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화가들 - 살면서 한 번은 꼭 들어야 할 아주 특별한 미술 수업
정우철 지음 / 나무의철학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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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 주는 가장 큰 기쁨은 색조, 화풍, 의미, 가치 등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아닐까 싶다. 물론 학문적으로 정립된 이론과 지식 체계가 있지만, 그런 이해가 없더라도 직관적으로 보는 즉시 전달되는 느낌과 감성은 오롯이 작가와 작품, 그리고 보는 나 사이에 만들어진 독립된 삼각 구도를 이루면서 안달복달하는 현실에서 깔끔하게 분리시킨다. 


여기서는 화가의 삶과 작품을 함께 소개하면서 작품에 대한 감상을 더욱 풍성하게 이끌어준다. 저자는 사랑을 추구한 화가들, 자존을 위해 모든 시련을 감수한 화가들, 세상의 냉대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화가들 등 세 가지 주제의 분류를 표방하면서 각각을 대표하는 화가들을 뽑아 도열한다. 


기존에 미술 수업 등을 통해 익숙한 화가도 있고, 그림을 본 적은 있지만 작자를 잘 몰랐던 경우, 그리고 작품도, 화가도 처음 접해 생소한 경우가 균형 있게 배치되어 적당한 친숙함과 인식적 호기심을 독서 끝까지 누릴 수 있어 즐겁다.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알폰스 무하는 단정하면서도 화려한 화풍 때문에 눈길을 끌었다. 곡선, 여성, 꽃 등을 중요하게 여겼던 아르누보 작가였던 무하는 가난한 사람들도 즐길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신념으로 포스터를 그려 길거리 자체를 전시장으로 삼았다는 데서 흥미로웠다. 광고 포스터 뿐만 아니라 성당의 그림까지 섭렵했으면서도 50대에 부와 명성을 넘어 서서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슬라브 서사시 연작은 작은 지면으로 보아도 웅장한 느낌이 들었다. 나치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장에 10만명의 슬라브인들이 모였다고 하니 체코의 별이 아닐 수 없다. 


툴루즈 로트레크는 종종 다른 곳에서도 단편적인 삽화와 작품을 보기는 했지만, 이 책을 통해서 온전히 그의 일생과 작품의 배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귀족 출신이지만 장애를 갖게 되면서 아버지의 외면 속에서 오히려 천재성을 발견한 그의 미술 입문기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같다는 생각을 했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대상의 본질을 간파하고 단순화하면서도 현실을 미화하지 않으면서 하층민의 일상을 담았기에 더욱 매력적이랄까. 


에곤 실레는 TV 프로그램에서 그의 작업이 이루어졌던 마을을 다루었던 적이 있어서 더욱 반갑게 느껴졌다. 민망할 정도로 솔직하고 담대한 시선, 고집스럽고 까다로워 보이는 터치와 색감은 볼품없고 흉측해보이지만, 자유로우면서도 도발적이다. 갈등과 추문의 문제적 화가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은 오히려 그의 인식 세계 속에서 다양성의 천착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투쟁의 기록을 미술의 주제로 삼은 케테 콜비츠나 메말라 비틀어지는 베르나르 뷔페의 표현 기법도 흥미로웠다. 


전문가의 해설을 들으면서 작가와 작품의 특징을 읽다보면 굵직한 전시회 몇 개는 다녀온 기분이 들 정도로 몰입도가 높다. 

그림은 화가의 언어입니다. 화가가 살면서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에 따라 그의 언어는 달라집니다. 그래서 같은 장면을 보고 그려도 화가마다 다른 그림을 완성하지요. 자신의 생각과 말과 경험을 포함해, 일일이 표현하지 못했던 모든 것을 그림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화가입니다. 그들의 인생을 따라가는 것은 어쩌면 그 화가의 언어를 배우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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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믿는데 기쁨이 없어서
마이크 메이슨 지음, 윤종석 옮김 / 꿈꾸는인생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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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과 알콜 중독에 빠졌던 저자는 우연히 90일 간의 기쁨의 실험에 착수한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주님 안에서 기뻐하겠다고 작정하면서 그 여정을 꼼꼼히 작성했다. 항상 기뻐하라고 명하신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기로 결심하면서, 과연 어느 때든지 기쁨을 누리는 것이 가능한지 스스로를 실험 대상으로 삼아 일지를 작성하듯 어떻게 기쁨이 가능했는지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놀라움은 첫 장부터 시작된다. 저자가 기쁨의 실험에 착수하기로 결정하기 10일 전, 친구의 10대 자녀 둘이 교통사고로 동시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었던 그들에게 닥친 불행을 앞에 두고 슬픔에 잠을 못 이루던 밤에 갑자기 기쁨에 대한 실험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 책을 그들을 위해 헌정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출발한다. 무모함을 넘어서서 부적절하기까지 한 이 생각에 압도되었는데, 그는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고백한다. 


