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풍경 -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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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앎을 공유하기 위해 누군가의 용기가 필요한 분야가 있다면, "법"은 단연 으뜸의 자리를 차지하고도 남는 것 같다. 법치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면서도, 법을 모른다는 선언이 오히려 덕망으로 추앙받는 현실, 그 안에서 법은 어느새 특정인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렸다. 법학을 전공했고, 짧지만 검사 생활을 했으며, 법학을 가르치는 교수로써, 최고의 법, 헌법을 최대한 가볍고 이해하기 편하도록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앎의 소유가 한정되고, 공유의 지경이 좁아질수록 특권은 더욱 드높아지고, 더없이 강력해질 수 있다는 상식, 그것을 깨기 위해 가장 필요한 덕목은 "용기". 이 책은  법과 그 안에서 특권을 누리는 법조인을 향한 이단 법조인의  "용기"에 관한 서술이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저자가 헌법 정신으로 꼽는 것은 단연 "그럼에도 불구하고"다. 정의의 이름으로 아무렇지 않게 괴물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검찰,  수사 상황에서의 피의자 진술 거부권의 행사, 당연하게 여겨지는 차별과의 치열한 투쟁, 시대정신과 법정신의 구현, 그 안에서 변치 않고 도도히 흘러야할 제 1원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것이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헌법의 좌표가 이 선언과 함께 바로 눈앞으로 잡아당겨진 느낌마저 받았다. 원래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스스럼 없이 참고하고, 뒤적이고, 인용할 수 있는 헌법이어야 하는데, 누군가의 시선으로 재해석되고, 주석이 달리고, 정의되고, 한정된 잘려나간 헌법을 추앙하면서, 우리의 헌법을 그들의 헌법으로 떠넘기는 데 일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활자들은 뜨겁게 파고든다.  


  행정법 시간에, 법에 규정되지 않은 정의도 가능한가, 교수님이 물으셨던 기억이 난다. 짧은 질의였지만, 섬광처럼 날카로웠던 물음. 돌아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자세를 견지하는 한, 실정법에 규정되지 않았다고 해도, 얼마든지 용납할 수 있는 정의의 실현도 가능하다는 생각에 더욱 확신이 든다. 당연하다고 생각됐던 왕정정치를 깨고,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하고, 심지어는 범죄자의 인권도 보호해야한다는 법정신의 구현, 결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들이대며 철옹성들을 부수고, 두드려대며 쌓아온 승리의 결과물 아닌가.  


  그러므로 법으로 지배되는 복잡한 사회 속에서, 인간의 진짜 인간됨을 복원하고, 인간다움을 실현하기 위해서, 앎의 경계를 허물고, 모두의 이해로 넓히려는 법학자의 용기있는 깨어있음이, 더욱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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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의 비밀 - EBS 다큐프라임, 타인을 움직이는 최상의 커뮤니케이션 전략 설득의 비밀
EBS 제작팀.김종명 엮음 / 쿠폰북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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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EBS 다큐프라임 <설득의 비밀>편을 다 보지 못한 아쉬움을 다행히 이 책을 통해 부족하지만 해소하게 됐다. 7:3의 법칙과 사실-데이터-정보-지식-지혜의 피라미드를 간과하며,  감성에 기댄 설득에 힘을 실어온 행보를 확인하게 된 것은  큰 수확. 설득의 유형을 분석하고, 대응 전략을 소개하면서, 설득의 실험을 통해 확증해나가는 과정은  흥미롭고 참신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설득의 비밀이라고 확신하기에는 여러 실험 여건이 미흡하고, 제시된 법칙이 다소 표면적이고 작위적인 느낌마저 든다. 오타도 눈에 띄는 것을 보면, 책으로서의 설득력은 사실 반감되는 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적 설득의 비밀을 탐색하고, 독립적으로 연구하고 실전에 적용하려는 움직임은 박수 받아 마땅하다. 그 어느 곳에서도 설득의 기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있는 우리 현실을 생각해볼 때, 깨지고 좌절하고 무너지는 이들이 있는 한, 설득의 비밀을 체계화하려는 노력은 분명 값진 도전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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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생명과 환경, 공동체적 삶 問 라이브러리 4
장회익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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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생명을, 현상으로서의 생명과 주체로서의 생명으로 구분한 점이 탁월하다.  '우주의 빈 공간 안에서, 생명현상이 주위의 아무런 도움 없이 자족적으로 지탱해나갈 수 있는 최소 여건을 갖춘 물질적 체계'를 온생명이라 할 때, 온생명 안에는 개체로서의 낱생명과 보생명이 포함되며, 현상으로서의 생명은 이 틀을 의미한다는 점, 그리고 주체로서의 생명을 고려할 때, 이미 우리 신체를 이루는 물질 속에는 이미 의지를 포함하는 주체적 의식을 가지도록 하는 준비가 되어 있어, 결국 나와 물질은 별개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의지와 주체를 자각하는 과정과 물질의 인과관계를 통해 나타나는 결과들을 이원론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 인식을 바탕으로, 나라는 주체가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공동체 주체로 승화되는 과정을 통해서만이 나의 확장이 가능하며, 온생명 사상을 덧입어 결국은 평화와 공존이 가능하다는 데까지 논리는 확대된다.  

