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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코퍼필드 ㅣ 동서문화사 월드북 138
찰스 디킨스 지음, 신상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1년 1월
평점 :
수년간 벼르고 있었던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겨우 독파했다. 벽돌 책이지만 가독성도 좋고 몰입감 또한 대단해서 겁먹을 필요가 없는 작품이다. 디킨스의 자전소설로써, 그가 가장 사랑했다던 이 작품은 정말 어느 한 장면도 지루한 구석이 없는 명작 중에 명작이다. 그 시대의 수많은 소설가들이 억지로 글자 수를 늘려서 작품을 루즈하게 만들었던 점을 생각해 본다면 디킨스는 타고난 재주꾼이 틀림없다. 그보다도 읽으면서 동화같이 투명하고 정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전소설인 것도 그렇지만 독자에게 웃음과 희망을 주려는 디킨스의 성향 때문이었을 듯.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당대 평론가들의 의견대로 이렇다 할 화두가 없어서 통속 소설로 취급했다가 나중에 가서 그 진가를 인정받았단다. 결국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란 말인가.
책 뒤쪽에는 디킨스의 생애에 관해 100장 넘게 적혀있는데, 쭉 살펴보면 이 작품이 정말 자전소설이 맞나 싶기도 하다. 아무리 봐도 코퍼필드가 디킨스를 닮았다는 생각이 안 들던데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깐. 중산층 가정의 도련님 코퍼필드는 모친의 재혼으로 불행 열차에 탑승한다. 의붓아버지와 그의 누이는 주인공 모자를 맘대로 요리하였고, 코퍼필드를 질 나쁜 기숙학교로 멀리 보내버렸다. 그러다 모친의 장례를 치른 코퍼필드는 이제 학생이 아닌 노동자로 살아간다. 실제 디킨스는 어려서 부모와 사별하진 않았으나 집안이 파산하면서 일찍이 공장을 다녔다고 하니, 이만하면 하드코어 인생이라 볼 수 있겠다. 그처럼 코퍼필드에게도 험난한 가시밭길이 주어지는데, 정작 디킨스는 감정에 동요되지 않고 덤덤하게 써 내려간다. 진정 프로답다.
일터에서 도망친 꼬마는 유일한 혈육인 대고모를 찾아간다. 작품 전체를 통틀어 이 구간이 베스트였는데, 어린 친구가 절망하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어찌나 짠하던지. 한 성깔 하시는 대고모였지만 조카의 성품을 보고 양자로 삼아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게 한다. 그렇게 학업과 생활이 안정되자 코퍼필드의 진가가 날로 드러난다. 일찍부터 산전수전을 다 겪은 터라 또래들보다 훨씬 의젓하고 성숙하고 거기다 총명하기까지 했으니 주변에서 이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그야말로 엄친아 도련님의 재탄생이었다. 인생을 실전으로 배운 소년의 세계관은 점점 확장되어 다양한 이웃들과 친분을 쌓는다. 그리고 대고모의 뜻을 받아 법률인이 되기로 한다. 모든 게 잘 풀리다 보니 작품 초반의 우여곡절에 비하면 텐션이 떨어진 것도 사실이다. 물론 앞으로도 많은 허들이 설치돼있으나 내게는 코퍼필드의 유년 시절이 가장 인상 깊었다.
소년은 제 또래의 소녀가 있는 변호사의 집에서 하숙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만난 여사친이 평생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준다. 그녀는 연애 상담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는데, 먼 훗날 코퍼필드가 그녀에게 빠진다는 뻔한 클리셰가 있지만 좋게 넘어가자. 어느덧 학교를 졸업하고 독립하여 자취남이 된 주인공. 그 기념으로 나선 여행 중에 반가운 옛 친구 S와 조우한다. 질 나쁜 학교에서 인기 원탑이었던 S는 코퍼필드를 챙겨준 은인이었다. 하여 가는 곳마다 제 친구를 자랑하고 다녔던 주인공은 어마 무시하게 뒤통수를 맞게 된다. 그가 한때 사랑했던, 지금은 누군가와 결혼을 앞둔 짝녀를 S가 데리고 튀었단다. 이 사건은 많은 이들의 분노를 샀고, 코퍼필드의 순수에 비로소 때가 묻기 시작한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잘 먹히는 건 사랑과 전쟁이로군.
그 사건을 뒤로한 채 사회생활에 집중하는 주인공. 이윽고 여사친을 통해 또 다른 배드뉴스를 듣는다. 변호사 아빠의 밑에 있던 서기가 약점을 쥐고서 동업을 요구했단다. 모녀를 쥐락펴락해대는 서기가 실상 대표자나 다름없었고, 주종 관계가 바뀐 상태로 모녀는 그렇게 긴 세월을 보내게 된다. 코퍼필드가 손쓸 방법도 없는 데다 여사친도 그냥 모른 척해달라고 하니 별 수 있나. 한편 주인공은 직장 상사의 딸에게 반하여 매달리다가 결혼에 골인한다. 헌데 살림은 관심 없고 놀며 즐기는 게 전부인 철부지 아내였다. 몇 번의 시도로 기대를 접고 가정의 평화를 택했으나, 힘들 때에 의지할 곳이 없던 그의 우울함은 남몰래 익어가고 있었다. 잡념을 지울 생각인지 낮에도 일하고 집에 와서도 글을 쓰기 시작한 코퍼필드. 물론 가계를 위함도 있지만, 현실 도피의 이유가 크지 않았을까. 하다 보니 자신의 재능도 발견하게 되고. 실제로 디킨스가 변호사 사무실에 다녔고 신문기자로 활동하는 등 일에만 몰두하다가 현타가 와서 저술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단다. 아무튼 먹고사는 게 해결되고 나니 이때다 하고 날아드는 시련들에, 역시 인생은 실전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어찌어찌해서 여사친의 문제도 해결되고, S의 도주 사건도 정리되어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가나 싶더니, 철부지 아내가 병마 끝에 세상을 떠난다. 어쩜 이렇게 산 넘어 산인 걸까. 주변을 다 정리하고 외국으로 떠난 코퍼필드는 요양 중에 쓴 소설로 명성을 얻게 된다. 작가로서 인정받은 그의 상처는 아물었고, 다시 귀국하여 여사친과 재혼하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보다시피 이 작품은 많은 굴곡을 정직과 인내로써 이겨내는 착하디착한 소설이다. 단 한 번의 변화구도 없이 직구로만 승부하기 때문에 독자들 사이에서 평이 갈리는 편이지만, 등장인물마다 제 역할에 100% 충실했다는 점에서 나는 후한 점수를 주었다. 문학이 인간을 들여다보게 하는 수단임을 생각해 볼 때에,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그 기능을 훌륭하게 해냈다고 본다. 사실 자전소설이 지니는 화두나 교훈들은 다 거기서 거기이므로 괜히 뭔가를 끄집어내고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두꺼운 책들은 꼭 없어도 그만인 구간들이 많다고 입버릇처럼 투덜거렸는데, 이 작품에는 그런 구간이 일절 없었는데다 감정 개입하지 않고 끝까지 차분함을 보여준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돈키호테> 이후로 만족스러웠던 벽돌 책 깨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