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마틴 에덴 1~2 - 전2권 - 추앙으로 시작된 사랑의 붕괴
잭 런던 지음, 오수연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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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심리학자 칼 융의 성별 이론을 참고로 읽는다면 재미가 더할 것이다. 먼저 남성 안에 억눌려있는 여성성을 ‘아니마‘라 하고, 여성 안에 억눌려있는 남성성을 ‘아니무스‘라고 한다. 각자가 감추고 있는 제2의 자아를 지닌 이성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내면의 자아를 상대에게 투사해서 그렇단다. 또한 남성성, 여성성은 독립된 개체가 아닌 하나의 스펙트럼이며, 평소의 자신과 반대편에 있는 이성에게 끌리도록 설계된 것이 인간이라는 사실. 마치 극외향 ENFP와 극내향 INTJ의 높은 궁합을 자랑하듯이. 또한 심리학에서 말하길, 가장 건전한 관계는 서로가 (무언가를) 줄 수 있는 존재끼리만 형성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 말에 따라 주인공 두 남녀는 서로에게 없는 정보와 경험들을 제공하며 팽팽히 끌어당기는 관계로 발전할 수가 있었다.


노동 계급의 마틴은 어찌어찌해서 상류층의 모스 가문과 인연을 맺고, 그 집안 딸인 루스에게 반해버린다. 물론 각자의 처지를 알기에 결코 선 넘는 법은 없었으나 설명할 수 없는 대 우주의 법칙으로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신분은 다르지만 두 사람은 각자의 우물 속에선 꽤나 각광받는 알파 남녀였다. 하여 각자 우물 밖의 세계가 흥미로운 건 물론이었고, 이제껏 살아온 삶이 주지 못한 자극의 세계로 안내한 서로에게 매력을 느꼈음은 당연했다. 루스에게 기초적인 교양 및 언어 교육을 받게 된 마틴은 점점 지식과 예술 세계에 온 마음을 뺏겨버린다. 시작은 루스와 조금이라도 나란히 걷고 싶다는 욕망에서였지만, 나중에는 자아실현과 기대 가치를 위해 열과 성을 다하는 뇌섹남으로 바뀌었다. 그것을 마치 루스 자신이 마틴을 멋지게 조각했노라고 착각하게 만들어 낭패였지만 말이다.


마침내 그의 사랑고백이 효과를 발휘했다. 루스는 이 거친 야생마에게 끌렸음을 인정하고 부모의 반대를 꺾고 연애질을 시작한다. 어쨌든 잘 풀려 다행이지만 솔직히 루스를 향한 마틴의 사랑은 동경과 경외심 그 사이쯤 어딘가의 감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성 간에 반대가 끌린다는 말을 썩 좋게 보지 않는다. 나를 끌어당긴 그 ‘다름‘의 매력이 동나면 다시 나를 밀어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서로 조율하고 타협해서 잘 지내는 커플이란 건 있을 수 없다. 어느 한쪽이 계속 희생하고 맞춰주는 건데 다른 한쪽이 그걸 알아채지 못할 뿐이지. 그 ‘다름‘이란 마틴처럼 신분과 환경일 수도 있고, 성향과 가치관 같은 보이지 않는 영역이기도 하다. 그중 하나라도 데칼코마니 급으로 결이 맞는다면 모를까, 그런 게 없다면 언젠가는 권태가 오게 돼있다. 그런 연애들만 해왔던 장본인으로서 아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다들 호기심에 좋아서 만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저 사람을 우리(나)에게 맞게끔 바꿔놓자는 무의식에 지배된다. 고로 반대가 끌린다는 건 허울좋은 이유일 따름이다.


어딘가에서 읽었던 동경과 사랑이 어떻게 다른지에 관한 글을 적어보자면,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와 ‘그 사람 곁에 머물고 싶다‘의 차이라고 했다.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의 리뷰에도 적었던 건데,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기만 하면 사랑이 아니라 동경이 돼버린다. 동등한 입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사랑으로 발전할 수가 없음을 의미했다. 마틴은 루스가 사는 세계로 입성하고자 문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밤낮으로 글을 쓰고 투고하기를 반복하는데, 그 노력이 루스에게는 허상을 쫓는 일로 보여 내적 갈등을 겪는다. 이 구간이 꽤나 긴데, 오히려 마틴이 사랑했던 건 루스보다도 글을 쓰는 행위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다. 문인의 꿈이 아득히 멀게 느껴져도 그저 쓸 수 있음에 설레했고, 문학이 주는 아름다움에 황홀해했으니. 그건 마치 등가교환의 법칙과도 같아서, 투고한 곳마다 빠꾸먹어도 절대 시드는 법이 없었더랬다. 그러다 마침내 수락된 단편소설의 터무니없이 낮은 계약금을 듣고서 이 바닥에 오만정이 떨어진 마틴은 노동 계급의 패배를 인정하고야 만다.