     다만, 이상적인 공동체를 위하여 온생명 사상을 바탕으로 합의된 이념과 목표를 설정하고, 개체적 삶과 공동체적 삶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견 공감할 수 있으나, 생명을 이루는 물질 안에 이미 의지에 관한 주체 의식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관점을 대입해볼 때, 생의 의지를 확충하기 위한 방법론이라면 만들어진 그대로 자연스럽게 놔두는 것, 그것 말고 과연 어떤 방법으로 온전히 생명을 구현할 수 있을런지 의문스럽다. 이념, 목표, 체제 등은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생명의 틀 안에 존재해 있던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고 덧붙여진 것들 아닌가.  

   이상을 지향하자는 단순한 윤리적 구호가 아니라, 물리학적 관점에서 연구해볼 때, 저자는 "생명"은 나에서 머물러서는 안 되고 우리라는 확장된 틀로서만이 온전히 생명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으로,  내가 곧 자연이고, 자연이 곧 나이며, 내가 곧 우리이며, 우리가 곧 내가 되도록 구조화된 생명의 틀을 벗어나는 순간, 생명은 구현될 수 없고 유지될 수 없다는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한다. 그러므로  온생명 사상에 대립한 발전, 경쟁 따위의 논리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있는 그대로 둘 수 있는 용기, 존재 자체를 왜곡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관용, 나와 또 다른 나를 향한 사랑. 결국 인간됨의 회복 또는 인간 본성의 복구만이 생명을 지속적으로 환류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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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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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순간 좌파 기독교란 단어는 우리 사회에서 참 많이 낯설어졌다. 굳이 우파라는 말을 붙이지는 않더라도, 기독교는 우파의 상징인양 정형화되고 있다.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 것은, 진보라면서도 자본주의 사회의 틀은 그대로 수렴하면서 조금씩 고쳐나갈 뿐이라고 믿는 개혁주의자들이라고 일갈하는 김규항. 독설가가 쓴 <예수전>이라니. 대표적인 좌파 논객이라고 불리우는 그가 만난 예수님은 누굴까.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실 때, 성경에 기술된 "측은히 여기시고"란 대목에 그는 집중한다. 설명을 들어보니, 원어로는 "애가 끊어진다"는 표현이며, 처음 만난 병자들을 보면서 "애가 끊어질 수 있는" 예수님이야말로 혁명가라는 것이다.