비극과 기쁨의 혼재가 만들어낸 상황 속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어두움, 혼돈, 무의미, 슬픔과 닿아 있으며 반은 천국에 있고, 반은 지상에 있는 거룩한 친구의 가정을 통해 기쁨은 현실 세계의 냉엄함과 얽힌 실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표현한다. 


90여일간의 여정을 통해서 저자는 기쁨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은혜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우리의 상황과 조건을 뛰어넘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저 기뻐해야한다고 주문을 외우고, 의도적으로 기쁨을 쥐어짜는 것이 아니라 기쁨의 원천이 되는 근간을 이해하고, 기쁨을 인식하기에는 너무나 혼탁해진 세상을 비집어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누려야 하는 개념이라는 점을 공고히 한다. 


그러므로  기쁨의 소식인 복음을 두고, 두렵고 불안하며 불행하고 미묘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복음을 놓치고 있다는 점도 성찰한다. 기쁨이 사라질 때 예수님을 처음 영접하던 자리로 다시 돌아가야 하며 기쁨은 계속해서 커지는 속성이 있고, 근육처럼 사용하지 않으면 위축되며, 기분이 항상 좋은 것이 기쁨이며 행복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오히려 기쁨에서 오는 행복은 역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 나 자신에게 충분한 여유를 주는 것이며 행위에 압박감이 들지 않도록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내 것으로 누리는 것이라고 재정의하면서, 정죄, 무기력, 자기연민, 혼란이 올가미가 되지 않도록 경계하도록 간구한다. 


기분이 침울해지면 감사 기도를 통해 기쁨을 복구해야 하며, 하박국의 가르침대로 기쁨은 상황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선택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선포하면서 같은 맥락에서 불행은 중독이라는 점도 분명히 한다. 


작고, 어려운 매일의 선택을 통해서 내가 하도록 되어 있는 일을 찾아 전심을 다하는 것,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성령충만, 이 땅의 모든 문제를 천국의 능력으로 이기겠다는 결단, 어려움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대적하는 것, 여전히 죄인이면서도 죄에서 분리되어 의로워질 수 있는 복음의 기적, 100%의 헌신, 주님을 기뻐하는 것, 복음의 메시지에 대한 바른 이해, 엉뚱한 실수까지 포함되는 일상의 곳곳, 십자가의 그림자, 절제와 성찰 등을 통해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매일 만나를 거두어들이듯 기쁨도 매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난과 기쁨을 연결하는 것은 인내이며, 기쁨은 하나님이 원천이기에 기쁨이 없다면 복음이 아니라고 까지 가르친다. 


저자는 기쁨은 감정이 아니며 안식이며, 실체이며 즐거움이며 누림이자 행복이라고 자신의 실험을 결론짓는다. 


찬찬히 읽다보면, 죄에서 벗어나 천국에서 영생을 얻으니 기쁘다라는, 다순한 교리로 이해하는 기쁨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삶에 드리워진 영적인 기쁨을 발굴하고 채집하는 실험록에 공감할 수 밖에 없다. 우울증을 앓고, 고통과 상실의 경험자이면서도 누구보다 더더욱 기쁨을 말하고 누리는 역설이라서 더더욱. 

오랫동안 잠자던 봉오리에서 예쁜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기쁨의 실험을 통해 전혀 새로운 차원의 기독교가 내 앞에 열렸다. 이 새로운 영성은 아주 달콤하고 밝고 은혜로워서 나를 완전히 사로잡는다..중략..나는 믿는다, 드디어 나는 성경이 주는 영원한 기쁨을 충분히 믿어, 이 놀라운 약속이 나 자신의 삶 속에 이루어지는 것을 본다. 나는 결코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거짓말과 휘장은 찢어졌고 이제 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본래 기쁨에 흠뻑 젖도록 되어 있음을 확실히 안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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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 다스리기 30일
데보라 스미스 피게 지음, 김태곤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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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듯이 목적이 뚜렷하다. 행동하기 전에 태도의 절제,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태도의 금식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태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전제한다. 