그녀에게 걸맞는 지성과 교양을 갖추고자 했던 그의 독학들이 잠들어있던 총명함을 일깨워 주었다. 어느새 마틴의 지적 수준은 우러러보던 상류층의 고위 인사들을 훌쩍 뛰어넘었고, 그들의 오만한 도덕성과 확증편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기에 이른다. 또한 그들에게 실망과 염증을 느끼며, 겨우 그 정도 수준으로 상하 계급을 나눴다는 것 또한 납득할 수 없었다. 어떻게 평생을 이론만 공부해온 사람이, 인생을 실전으로 배운 사람보다 우월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처럼 세상을 알면 알수록 모순과 허점 투성이라, 방향을 잃은 마틴이 독서와 글쓰기의 세계로 빠져드는 건 당연했다. 그럼에도 날로 머리가 커가는 마틴은 상류층과의 지적 대화에 굶주려 했다. 그는 루스 가문을 통해서 만난 인사들과의 대화마다 강한 인상을 남겼는데, 이것은 그가 잃을 것도 없는 처지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일개 노동자에 불과한 이 청년의 무례하기 짝이 없는 발언 앞에 상류층이 꼼짝하지 못한 건, 그의 총명함보다도 여태 못 본체했던 자신들의 약점을 간파당한 탓이었다. 바로 이런 장면들에서 저자의 센스가 돋보이는 법인데, <돈키호테>에서도 노망난 영감님의 팩트폭행에 긁힌 사람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지 않았던가. 하여간 블랙 유머를 잘 다루는 이들의 섹시함은 알아줘야 한다.


루스는 야만인에서 뇌섹남이 되어가는 애인의 변화를 인정하면서도 막 환영하지는 못했다. 마틴이 사회의 기존 체계나 부조리들을 비판함은 그렇다 쳐도 어느 정도는 현실과 타협할 줄도 알아야 같이 살던가 할 텐데, 시대를 앞서간 그의 이상주의가 오히려 그를 사회 부적응자로 바꿔놓고 있었다. 작가로 성공하리라는 그의 꿈과 포부를 대체 언제까지 믿고 응원해야 한단 말인가. 차라리 예전처럼 선원 생활하던 야만인이었을 때가 더 현실적이고 건강한 삶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사실 이런 딜레마는 재능과 신뢰를 떠나서 으레 생기는 법인데, 그것을 사랑에 금이 간 신호탄으로 본다는 게 문제이다. 또 그런 관계가 오래 지속되면 잘못은 전부 상대 탓으로 돌리고 자신은 피해자로 생각하기가 쉽거든. 아니면 자격지심으로 자기 연민에 빠진다거나. 여하튼 두 사람의 사랑이 삐걱댈 거라는 건 처음부터 정해진 일이었고, 어느덧 ‘다름‘의 매력도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연애의 고수들은 이 불씨를 잘 살려서 다시 지지고 볶고 할 테지만 마틴과 루스는 생초짜 풋내기라서 말이제.


더 나아가 마틴은 노예제도와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연설에까지 나서게 된다. 그는 책 속에만 갇혀있었던 지식과 사상을 현실에 부딪혀봄으로써 제 확신을 굳히려 했다. 그러나 그의 광적인 열정과 탐닉은 끝내 사회주의를 부추긴다는 누명을 쓰고서 세상과의 외로운 투쟁을 하게 된다. 그 얄팍한 소동에 루스의 마음이 돌아섰음은 뭐 말할 것도 없고. 점점 마틴의 작품 가치를 알아본 출판사들의 러브콜이 쇄도하고, 쌓여있던 글들을 전부 처분할 만큼 주목받는 벼락 스타가 된 주인공. 허나 사랑이 떠나간 지금 와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랴. 어째서 사랑이란 놈은 소설 속이나 소설 밖이나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건지 원. 숱하게 거절당했던 그의 작품들이 대인기를 끌었지만, 환희의 샘이 말라버린 마틴은 절필을 다짐하고야 만다. 루스에게서 어떠한 반응도 얻지 못했던 그의 글들이 오늘날 대중들에게 제대로 먹혀들고 있는데, 과연 그녀는 이 상황을 어떻게 볼 것이며 주변에 휘둘렸던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다시 심리학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나 자신과 맺는 관계의 수준으로 타인과도 관계를 맺는다고 한다. 마틴에 대한 루스의 사랑은 거짓이 아니었겠지만, 사회적 평판과 인정으로 본인의 가치를 매겼던 그녀였기에 감정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이 또한 앞서 얘기한 딜레마라서 이상할 것도 없으나, 우물 밖의 광활함을 보고도 느낀 바가 없다면 어떤 완벽한 신사를 만난다해도 갈증에 시달렸을 테다. 하여 다시 마틴을 찾아와 용서를 구해보지만 그녀의 본심에는 여전히 부르주아식 사고가 다분했고, 그제야 마틴은 제 사랑이 동경의 감정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녀의 절절한 외침들이 진실이든 아니든, 전혀 인정 못 받았던 시절이나 스타 작가가 된 지금이나 똑같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뜨기도 전에 썼던 자신의 글들이 한때 씹고 뜯기고 난도질당했던 것처럼, 열렬했던 그의 사랑도 마구 할퀴고 짓밟혔음을 떠올리자니 눈앞의 고백들도 기가 차는 것이다. 마음 같아선 싹 다 진실의 방으로 집어넣고 싶은데 말야.