    영성 없는 혁명, 혁명 없는 영성을 논하며 닭의 목을 비틀 듯 어떤 망설임도 없이 위선을 뒤틀어버린다. 삶으로 보여주지 못하는 혁명, 사는 것이 되지 못하는 영성. 그 언저리에서 구호만큼 매력적인 것이 또 있을까.  잘 살고 있다고, 바른 방향으로 진리의 편에 서 있다며,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기는 얼마나 쉬운가. 이미 누릴 것을 누리면서, 배울 만큼 배운 지식으로 감동을 이야기하고, 미래를 그려나가는 교양인들에게, 어쩌면 위선의 몸짓과 언어인줄도 모르고 거칠 것 없이 질주하는 무심한 내 심연을 향해,  촉을 세워 그가 내던지는 한 마디..'측은히 여기시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오른 뺨을 때리는 자에게 왼쪽 뺨도 내밀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는, 인간 자존감의 회복까지 승화시키고 있다. 오른 뺨을 맞는다는 것은 상대가 손등으로 때렸다는 것이며, 왼쪽 뺨을 내민 것은, 비굴하게 여기도 때려달라거나 단순히 상대를 용서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맞는 나 역시 존엄한 인간이니 다른 사람들과 같이 오른쪽 뺨을 손등으로 때릴 것이 아니라, 때리려거든 왼쪽 뺨을 때리라는 비폭력 저항 정신의 발로라는 것이다.

    죽기까지 각오하고 처자식과 재산을 버리고 떠난 제자들에게, 혁명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는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웠으나, 도무지 이해 못할 역설의 십자가를 택하는 모습을 보면서 변화산에서 졸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스승의 행보를 마지막까지 인간적으로 존중하고 싶어 자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식의 상상력도 발휘한다. 부활 사건을 겪고 로마의 박해를 받은 후 쓴 복음서에 대해, 당시 시대적, 사회적 정황을 곁들여 세세히 분석하면서, 인간 예수에 대하여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했을런지, 저자는 철저하게 불의 언어로 되살려내고 있다. 이 책만큼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하는 책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예수님은 영성을 갖춘 진짜 혁명가의 삶을 사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불행한 시대와 억압받는 사회 속에서 한 인간으로써 철저히 주어진 삶을 사신 예수님을 만난 저자가,  왜 궁극적으로 불온한 좌파일 수밖에 없는지, 김규항의 다른 책은 읽지도 않았는데, 감이 온다. 돈과 명예와 기득권의 논리로 점철된 세상을 깨고 싶다며,  철저하게 세속의 논리로 다스려지는 세계의 심장을 겨누면서, 언제나 가지지 못한 자,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 곁에 섰던 살아있는 예수님을 만났는데,  좌측으로 걷지 않고 어떤 길을 갈 수 있을까, 저자는 많은 고민을 했을 것 같다. 영성에 관한 한 이 책만큼 도전이 되었던 책은 없었다. 혁명에 관한 한 이 책만큼 에둘러 말하지 않고 정곡을 겨누는 날카로운 책은 만나보지 못했다.  영성과 혁명의 두 이정표를 가지고 다시 복음서를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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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으로 본 한국역사 - 젊은이들을 위한 새 편집
함석헌 지음 / 한길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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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밤, 한 줄기 바람에 잠시 창이 설겅인다. 폭염으로 들끓던 도심의 열기는 어느새 무심한 어둠 속에서 산산이 흩어지고 지난 며칠동안 열대야로 끝끝내 잠 못 이루고 뒤척였던 고생스런 경험도이제는 바람과 더불어 한 풀 꺾이는 듯 하다.

