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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의 여행 ㅣ 페이지터너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빛소굴 / 2022년 8월
평점 :
오랜만에 읽는 츠바이크인데 이 분도 작품마다 편차가 좀 있네그려. 내가 생각하는 츠바이크란 사람은 허공에 떠다니는 형용 못할 감정들을 캐치할 줄 아는 재주꾼이다. 물론 그쪽 계열의 작가들이 많긴 하지만 유독 츠바이크를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가 절제의 미학을 지녔기 때문이다. 내가 왜 그리도 필력이 주 무기인 작가들을 싫어하냐면, 문장 하나에 많은 걸 집어넣느라 글과 글 사이가 온통 여백으로 가득해져서 그렇다. 널따란 공원에 나무가 두세 그루 심어져 있는 모양새랄까. 나무를 관찰하는 재미는 있어도 공원을 둘러보는 맛은 없단 얘기다. 반면에 츠바이크는 유리알 같은 감정선을 그려내면서도 너무 거기에 치중하지 않게끔 적당 선에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저번에 서머싯 몸을 가리켜 생태계 교란종이라고 했었는데 츠바이크 또한 마찬가지라 하겠다. 대단혀.
요 책은 중편 두 가지를 묶어놓은 건데, 표제작인 <과거로의 여행>만 리뷰해 보겠다. 아, 다른 하나는 재미없어서 중도 하차했다. 열차 타고 도피하는 두 남녀의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여자는 남편과 사별한 상태이고, 남자는 처자식을 나 몰라라 한 상태이다. 따라서 전형적인 내로남불 이야기되시겠다. 그렇지만 이들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나도 모르게 허물을 감싸주고 싶어진달까. 제조업 사장님의 비서가 된 루트비히는 거동이 불편한 사장님의 권고로 그 집에서 살게 된다. 그리고 젊은 사모님의 배려와 지원으로 고단한 삶에 큰 위안을 얻는다. 어느 날 사장님의 지시로 장기 해외출장이 확정된 주인공은 그제야 사모님을 향한 자신의 찐 사랑을 깨달아 오열한다. 아픔을 뒤로 한 채 두 사람은 훗날을 기약하며 그렇게 헤어진다. 그래 뭐 해외를 가면 떼부자 된다고 하니까, 또 사장님도 곧 돌아가실 거니까, 복귀만 하면 만사형통 꽃길을 걷게 될 테니 딱 2년만 고생하자는 마음으로 떠난 루트비히. 이윽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세계대전 늬우스. 에헤이.
밀항하려던 그의 계획은 틀어져 버렸다. 현지의 사업을 독립적으로 경영하라는 본사의 연락이 왔고, 완전히 발목이 잡혀버린 주인공은 잡생각을 지우기 위해 밤낮으로 일에만 매달리기 시작한다. 사모님과의 약속을 못 지키자 죽을 맛이었던 그는 일부러 몸과 정신을 혹사시켜야만 했다. 아마도 이쯤에서 많은 군필자들이 공감했지 싶은데, 군대 가서도 자꾸 생각나는 애인 및 전여친 때문에 애써 바쁜 일과를 보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일말상초 정도 되면 군 생활에 적응하면서 애인 생각도 많이 줄어들게 된다. 그처럼 주인공 루트비히도 서서히 사모님을 잊고 딴 여자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다. 어쩐지 첫사랑은 다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츠바이크의 속삭임이 들리는 것도 같고.
차라리 그대로 묻어두면 좋았을 것을,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보다 멀고 우정보다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나간다. 그러다 사업차 본국에 갈 일이 생기자 내친김에 사장님 집을 찾아간다. 미망인이 된 사모님이 반겨오자 총각 때의 감수성이 돋아난 그는 다시 예전의 관계를 이어나갈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본인의 나이 듦과 갖가지 현실적인 문제들로 고민하는 그녀였다. 확실히 츠바이크가 이런 윤리와 욕망의 줄다리기를 잘 한다. 이처럼 세월이 많이 지났어도, 서로의 곁에 누군가가 있다 해도 한번 생긴 인연의 끈은 절대 끊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살아갈 뿐이지. 깔끔히 정리되지 않은 감정의 씨앗은 마음 밭 어딘가에 심어져 있다가, 희망고문에 불과한 비라도 내리게 되면 저절로 싹을 틔우는 법이다. 혹자는 이것을 순애라고 부르던데, 나는 사랑의 성질이 원래 그런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이들의 금지된 사랑을 응원할 순 없지만 나쁘다 말할 수도 없었다.
츠바이크의 작품은 막상 읽을 때엔 별 감흥이 없는데, 꼭 리뷰를 쓰면서 수면 아래 있던 감수성이 터져 나온다. 거참 이상하기도 하지. 이이도 교란종이 확실하다니깐. 나름 전쟁 같은 사랑을 치러본 사람으로서 두 번 다신 반복하고 싶지 않은데, 꼭 한 번씩 불꽃같은 사랑 얘기를 읽고 나면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고 그런다. 아마도 옆구리 시린 계절이 다가와서 그런 거겠지. 이래서 집 밖은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