영혼이 죽어버린 마틴을 보고 있으면 꼭 허망과 염세주의에 빠져살던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사랑과 우정 모두에게 배신당하고, 가난으로 삶의 여러 기회들을 놓치고서 마지못해 살아가던 나의 청춘들이. 나는 그나마 뒤늦게 독서와 글쓰기로 구원을 받았는데, 마틴 같은 사람은 이제 무엇으로 삶과 아름다움의 빈자리를 채워야 할까. 내가 살아보니 시간이 약이란 말이 맞긴 한데, 이른 나이에 성공해버린 경우는 또 달라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여튼 감명 깊게 읽었다 보니 글이 무지막지하게 길어졌는데 그만큼 강추 강추 강강추이다. 올해의 책으로 선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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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2-11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강추! ㅎㅎ 하긴 저도 이 책은 알고 있었는데 잊고 있었네요.
남의 사랑 이야기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데 마틴의 작가가되기 위한
노력과 그의 인생행보가 궁금하긴 하네요.
저는 오래 전에 <강철군화> 재밌게 읽었는데 미국문학은 저에겐
모 아니면 도죠. 다행히도 잭 런던은 모인데 책값이 싸지는 않네요.
6백 페이지 안쪽이면 그냥 벽돌책으로 해도 좋을텐데.
중고샵은 있지도 않고. 강철군화도 어느 새 절판이네요. ㅠ
이번 리뷰는 좀 기네요. 쓰느라 애쓰셨네요. ^^

물감 2024-12-12 11:27   좋아요 0 | URL
저는 잭 런던이 이렇게 잘쓰는 분인 줄 처음 알았네요. 뭔가 보물을 발견한 느낌인지라 무조건 소장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물론 저도 중고로 샀고요. 가격이 너무 사악함ㅋㅋㅋ 러브스토리는 저도 별 생각없긴 한데 클래식은 질리지가 않아서 좋아요^^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ㅋㅋㅋ

다락방 2024-12-12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진짜진짜 재미있게 읽었어요.
저는 처음 노동자인 마틴 에덴의 묘사를 읽는 것도 너무 즐거웠고요 책과 공부에 빠져드는 마틴 에덴을 보는 것도 너무 좋았습니다. 그러다 유명한 작가가 되었을 때 사람들의 달라지는 태도를 보고 고뇌하는 마틴 에덴을 보는 것도 진짜 좋았어요. 하여간 전반적으로 너무나 좋은 책이었어요. 저도 여기저기 추천하고 다니는 책입니다.

물감 2024-12-12 11:56   좋아요 0 | URL
방금 다락방님의 페이퍼 찾아 읽었습니다. 언제봐도 놀라운 의식의 흐름 ㅋㅋㅋㅋ
말씀하신 포인트들, 저도 전부 다 좋았어요. 특히 묘사들이 타 작가들처럼 투머치 하지 않아서 맘에 들고요. 그나저나 지성미와 육체미를 전부 가진 인물이라니, 역시 소설은 소설이구나 싶은.... 그래도 초강추!
 
무기여 잘 있거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6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권진아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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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전혀 하지 않았던 과거의 내가 기억하는 소설가의 이름은 헤밍웨이 딱 하나였다. 그만큼 나에게는 머시기한 기억 보정이 들어가 있는 분인데, 정작 독서의 세계를 알고 나서는 영 손이 가지 않는 작가이다. 일단 헤밍웨이는 타 작가들과 달리 활동 초기와 후기 작품의 갭이 막 크지는 않다. 일찍이 그의 인생은 전쟁에게 집어삼킨 바 되었고, 그렇게 전쟁이 낳은 사상들을 문학이라는 배설물로 내보냈다. 따라서 헤밍웨이의 작품은 어쩔 수 없이 시대를 타는 데다 스타일마저 시크하고 간결하여 썩 친해지기 쉬운 편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비주얼은 포기하고 맛으로만 승부하려는 타입도 아니다. 아무튼 여러모로 내게는 연구 대상인 작가임에 틀림없다.


