 나치 장교였던 부덴 박사에게도 해당된다. 복역을 마친 뒤 수도사가 되어 살아가는 부덴 박사도 과거 끔찍한 의술에 빠졌을 때엔 사리분별을 못했었다. 그가 저지른 악행도 죄악이지만 그 이전에 자신이 추구하던 신념과 사상이 결국 자신을 집어삼켰다는 사실. 이렇듯 작중에서 등장하는 악에 관한 언급들을 살펴보건대 모두들 광적인 집착이 있었는데 저자는 악행을 저지름보다도 악의 길로 들어섬을 비극으로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역시 좀 부족한데 나로선 도저히 설명을 덧붙이지 못하겠다.
이제 악기는 완전히 접고 대학교수가 되어 살아가는 아드리아. 그에게는 짧게 만났다가 길게 헤어진 연인이 있다. 훗날에 다시 재회하여 나름 깨소금 볶는 중이지만, 악기 주인을 찾아주라는 그녀의 말에 아주 그냥 마음이 단단히 상해버린다. 비록 부친이 좋지 못한 방식으로 구했다지만 그와는 상관없는 일인데 말이다. 이후 그녀가 사고로 죽자, 자신의 어떤 집착에서 또 하나의 악을 발견했던 건지 생각을 고쳐먹게 된 아드리아. 그렇지만 알츠하이머에 걸려 이 회고록을 작성하는 때까지도 악을 완전히 떼어버리진 못했던 그였다. 쩝. 나는 지금 오로지 주인공에 관한 시점에서만 글을 작성하는 중인데, 작중 수많은 과거들 가운데서도 여러 악의 본질과 형태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므로 부디 건투를 빈다. 난 이미 틀렸어.
내가 이 작품에서 건진 건 딱 하나다. 주인공의 절친 베르나트의 대사인, 모든 예술은 불만족에서 탄생한다는 말. 이것은 결핍이나 저항과는 또 다른 의미로 해석되었다. 나의 이 글 쓰는 행위도 사실 작품을 대하는 나 자신에게 가진 불만족으로부터 출발한 거였다. 어쩌면 예술이란 극복이 불가능한 콤플렉스를 끌어안는 과정에서 피어나는 한 송이의 꽃이 아닐까 한다. 그러다 각성하면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또 다른 세상을 마주하는 걸 테고. 쓰고 보니 배꼽이 더 큰 리뷰가 된 듯하다. 여하튼 죄다 좋다고 난리던데 나만 또 별로였던 작품이올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