   무슨 까닭인지 여름에 접어들 무렵 엉뚱한 꿈이 생겼다. 진중한 고민 없이 사회초년병으로 떠밀려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저 시키는 대로 내달리다가 갑자기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이라고 할까.시인의 표현대로 인생의 거친 노영에서 한순간 발 잃고 쫓기는 짐승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명하므로 달리기는 하는데 그 질주를 옹호할만한 나만의 답변이 없음을 깨닫게 되면서 '나'란 존재는 한없이 옹색해졌고, 생활은 막막해졌다. 한 번 가슴에 내려앉기 시작한 답답함은 일순간 감정의 틈새에 숭숭 구멍을 뚫어버리곤 지금껏 아무 문제없던 모범적인 사회인의 행보를 성큼 가로막아 섰다. 일상은 맥빠졌고 머리 속은 자갈을 잘게 갈아 한꺼번에 뒤섞은 마냥 무겁기만 했다. 그러므로 뜻하지 않게 찾아온 이 혼돈을 뒤엎어 의지를 관통하고 심장을 꿰뚫어 나의 살아가는 까닭과 내가 선 지금의 좌표의 의미를 온건히 드러내 보일 명쾌한 바람, 무더위의 맹폭을 이기고 기계처럼 반복되는 무의미한 일상의 이면을 파고들어 시들어 가는 영혼을 소성시킬 살아있는 '바람'을 만나보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 아닐까 싶은 그날의 클릭은 내겐 참으로 큰 행운이다. 하릴없이 반복적으로 클릭을 남발하며 넷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YMCA관계자의 추천도서 기고를 읽게 된 것이다. 시련과 고달픔의 연속이었던 만학의 학창시절을 지낸 필자는 청계천의 헌 책방 구석에서 우연히 발견한 함석헌 선생님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밤을 세우며 읽었고 역사관, 종교관, 세계관, 인생관을 관조하며 출발선에서 다시 다짐하였노라면서 속도로 치닫고 뿌리를 잃어버린 현대문화에 병든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무언가에 쫓기듯이 서점으로 달려가 당장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구입했고 떨리는 심정으로 읽어 내려가면서 광폭스러울 만큼 시원스런 '활자'의 바람을 맞아 그 어느 해보다도 시원한 여름나기를 할 수 있었다. 열정과 동요, 절망과 좌절, 그리고 희망으로 이어지는 한민족 반만년 역사의 맥을 짚는 선생님의 통렬한 뜻풀이를 뒤따르자니 연일 30도를 웃도는 무더위에도 지지 않을 만큼 열심을 품고 활자를 읽어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선생님께서는 '식물 생활의 근본이 되는 땅이 흙과 물이 합한 것이 듯이, 인간 생활의 근거가 되는 사실은 인생적인 면과 역사적인 면으로 되어 있으며 물 없는 흙 없고 흙을 떠난 물 없듯이 역사 없는 인생도 없고 인생을 내논 역사도 없다'고 단언하셨지만 사실 나는 부끄럽게도 역사 없는 인생도 있을 수 있다는 듯 역사적 각성 없이 잘도 내달려왔다. 그동안 '역사'란 암기의 편린들로 제시되어 어떻게든 기억 속에 구겨 넣어야할 사실의 나열이거나 몇 몇 초인적 무리들의 일신에 따라 그 큰 줄기가 뒤바뀌는 영웅담 정도로 인식되었다. 역사는 언제나 '내'것이 아니었고 '그들'의 것이었다. 한번도 민중의 고통과 고뇌, 아픔과 슬픔, 자각과 결심으로 채워진 역사의 행로를 엿보지 못한 까닭에, 이제는 정말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삶으로 바탕 지어진 역사를 만날 수 있겠다는 기대감으로 책장을 넘기는 순간 순간 사뭇 비장해지기까지 했다. 게다가 지금껏 알고 있던 사관에서 벗어나 굴곡진 한민족의 삶을 전혀 새로운 기독교적 입장에서 고찰해 보겠노라는 선생님의 선언은 그 비장함의 두께를 더욱 두텁게 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편협한 교리주의나 독단적 종교관으로 극단적인 한민족 중심의 역사관을 피력하시면 어쩌나, 염려 비슷한 감정마저 일었다. 그러나 읽어갈수록 선생님의 '뜻'은 단지 기독교란 특정 종교적 관념이 아니라 모든 종교를 초월하여 마침내 진리의 논리를 획득한, 보다 넓은 시야에서만 가꿀 수 있는 위대한 통찰력의 산물임이 명확하고도 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뜻'은 세계와 동떨어져 한민족의 융성과 번창만 소망하는 기복의 역사관이 아니라 세계가 하나로 엮어지는 어울림 속에서 한국인의 존재 가치를 찾고 인류 전체의 공영을 위한 길 찾기의 지표로 자리 매김하며 벅찬 희열과 함께 오래된 갈증을 씻어내는 샘물이 되었다.   