<무기여 잘 있거라>는 은근히 기대했던 작품이었다. 제목이 지닌 분위기가 어떻게 흘러갈 거라는 상상력을 잔뜩 불어넣었단 말이다. 허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고 모든 장면을 뻔하게 설명해서 이만저만 실망한 게 아니었다. 물론 좋은 장면이나 의미심장한 문장도 있었지만 그 비중이 정말 코딱지만 했달까. 내가 생각했던 시나리오는 별거 없었다. 전시 중에 느끼는 주인공의 감정 교차를 보고 싶었다. 전우들의 죽음 가운데 적군과 싸워 이기는 것만을 생각해야 하고, 길어지는 전쟁으로 가족과 연인들의 미래가 사라져가는 뭐 그런 거 있지 않나. 오히려 독자들한테는 이런 내용들이 뻔한 것일 텐데, 헤밍웨이의 뻔함은 있는 그대로를 설명하는 선에서 그친다. 차를 타고 이동한다, 전우들과 식사를 한다, 병원을 들린다와 같은, 정말 메시지랄 것도 없는 업무 일지를 읽는 기분이었다. 대체 이런 작품을 오늘날까지도 떠받드는 이유가 뭘까.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전쟁에 염증을 느낀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이탈리아 군대의 구급차 운전병으로 지원 후 장교가 된 헨리의 국적은 미국이다. 미국인이 어째서 이탈리아 군에 온 건지 다들 의아해하고, 여기에 헨리도 별다른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그의 직별 및 계급상 전선에 나설 일은 없었고 의무대와 군 병원 주위를 어슬렁대는 게 다였는데, 툭하면 지겨운 전쟁 운운하는 걸로 보아 군인으로서의 사기는 오래전에 저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어느 간호사와의 썸 타기로 답답한 군 생활에 조금씩 활력이 붙는 주인공. 뭐 그런 즐거움이라도 있어야지 했는데 얼마 못 가서 적군의 포격으로 다리를 크게 다치면서 병상 생활이 시작된다. 여기까지가 1부이고 헤밍웨이가 겪었던 일들이다. 그래서인지 재미가 쏠쏠했는데 2부부터는 텐션이 점점 떨어지다 끝내 핵노잼이 돼버린다. 후반부에 가면 좀 달라질까 싶었는데 정말 끝까지 기대를 저버렸음. 피츠제럴드가 딱 이런 스타일이라 손절했는데 헤밍웨이도 같은 과란 말이지? 고민 좀 해봐야겠고만.


딱히 이렇다 할 내용이 없어 그만 쓰고 싶지만 계속해 보겠다. 부상 회복 후 복귀한 헨리는 곧바로 전쟁에 투입된다. 부상자들을 나르던 헨리는 적군의 습격을 피하고 피하다가 탈영병들을 제거하는 아군들에게 붙잡힌다. 개죽음 당하기 싫어 진짜 탈영병이 된 그는, 그 길로 애인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한 뒤 함께 도주하기로 한다. 임신 중이었던 그녀는 오직 사랑 하나만 바라보며 그를 따르기로 마음먹는다. 결국 그녀의 숭고한 사랑이 전쟁의 아픔도 이겨낸다는 걸 말하려나 싶었는데 그렇다 하기도 뭐 한 것이, 간호사의 대사가 온통 자길 사랑하느냐는 질문뿐이어서 내가 다 노이로제 걸릴 뻔했단 말씀이야. 그리고 또, 군인이 전쟁을 등지고 떠나려는 것만으로 반전 소설이라 부르는 것도 뭔가 납득이 안돼. 다 떠나서 억지로 분량 채운다는 인상이 강하게 들어서 힘들었다. 헤밍웨이도 나님한테 걸리면 얄짤없습니다, 예.


그럼에도 헤밍웨이는 좀 더 읽어볼 생각이다. 어쨌거나 이분이 가진 허무주의는 과거 나에게도 있었던 것들이라 반갑긴 하거든. 헤밍웨이가 입대하기 전 기자로 활동하지 않았다면 호불호 심한 하드보일드 문체를 쓰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그 덕분에 작가로 살아갈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고. 여튼 대단한 건 알겠는데 솔직히 맘에 안 듭니다요. 이 F형 인간을 T형 인간으로 만들지 좀 마시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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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2-03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여간 투덜이십니다. 근데 그게 좀 귀엽습니다. ㅋㅋ
하지만 별 두 개는 좀 박하지 않나요? 그래도 노벨문학상 수상잔데.
전 오래 전 노인과 바다 괜찮게 읽었습니다. 이 책 별로라시니 언제 읽을지 모르겠네요. ㅋ

물감 2024-12-03 11:53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업무일지‘를 재미로 읽을 순 없으니까요...
<노인과 바다>는 저도 아주 좋았습니다! 딱 그 정도로 짧고 굵게 가는 편이 이 분에게는 딱인듯 싶어요. 아무리 살을 다 쳐내고 간결하게 썼대도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니 말이에요 ㅋㅋㅋㅋ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요시노 겐자부로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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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그렇듯 나 역시 동명의 영화를 보고서 원작에 관심이 생겼다. 알고 보니 제목만 같을 뿐 책 내용은 영화하고 전혀 달랐다. 이 책은 스토리텔링의 철학 에세이라고 보면 되는데, 갓 중학생이 된 아이들에게 쓴 글들이지만 성인들도 가벼이 흘려들을 수 없는 깨달음과 울림을 지녔다. 처음엔 이토록 진지한 제목이어야만 했나 싶었는데, 다 읽고 난 지금은 너 자신을 알라는 정도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이렇게 묻혀있던 보물이 주목받고 재조명되는 경우가 많아졌으면 한다.


