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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주점 1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3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나는 아무리 좋아하는 작가라 해도 그 사람의 작품을 연달아 읽지는 않는다. 딱히 이유랄 건 없고 그냥 손이 안 간다. 그래서 한 작가의 책들을 줄줄이 읽는 사람을 보면 참 존경스럽다. 그런데 이런 나조차 줄줄이 읽어보고 싶게 하는 작가가 있었으니, 그 이름하여 에밀 졸라 되시겠다. <인간 짐승>으로 알게 된 졸라의 글은 다른 고전들처럼 문체도 어렵지 않고, 이중삼중 의미의 문장을 남발하지도 않아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 특징과 장점들이 <목로주점>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어 지루할 틈 없이 즐거운 독서를 하였다. 지난번에 발자크 작품을 읽고 프랑스는 나랑 안 맞는가 싶었는데, 졸라의 작품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같은 프랑스 고전 작가인데 둘이 어쩜 이렇게 천지차이인지 원.
작가는 생전에 ‘루공-마카르 총서‘ 스무 권을 발표했고, 그중 일곱 번째인 <목로주점>으로 부와 명예를 얻었다고 한다. 졸라의 대표작인 이 책은 분량도 꽤 되고 가지와 줄기 모두 굵직해서 요약하기가 쉽지는 않다. 술중독자 아비의 딸인 제르베즈의 결혼생활과 세탁소 사업이 주된 내용인데, 선한 그녀와 달리 인색하고 오만한 주변으로 인해 가정과 사랑, 직장과 신용이 풍비박산 나는 정말 필터나 보정이 하나도 안 들어간 날것의 이야기이다. 이런 개인의 추락을 아주 세밀하게 그려내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작품에 반영한 작가의 자연주의 기법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묘사가 어찌나 적나라한지 내가 실제 당사자라면 굉장히 민망할 정도여서, 왜 당대에 비난이 들끓었는지 알겠더라. 아무튼 먼 훗날 나 같은 독자들한테는 꿩 먹고 알 먹고였지 뭐.
십 대에 두아들을 낳은 제르베즈는 남편에게 버림받고 본격 미혼모가 된다. 어찌어찌해서 재혼을 했지만 웬걸, 시댁들이 밥맛 그 자체였더랬다. 원체 심성이 약한 데다 내편 하나 없던 그녀는 언제나 기죽어 지냈다. 그래도 진정성 있게 살다 보면 언젠가 자신을 알아줄 거라 믿었나 본데 현실은 전혀 아니었다. 그녀의 순수를 이용해먹는 남편과 이웃들로 항상 손해 보기 바빴는데 정작 그녀 본인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속 편한 소리나 하는, 정말 착함만이 전부였던 순진무구한 아낙네였다. 그녀의 미련한 순진함이 내 한숨을 몇 번이나 쉬게 했는지 모르겠다. 근데 제르베즈가 마냥 바보같이 착한 건 아니었다. 방탕한 구 남편과도 다투었고, 세탁장에서는 미친 듯이 난투극을 벌였으면서 왜 현 남편과 이웃들에게는 한없이 다정하게 대하고 쓴소리 한 번을 못하는 것인가. 나는 이게 가장 아이러니였다.
제르베즈의 현명치 못한 판단과 행동들은 여러 나비효과를 가져왔다. 가정폭력의 유년시절과 실패한 첫 결혼으로 소박한 삶이 평생의 목표가 돼버린 그녀는, 생존에 한없이 불안을 느끼면서도 정작 눈앞의 문제들을 바로잡지 않았다. 현 남편이 일도 안 하고 술 중독에 빠지려 할 때 어떻게든 뜯어말렸어야 했고, 경제가 나빠지고 있을 때 더 절약했어야 했고, 그녀를 향한 시댁들의 유언비어를 내버려 둬서는 안되었었다. 그러나 살기 바쁘단 명목으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 외면하였고 그 결과는 끝내 파산으로 보답받았다. 아무리 잘해줘도 이웃들은 뒤통수나 쳤고 시댁들의 비방과 루머를 고대로 믿으며 제르베즈를 대놓고 깎아내렸는데도 보고만 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위에서 말했듯이 제르베즈가 성깔 없는 사람도 아니면서 계속 성녀처럼 굴고 있는 게 영 맘에 들지 않았다. 이건 내가 죽고 나면 작가한테 가서 따져야겠다.
개인의 타고난 성정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환경이 절대적 요인임을 잘 보여준 예라 하겠다. 그토록 완강했던 제르베즈의 순수도 폭력과 가난과 세월 앞에서는 변모되고 만다. 주인공 부부 말고도 여러 서민들과 가정사가 나오는데 도대체 멀쩡한 곳이 하나도 없다. 자린고비, 아동학대, 간신배, 음담패설, 술 중독자, 불륜남녀 등등. 돈 없고 배움 없는 서민동네에서는 이 모든 게 너무도 자연스러운 그림이었다. 그 가운데에서 주인공 혼자 으쌰 으쌰 하고 있으려니 죽을 맛인 게지. 그나마 잘 돼가던 세탁소 사업이 몰락하게 된 원흉은 돌아온 구 남편이었다. 여기에 현 남편이 한 술 더 떠서 우정 운운하며 셋이 살자는 역대급 망언을 내뱉는다. 괴팍한 술 주정뱅이와 굴러들어온 기생충 때문에 돈은 줄줄 새고, 주변에 꾼 돈들을 갚지 못하게 되어 그녀의 신용은 바닥을 친다. 이쯤 되면 선하게 사는 것이 잘못된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선함 자체로는 잘못이 없고 죄도 아니다. 다만 여기에 성경 속 한 구절을 인용하면,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마10:16)‘는 말이 필요했던 거다. 나 또한 제르베즈한테 너무 가혹하다 싶었으나 그녀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단지 불쌍함만을 강조한 작품은 아니라서 잘 참았다. 안타까움에 가려져서 그렇지, 이 모든 사태가 전부 인과응보였기 때문에.
애가 셋이나 딸린 유부녀임에도 제르베즈는 우월한 미모 덕분에 남자 복이 많은 편이었다. 재혼 후에도 그녀를 사모하는 대장장이 연하남이 그녀의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준다. 나이는 한참 어렸지만 와꾸는 그렇지 않았으니 뭐 설렐 법도 했것다. 암튼 우정을 가장한 썸놀이를 가늘고 길게 이어가던 두 사람도 결국 파투가 난다. 유일하게 기댈 수 있었던 사람을 제 발로 걷어차버리고 만 상황이 되자 제르베즈보다 졸라를 욕하고 싶어졌다. 제발 그만해, 이러다 다 죽어... 하는 사이에 정말 인생 하직해버렸다. 그러고 나니 차라리 죽음이 더 그녀에겐 나은 선택일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건물에서 뛰어내리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조차 못 했다는 제르베즈를 보면, 그녀는 죽기 싫어서 목숨을 연명했던 게 아니었다.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진 이 생명을 잘 유지하고 보관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 때문이지 않았을까. 암튼 이번에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나게 읽었다. 겨우 두 작품 읽긴 했지만 에밀 졸라는 어떤 교훈과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이 시리즈를 기획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말한 자연주의,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데 여기에 무엇을 더 해석하고 연구하랴. 이만큼 썼으면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