감정이나 인지에 의해 촉발되는 방식으로 태도를 다루는 것이 일반이라면, 이 책은 성경 말씀에 비추어 성취해야 하는 중요한 목표를 저자가 나름대로 5가지를 분류하고, 그에 따라 대립되는 태도를 12개씩 뽑아 30일 동안 돌아보는 방식으로 기술한다. 중요한 목표는 소망을 안겨주는 태도 갖추기, 상처를 치유하는 태도를 갖추기, 관계를 열어주는 태도를 갖추기, 승리를 가져다주는 태도 갖추기, 삶을 풍성하게 하는 태도 갖추기로 설정되어 있다. 


이러한 기술 방식의 가장 큰 장점은 먼저 대충만 훑어봐도 60가지의 태도가 상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기껏해야 긍정적이거나 부정적, 진취적이거나 나태한 정도의 태도 정도만 떠올리는 내게는 다양한 태도의 직조가 삶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가 뽑은 것만 해도 60가지가 넘는데, 그동안 얼마나 많은 태도를 간과하고 있었던 것일까.


기독교 상담가답게 성경 말씀에 기초를 두면서, 매우 쉬운 삽화와 용어로 설명하면서도 독자에게 좋은 태도를 갖도록 끊임없이 견인하는 탁월함이 돋보인다. 


개인적으로 가장 도전이 되는 대목은 다투는 태도와 온유한 태도, 운명론적인 태도와 감사하는 태도,  완고한 태도와 유연한 태도, 조급한 태도와 인내하는 태도, 부족의 심리를 지닌 태도와 풍요의 심리를 지닌 태도, 피해의식을 갖는 태도와 과거를 극복하는 태도, 대충하는 태도와 탁월함을 추구하는 태도 등이었다. 


매혹적인 입맛의 자극은 없을지라도 곱씹을 때마다 새로운 맛을 내는 맨밥처럼 담백하면서도 영혼을 살찌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내가 평범할지 탁월할지, 불안할지 평온할지, 편협할지 관대할지, 또는 다른 어떤 습성을 드러낼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나의 태도임을 깨달았다. 선택이 나의 몫이기에 나는 관계적으로, 감정적으로, 재정적으로, 신체적으로, 영적으로 삶의 모든 면에서 건전한 쪽을 택하기로 결심했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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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의 꿈 열린책들 세계문학 123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박종소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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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중 처음으로 공연되었으며, 그의 아내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종종 이 소설의 주요 인물인 늙은 공작처럼 연기하는 것을 즐겨했다는 설명은, 독서의 도화선이 되기에 충분했다. 


소설의 줄거리는 매우 간단한다. 신분 상승의 천박한 꿈에 젖은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나이 들어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공작의 새로운 신부로, 자신의 딸인 지나이다 아파나시예브나가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어떻게든 노인 공작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애쓴다. 


그녀는 온 동네가 알아주는 허영심 많은 전략적 인물로, 침상에서 죽어가는 가정교사를 사랑하는 딸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오락가락하는 공작의 기억을 조작하고, 공작이 얼렁뚱땅 자신의 딸과의 결혼을 대중 앞에서 발표하도록 온 힘을 기울인다. 주도면밀한 그녀는 남편인 아파나시 마뜨베이치에게도 공작을 집에 초청했을 때 해야 할 말들을 미리 일러주지만, 그는 융통성이 없는 데다 통찰력도 부족하여 우스꽝스러운 면모만 보여준다. 


한편 지나이다 아파나시예브나를 마음에 두고 있던, 비열한 관리 모즈글랴꼬프는 그녀에게 청혼하고 답변을 기다리던 중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의 계략을 몰래 듣게 된다. 이에 격분한 그는 공작을 설득해서 그가 지나이다에게 청혼한 것은 꿈에서 했던 것이라고 공표하게 함으로써, 마리야의 모든 계획을 훼파한다. 


이 모든 소동이 지나가고 이후 빠벨 알렉산드로비치 모즈글랴꼬프는 모르다소프를 떠나지만 여전히 색을 좇고 청혼하며 퇴짜를 맞는 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다가 멀리 떨어진 지방의 도시 시장 부인이 주최하는 무도회에 갔다가 충격을 받는다. 눈부신 야회복을 입고 온몸에 다이아몬드를 반짝이면서 거만하게 자신을 맞은 시장 부인이 지나였기 때문. 그러나 그녀는 최상류 사회 출신의 어머니를 둔 고상한 자녀로 둔갑되어 있었다. 자신을 알아보고 잠시 흠칫했지만 이내 빼쩨르부르그의 지체 높은 공작의 이름을 들먹이고 고관들과 어울리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무도회에서 돌아온 모즈글랴꼬프는 울적하고 허탈감에 빠져, 출장 명령을 받자마자 황급히 떠난다. 도시를 떠나면서 공상에 빠진 그는 세 번째 역에 이르자 다시 본연의 자신으로 돌아온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들의 욕망은 서로 부딪히며, 욕망은 각자의 삶을 추동하는 중요한 동기로 작동한다.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딸을 통한 신분상승을, 늙은 공작은 아가씨와의 결혼을, 모즈글랴꼬프는 지나와의 결혼을 꿈꾸다 좌절하자 마리야의 계획을 실패로 견인하는 데 집중한다. 욕망들은 뒤엉키고 대립하면서 소설가의 표현대로 '메피스토펠레스의 조소'와 같은 결말로 나아간다. 