중학생이 된 코페르의 일상과, 외삼촌의 조언이 담긴 노트 기록으로 구성된 이야기들. 작중에 나오는 갖가지 내용과 가르침들을 한뜻으로 묶자면, ‘당연하게 여긴 것들이 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그 점을 캐치할 줄 아는 감각과 사고력 및 그에 따른 선행들도 필요하겠고. 혹자는 그런 게 뭐가 대단하냐고 할 텐데 세상은 어느 것 하나도 당연하게끔 설계된 것이 없다는 얘기다. 순도 100%의 내 힘과 능력만으로 이룬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사람들은 마치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창조자라도 된 것처럼 스스로를 과신한다. 다시 말하지만 당연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법한 대사 중에 우리 집이, 학교가, 국가가, 세상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냐는 불평불만이 떠오른다. 그 말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여기에도 역설이 존재한다. 자신이 누린 일상의 전부가, 제삼자의 수고 덕분에 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특정 대상을 탓하고 헐뜯고 비난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좀 더 인간답게 만드는 데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이 책에서는 감사를 느낄 줄 아는 마음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니,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혹 그것이 저자의 의도는 아니었을까 하고.


막상 읽어보면 다 어디서 들어봤던 내용들뿐인데 어째서 색다르게 들리는 걸까. 언제나 그랬듯 진리라 함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는 말이렸다. 옛 선조들과 현인들과 성인군자들이 하는 말에는 낯설고 생소한 표현이 잘 없다. 그런즉 누구나가 진리를 품고는 있으되 온갖 더럽고 추악한 장막에 가리어져 보지 못할 뿐이다. 성경에서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 7:13)고 하지 않았던가. 그저 내가 편하고 싶어서 나 좋을 대로만 믿고, 그게 옳다 여기는 태도들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부패시켰는지 생각해 보라. 나는 재앙을 내리고 세상을 갈아엎는 신들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담백하고 마일드한 이 책에서 매콤함을 느낄 독자는 과연 몇이나 될까.


개인적으로 반성과 후회할 줄 아는 사람이 위대하다(222p)는 표현이 가장 좋았다. 자신의 비겁함을 인정함과, 옳고 그름의 판단이 섰다는 증거이고, 앞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므로. 또한 받기만 하던 소비자에서 줄 줄도 아는 생산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에도 아주 공감한다. 누구나가 세상에 쓸모 있는 존재가 될 순 없겠지만, 인간이란 그저 태어난 김에 살아가는 존재여선 아니 된다. 나에게 도움을 준 세상에 뭐라도 기여하려고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당연함이 아닌 감사로써 나아갈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끝으로, 나의 보잘것없는 글이라도 당신과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발판이 된다. 그러므로 난 계속해서 읽고 쓸 것이다. 부디 당신도 그러기를 바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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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1-26 19: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능력이 남다른가 봅니다.
어디서 들어 본 얘기 같은데 색다르게 들리다니.
좀 기독교적 사고관도 느껴지고.^^

물감 2024-11-26 21:02   좋아요 1 | URL
사실 이 책은 일본 철학자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편집인??이 엮어낸 책이랍니다. 그러니 작가라고 하기도 안하기도 애매하군요 ㅋㅋㅋ 어쨌거나 철학적인 면이 들어있어 같은 내용이라도 색다른듯 싶어요. 100년전에 쓴 글치고 제법 현대적이라 더 좋았습니다. 그리고 종교 색채는 전혀 못느꼈어요. 단지 저의 아웃풋에 성경 구절을 녹여냈을 뿐^^
 
쓰는 여자, 작희 - 교유서가 소설
고은규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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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관심사가 전부 떨어져 나가고 이제 남은 취미라곤 독서와 글쓰기뿐이다. 글쓰기는커녕 독서조차 하지 않던 내가 어쩌다 10년이 넘도록 글쟁이로 살아가고 있을까. 나의 첫 시작은,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의 답답한 속내를 블로그에 쓰면서부터였다. 그렇게라도 해서 속이 후련해지고 다시 스트레스받고 일기에 하소연하기를 반복하면서, 나도 모르게 글쓰기에 지친 몸과 정신을 기대고 있었다. 피할 곳이 생기자 수시로 들락날락하면서 같은 입장인 타인의 글에도 관심을 갖게 되고, 심신안정을 위한 에세이와 산문집을 찾아 읽으며 자연스레 독서까지 하게 됐다. 또 내가 읽은 책을 남들은 어떻게 평했는지도 궁금해서 리뷰를 찾아다녔고, 어느새 그들처럼 내 감정과 생각들을 자유롭게 끄집어내고 싶었고, 나의 글로 누군가에게 공감과 위로와 재미와 정보를 주고 싶어졌다. 치유의 글쓰기로 출발하여 건강한 사유에 도달한 지금은 숨 쉬듯 당연하게 읽고 쓰고 있으며, 가만두어도 증식하는 생각들을 독서로 정돈하여 배출해낼 뿐이다. 어느 이웃에게도 했던 얘기인데, 생각이 고여있지 않고 어디론가 흘러가야 운동에너지를 갖는 법이므로, 나의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쳇바퀴를 굴려야만 하는 것이다.


블로그나 sns가 활성화되고부터 글쓰기의 대중화가 된 것은 환영하지만, 반대로 진지한 태도의 글쟁이들은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물론 글쓰기가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럴 시간에 자기 계발 하나라도 더 해야 하는 게 현실이라 할 말은 없다만, 현재 대한민국은 정서적으로 너무 병들어있다는 게 눈에 보이지 않는가. 이 얘기는 10년 전에도 지적했었고, 그전에도 누군가가 계속해왔던 말이다. 나는 그것을 교양 문제로 보았는데, 갖가지 활동도 좋지만 기초적인 베이스는 역시 독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글도 쓰고 토론까지 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혹자는 그런 게 밥 먹여주냐고 할 텐데, 아무런 영양가도 없다면 그런 문화를 지양하는 이들은 뭐 바보라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있겠는가. 현대인들은 달과 6펜스 중에서 어느 한쪽만을 골라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냥 둘 다 가져가도 된다. 다만 우선순위가 다를 뿐인데, 흔히 돈을 좇지 말고 돈이 쫓아오게 만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나는 이 말에도 뭐가 우선인지를 아주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글쓰기에 관한 담론은 언제나 즐겁고 흥미롭다. 이번에 읽은 소설이 글 쓰는 여자들에 관한 내용이었다 보니 앞서 잡설이 길었다. 창작자를 방해하는 귀신이 들러붙는다는 업계의 소문이 돌았다. 늦깎이 작가 은섬은 하도 글이 안 써져 ‘작가 전문 퇴마사‘를 찾아간다. 퇴마사는 그녀에게 붙어있는 잡귀 둘을 설명했고, 99일간 퇴마 방침에 따를 것을 권한다. 잡귀의 이름은 작희와 그녀의 어머니 중숙이었는데, 마침 은섬은 큰아버지가 건네준 일제강점기 시절에 쓴 이작희의 일기와, 오 작가의 미발표 초고를 검토하는 중이었다. 오호라, 일기의 주인께서 귀신 되어 직접 행차하신 거로군. 그렇담 무엇이 원통하여 자신의 창작을 방해하는지를 알아볼 차례다. 이제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데, 미리 말하자면 현재 시점에서는 딱히 건질만한 게 없었다. 그런고로 과거의 내용만 다루겠다.


아들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난 중숙. 억지 결혼으로 학업이 중단되었지만 밤마다 글 쓰는 기쁨으로 아픔을 달래곤 했다. 이후 태어난 딸도 어미를 따라 글쓰기에 재능을 보였고, 책방을 운영하면서 모녀는 소박한 행복을 이어나갔다. 이들은 자기가 좋아서 글을 쓰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현실 도피 수단에 가까웠을 것이다. 글쓰기를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나만이 아는 세계가 있다고 대답한 것을 보면 말이다. 모녀는 서로의 글을 보여주고 비평하며 창작의 세계를 낙으로 삼았다. 싸돌아다니는 남편과 적대적인 시댁들 가운데 오 작가가 등장하여 모녀의 삶에 가느다란 활력소가 되어준다. 그러다 중숙이 세상을 떠나고 홀로된 작희가 책방을 지키다 오 작가와 눈이 맞는다. 한편 곳곳에서 연재 마감의 압박을 받던 오 작가는 작희의 투고 작을 도둑질하여 제 것인 양 세상에 내놓는다. 억울함을 호소해 본들 아무도 그녀를 알아주지 않았고, 사고로 오른손을 다쳐서 작가의 꿈마저 물거품이 된 상황. 마치 글 쓰는 여성의 앞길을 온 세상이 작정하고 막아서려는 듯했다.