아마 마리야의 실패와 모즈글랴꼬프의 성공에서 소설이 마무리되었다면, 매우 밋밋했을 것 같다. 그런데, 노련한 작가는 마리야가 놀랍게도 부활하여 지나이다를 장군의 아내로 시집보내는 데 성공한 결과를 보여줌으로써 모즈글랴꼬프 뿐만 아니라 독자의 허를 찌른다. 더구나 순수한 사랑을 갈구하는 것 같던 지나이다는 모즈글랴꼬프를 한 숨에 제압할 정도로 농염한 귀부인으로 변신해 그 생활을 마음껏 즐기는 것으로 그려진다. 모녀의 달라진 삶에 놀란 모즈글랴꼬프 역시 잠시 충격을 받을 뿐, 다시 여정을 떠나면서 다시 본성으로 돌아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작가가 개인의 욕망을 세밀하게 조망하는 부분도 탁월하다. 가령 지나가 사랑한 가정교사는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데, 그는 아름다운 죽어감을 위하여, 오랫동안 가슴에 병이 있었음에도 그대로 두었음을 고백한다. 그는 다른 방식이 아니라, 폐병에 걸려 죽게 되면 지나가 자책하면서 자신을 찾아와 무릎을 꿇게 될 것이고, 그러면 자신은 그런 그녀를 품에 안고 서서히 죽어가는, 달콤하고 로맨틱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개인의 욕망들은 마치 지류가 합류하여 강으로 나아가듯 어느새 한 줄기로 합쳐져, 사랑의 퇴색과 도구화를 철저히 뒷받침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악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일까. 악은 의식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일까. 대작가는 단순한 이야기 속에도 큰 질문을 감춰둔다. 

어쩐지 그는 자존심이 상하고 모욕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춤을 추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울적하고 허탈감에 빠진 듯한 표정과 메피스토펠레스의 조소와 같은 웃음이 이날 저녁 내내 그의 얼굴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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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와 사랑 일신서적 세계명작100선 13
H.헤세 지음 / 일신서적 / 198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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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가 이 작품을 발표하고 20년 후에 '새로운 문제와 새로운 인간상으로 새로운 창작에 착수할 생각이었으나 자신의 장편은 대부분 지와 사랑에서 제기된 문제와 인간상을 변형시켜 되풀이한 작품'이었다고 회고했다는 대목을 읽자, 독서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는 인간 삶의 궁극적인 지향점에 영원한 진리에 대한 탐구와 사랑을 두고, 그것을 찾아가는 방법론에 몰두하면서 대조적인 두 인물을 창조해낸다. 


부단한 수련과 지적인 사색을 통해 진리를 인식하는 방법과 욕망을 바탕으로 경험 및 감각으로 부딪히며 진리와 맞닿는 여정을 교차시키면서, 결국에는 이 두 가지 방법론이 목표를 성취하는 데 있어서 서로를 보완하는 동시에 각자 정당하며 옳은 과정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지"를 대표하는 나르치스는 흠잡을 수 없는 태도를 지닌 데다 조용하며 뛰어난 학습 능력을 구사하는 신동으로, 수도원에서 교사의 역할까지 감당할 정도로 학자의 천재성을 발휘하는 인물이다. 그의 명징한 논리와 체계적 인식은 그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내므로 쉽게 다가가기 힘들 정도. 감성이라고는 전혀 없을 것처럼 냉철한 그는 어느 날 수도원에 들어온 골드문트를 남다르게 여기며 그를 각성시킨다. 


골드문트는 '사랑'을 드러내는 인물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수도원에 들어온다. 그는 나르치스의 겸비함과 절제력, 지적 성취를 우러르며 그를 닮고자 하지만, 점점 요원해지고 오히려 작은 유혹에도 쉽게 흔들리고, 어머니를 희구하며 수도원을 나와 방랑길을 떠난다. 