다시 현대로 돌아와, 은섬은 이제라도 오 작가의 행패를 밝히기로 한다. 말없이 사라져간 옛 여성 작가들의 원한을 풀려면 현재의 오류들을 바로잡아야 했다. 마침내 귀신들은 물러가고 퇴마는 무사히 끝이 난다. 솔직히 테마가 너무 뻔해서 쏘쏘했었는데, 이 사회가 짜고 치는 도박 판이었음을 고발한 데에서 마음이 움직였다. 따라서 여성의 서사이지만 넓게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자유의 개념조차 없었던 1세대의 중숙, 자유를 억압당한 2세대의 작희, 해방의 갈림길에 들어선 3세대의 은섬. 시대와 입장이 다른 여성 작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질적 풍요나 평등한 자유보다도 ‘존재의 증명‘이 아니었을까. 가족과 남자와 사회에게 가려져있던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더 나아가 인정받게 되는 것, 그러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욕구와 자아실현을 항해 여성들도 힘껏 외치는 시대가 되었다. 매우 바람직하지만 간혹 상황 파악 못하고 제 생각만을 내뱉는 무리들이 그동안의 수고와 노력을 헛되게 만들어버린다. 하여 극단적 우월주의가 아닌 전체의 균형과 조화를 찾아가야 할 텐데, 더이상 대한민국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게 지금 내 솔직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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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4-11-22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보고 산문이 아닐까 싶었는데 소설이네요.

물감 2024-11-22 12:11   좋아요 0 | URL
단순한 플롯과 서사이지만 제법 울림이 있습니다. 가독성도 좋아서 읽어보셔도 좋을 거에요~~

stella.K 2024-12-07 2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보관함에 있는데 재밌겠어요. 함 읽어봐야겠네요.
이번 달은 물감님께 안성맞춤의 달이군요. 축하해요.ㅎㅎ

물감 2024-12-07 21:05   좋아요 1 | URL
으힛 감사합니다ㅋㅋㅋ
이 작품, 가볍지 않지만 가볍게(?) 읽을 수 있습니다ㅋㅋ
 
데이비드 코퍼필드 동서문화사 월드북 138
찰스 디킨스 지음, 신상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1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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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간 벼르고 있었던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겨우 독파했다. 벽돌 책이지만 가독성도 좋고 몰입감 또한 대단해서 겁먹을 필요가 없는 작품이다. 디킨스의 자전소설로써, 그가 가장 사랑했다던 이 작품은 정말 어느 한 장면도 지루한 구석이 없는 명작 중에 명작이다. 그 시대의 수많은 소설가들이 억지로 글자 수를 늘려서 작품을 루즈하게 만들었던 점을 생각해 본다면 디킨스는 타고난 재주꾼이 틀림없다. 그보다도 읽으면서 동화같이 투명하고 정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전소설인 것도 그렇지만 독자에게 웃음과 희망을 주려는 디킨스의 성향 때문이었을 듯.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당대 평론가들의 의견대로 이렇다 할 화두가 없어서 통속 소설로 취급했다가 나중에 가서 그 진가를 인정받았단다. 결국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란 말인가.


책 뒤쪽에는 디킨스의 생애에 관해 100장 넘게 적혀있는데, 쭉 살펴보면 이 작품이 정말 자전소설이 맞나 싶기도 하다. 아무리 봐도 코퍼필드가 디킨스를 닮았다는 생각이 안 들던데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깐. 중산층 가정의 도련님 코퍼필드는 모친의 재혼으로 불행 열차에 탑승한다. 의붓아버지와 그의 누이는 주인공 모자를 맘대로 요리하였고, 코퍼필드를 질 나쁜 기숙학교로 멀리 보내버렸다. 그러다 모친의 장례를 치른 코퍼필드는 이제 학생이 아닌 노동자로 살아간다. 실제 디킨스는 어려서 부모와 사별하진 않았으나 집안이 파산하면서 일찍이 공장을 다녔다고 하니, 이만하면 하드코어 인생이라 볼 수 있겠다. 그처럼 코퍼필드에게도 험난한 가시밭길이 주어지는데, 정작 디킨스는 감정에 동요되지 않고 덤덤하게 써 내려간다. 진정 프로답다.


일터에서 도망친 꼬마는 유일한 혈육인 대고모를 찾아간다. 작품 전체를 통틀어 이 구간이 베스트였는데, 어린 친구가 절망하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어찌나 짠하던지. 한 성깔 하시는 대고모였지만 조카의 성품을 보고 양자로 삼아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게 한다. 그렇게 학업과 생활이 안정되자 코퍼필드의 진가가 날로 드러난다. 일찍부터 산전수전을 다 겪은 터라 또래들보다 훨씬 의젓하고 성숙하고 거기다 총명하기까지 했으니 주변에서 이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그야말로 엄친아 도련님의 재탄생이었다. 인생을 실전으로 배운 소년의 세계관은 점점 확장되어 다양한 이웃들과 친분을 쌓는다. 그리고 대고모의 뜻을 받아 법률인이 되기로 한다. 모든 게 잘 풀리다 보니 작품 초반의 우여곡절에 비하면 텐션이 떨어진 것도 사실이다. 물론 앞으로도 많은 허들이 설치돼있으나 내게는 코퍼필드의 유년 시절이 가장 인상 깊었다.


소년은 제 또래의 소녀가 있는 변호사의 집에서 하숙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만난 여사친이 평생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준다. 그녀는 연애 상담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는데, 먼 훗날 코퍼필드가 그녀에게 빠진다는 뻔한 클리셰가 있지만 좋게 넘어가자. 어느덧 학교를 졸업하고 독립하여 자취남이 된 주인공. 그 기념으로 나선 여행 중에 반가운 옛 친구 S와 조우한다. 질 나쁜 학교에서 인기 원탑이었던 S는 코퍼필드를 챙겨준 은인이었다. 하여 가는 곳마다 제 친구를 자랑하고 다녔던 주인공은 어마 무시하게 뒤통수를 맞게 된다. 그가 한때 사랑했던, 지금은 누군가와 결혼을 앞둔 짝녀를 S가 데리고 튀었단다. 이 사건은 많은 이들의 분노를 샀고, 코퍼필드의 순수에 비로소 때가 묻기 시작한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잘 먹히는 건 사랑과 전쟁이로군.


그 사건을 뒤로한 채 사회생활에 집중하는 주인공. 이윽고 여사친을 통해 또 다른 배드뉴스를 듣는다. 변호사 아빠의 밑에 있던 서기가 약점을 쥐고서 동업을 요구했단다. 모녀를 쥐락펴락해대는 서기가 실상 대표자나 다름없었고, 주종 관계가 바뀐 상태로 모녀는 그렇게 긴 세월을 보내게 된다. 코퍼필드가 손쓸 방법도 없는 데다 여사친도 그냥 모른 척해달라고 하니 별 수 있나. 한편 주인공은 직장 상사의 딸에게 반하여 매달리다가 결혼에 골인한다. 헌데 살림은 관심 없고 놀며 즐기는 게 전부인 철부지 아내였다. 몇 번의 시도로 기대를 접고 가정의 평화를 택했으나, 힘들 때에 의지할 곳이 없던 그의 우울함은 남몰래 익어가고 있었다. 잡념을 지울 생각인지 낮에도 일하고 집에 와서도 글을 쓰기 시작한 코퍼필드. 물론 가계를 위함도 있지만, 현실 도피의 이유가 크지 않았을까. 하다 보니 자신의 재능도 발견하게 되고. 실제로 디킨스가 변호사 사무실에 다녔고 신문기자로 활동하는 등 일에만 몰두하다가 현타가 와서 저술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단다. 아무튼 먹고사는 게 해결되고 나니 이때다 하고 날아드는 시련들에, 역시 인생은 실전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어찌어찌해서 여사친의 문제도 해결되고, S의 도주 사건도 정리되어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가나 싶더니, 철부지 아내가 병마 끝에 세상을 떠난다. 어쩜 이렇게 산 넘어 산인 걸까. 주변을 다 정리하고 외국으로 떠난 코퍼필드는 요양 중에 쓴 소설로 명성을 얻게 된다. 작가로서 인정받은 그의 상처는 아물었고, 다시 귀국하여 여사친과 재혼하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보다시피 이 작품은 많은 굴곡을 정직과 인내로써 이겨내는 착하디착한 소설이다. 단 한 번의 변화구도 없이 직구로만 승부하기 때문에 독자들 사이에서 평이 갈리는 편이지만, 등장인물마다 제 역할에 100% 충실했다는 점에서 나는 후한 점수를 주었다. 문학이 인간을 들여다보게 하는 수단임을 생각해 볼 때에,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그 기능을 훌륭하게 해냈다고 본다. 사실 자전소설이 지니는 화두나 교훈들은 다 거기서 거기이므로 괜히 뭔가를 끄집어내고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두꺼운 책들은 꼭 없어도 그만인 구간들이 많다고 입버릇처럼 투덜거렸는데, 이 작품에는 그런 구간이 일절 없었는데다 감정 개입하지 않고 끝까지 차분함을 보여준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돈키호테> 이후로 만족스러웠던 벽돌 책 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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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1-19 16: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돈키호테 이후로!저도 읽어봐야겠어요.
근데 동서문화사판으로 읽었군요. 가성비가 좋긴하죠?
이게 보통 두 세 권인데 그걸 감안하면 비싼 건 아닌데 말이죠.
근데 천 페이지 넘는 걸 어찌 다 읽으셨습니까? ㅠ

물감 2024-11-20 08:48   좋아요 2 | URL
엄청난 페이지터너 였습니다. 디킨스가 글을 잘 쓰긴 하네요 ㅎㅎ
저도 분권을 싫어해서 이거 고른건데 번역도 훌륭하고 오탈자도 거의 없었어요. 동서문화사 짱짱맨! 아 요즘 진득하게 글 쓸 시간이 잘 안나서 일부러 벽돌책 골랐습니다. 1년에 한두 권정도는 벽돌책 뽀개기 하려고요 ㅎㅎㅎ

자목련 2024-11-20 11: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1120쪽! 어마어마하네요.
저는 요즘 500쪽만 넘어가도 힘들어요 ㅠ.ㅠ

물감 2024-11-20 20:50   좋아요 0 | URL
자목련 님은 다독하시니까 그게 그거라고 생각됩니다만, 힘들다고 느끼시는건 리뷰의 부담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