골드문트는 좀처럼 정착하지 못하고 수 많은 여인들과 사랑을 나누고, 금화를 지키려다 잠시 함께 했던 빅토르를 우발적으로 죽이기까지 한다. 그러다가 고해성사를 하려고 어느 수도원에 들렀다가 성모 마리아상을 보고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영혼의 아름다움과 생기를 느낀다. 그는 신부에게 소개를 받아 마리아상을 만든 니콜라우스를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며 조각의 세계에 빠져든다. 그는 나르치스를 생각하며 사도 요한 상을 조각하지만, 완벽한 기술로 완전한 미를 창조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와 경험을 희생할 가치가 있는지 회의하면서 스승을 떠난다. 


이후 페스트가 휩쓴 마을들을 지나면서 또 다시 사랑과 방랑의 길을 헤맨다. 그러다가 우연히 한 교회 옆을 지나다가 천사, 사도, 순교자 등의 경건한 석상을 보면서 가슴 속에 외경심, 헛되이 낭비한 지난 시간에 대한 공포심에 휩싸이게 된다. 아무도 없는 교회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간음하며 도적질한 자신의 삶을 고백하면서 왜 인간을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느냐며 이제는 신을 알 수 없다고 자조한다. 그리고 일체의 어떤 답변도 없는 그 자리에서 무너진 인간의 세계와 상관 없이 품위와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초연히 서 있는 석상들에게서 무한한 위로를 느끼게 된다. 또 자신이 사랑한 여인들과 스승도, 비록 그 이름과 생애가 알려지지 않더라도 그 석상과 함께 서 있기를 희망하다가, 언젠가 그 석상과 함께 무언의 상징으로 조용히 함께 서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골드문트는 스승의 도시를 찾아가 스케치로 연명하지만, 이내 다시 새로운 방랑을 시작한다. 이후 백작의 아내 아그네스와 사랑에 빠지지만, 백작에게 들켜 사형에 처할 위기에 빠지게 된다. 그는 죽기 전 미사를 위해 찾아올 신부를 죽여서라도 어떻게든 생명을 지켜야겠다고 다짐하는데, 뜻밖에도 수도원장이 된 나르치스가 나타난다.


나르치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골드문트는 함께 수도원으로 가게 되고,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의 배려 덕분에 수도원의 작품의 조각한다. 이 과정에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대화를 통해 지와 사랑의 세계에 대해 표현하고 교류한다. 


나르치스는 사색은 형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개념과 공식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형상이 끝나는 곳에서 철학은 시작되지만, 곧 인간의 불완전성을 깨닫게 된다고 일갈한다. 그러면서 존재란 부분적이며 완전한 존재는 신뿐으로, 인간은 무상하며 변화 과정에 있고,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힘에서 행위로 나아가며, 가능성에서 실현을 향해 나아갈 때에만 완전한 신성을 닮아간다고 설명한다. 이것이 곧 자아실현으로, 예술가는 인간의 우연적인 요소를 해방시켜 순수한 형체의 인간상을 만들어낼 수 있고, 순수한 사색 역시 수학처럼 어떤 심상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사고를 통해 문제를 풀어내듯 관찰하고 추정하는 가치를 끊임없이 응용하면서 완전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수도원의 작품을 완성하고 잠깐의 여행을 다녀온 골드문트는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나르치스는 우리에게 평화는 없으며 매일 부단한 싸움으로 쟁취하여 새롭게 해야 하는 평화가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 한다. 골드문트는 죽어가면서 어머니가 자신을 유혹하고 가슴에서 심장을 끄집어낸다며 자신은 형상을 만들었으므로 기꺼이 죽어야 하며 어머니 없이 어떻게 사랑할 수 있으며 죽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나르치스의 가슴에 불을 지핀다. 


골드문트의 삶을 살았다고 고백한 헤세는 속세에 있는 우리 삶의 객기와 방랑을 옹호하면서 그것이 영원성과 결합할 때 진실한 도약이 있으며, 때로는 세속에서 벗어나 순수한 지적인 세계를 동경하지만, 그것 역시 불완전하여 사랑이나 신비와 접목될 때 완전성을 획득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통해 이성과 감성의 두 양면을 가진 인간의 특성과 그 나아갈 바를 읽어가는 즐거움이 크다. 

어쨌든 간에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 주었다. 즉 고귀한 곳에 예정된 인간은, 분방한 생활의 혼란 속에 아득한 정신으로 빠져들어 육체에 먼지와 죄가 깃든다해도, 비겁함과 뒤엉키지는 않을 것이요, 심중에 신성을 멸치 않을 거요, 심연의 흑암 속에서 길 잃어 방황해도 그의 영혼의 깊은 곳에서는 신성한 광명과 창조성이 단연코 빛을 발한다는 것을 깨우쳐 준 것이었다.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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