   단군 조선의 당당했던 역사의 출발이 풀무 속의 삼국시대로 이어지고 고난의 연옥 길을 걷듯 부끄럼이 퍼붓던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진정한 '나'를 잃어버려 중국과 왜에게 끝없이 침노당한 고려로 내려온 그 자취. 거란과 여진을 몰아내 옛 영토를 복원하려던 북진정책이 깨어지고 몽고바람으로 쑥대밭이 되어버린 고려왕조의 영락, 기습으로 찬탈한 수난의 오백년 조선왕조의 중축이 부러지며 치욕스런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해방의 기쁨을 맛본 것도 잠시 6 25전쟁과 4 19혁명, 5 16 군사 쿠데타로 시작된 암흑 같던 군사정권...역사의 굴절된 고비를 마주할 때마다 한국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고 '한국인이 그러면 그렇지'란 자괴감에 침잠되지 않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어쩔 수 없이 치부를 한껏 드러내어 운명의 갈림길에서 똑바로 정신차리지 못해 오욕의 역사를 그려낸 우리 민족의 잘잘 못을 피눈물로 고발하는 선생님의 절절한 절규와 꾸짖음은 어느새 '나'에게로 쏟아지는 질타가 되었다. 이민족의 말발굽에 짓밟힌 민족정신은 '나'를 버리고 '밖'에서 가치를 찾는 일그러진 현재의 내 모습으로 투영되었고 이상을 쫓기보다는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며 당장의 살 길을 도모하는 것이 우선이라던 무리들의 비열한 지론은 미처 깨닫지 못한 허튼 일상을 쫓는 내 신념이었다. 고난을 참고 넘어서면 유토피아가 올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나 무조건 과장하고 유리하게 첨삭하며 역사를 유린 하는 자세가 아니라 '삶이 고난'이라는 대 전제하에 고난이 갖는 의미를 재해석하고 현재의 삶의 자양분으로 삼을 때 역사는 참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선생님의 주장. 마지막 장으로 치닫는 독서의 막바지에 이르면서 '뜻'은 서서히 가슴속에 섬광처럼 박히는 별이 되었다.

   반만년 찬란한 역사라고는 하나 마음을 잃어버렸고 꿈을 떨쳐버려 결국 껍데기만 남은 허섭한 유산만 매만지곤 그래도 살아내었다는 궁색한 변명으로 자기 위안을 삼는 역사가 아니라 숱한 수난 속에서 갈보처럼 우롱 당하였으나 그 역사의 숨은 뜻을 찾아 미래의 새로운 이상으로 풀무질해내는 살아있는 역사, 그 참 뜻을 읽어내는 눈. 곧 눈 뜨임의 과정을 위하여 호된 질책과 꾸지람이 아니면 안되었다. 더듬다보면 모질도록 거친 표독스런 힐난도 있었고 눈물을 쏟아내지 않고는 도저히 다음 장으로 넘길 수 없게 하는 애잔한 언어의 장막도 있었다. 그저 '수난의 왕녀'란 오명으로 우리 역사의 속성을 단정짓는 것이 아니라 늙은 갈보의 모습에서 인생의 참가치를 찾아내는 예술가의 눈으로 고난 속에 숨은 역사의 진정한 의미를 속시원히 풀어내는 선생님의 피맺힌 육성 앞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고난과 시련의 지난 역사에 대한 부끄러움은 긍지와 애정의 시선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고난이 죄를 씻고 인생을 깊게 하며 위대하게 한다. 핍박을 받아 대적을 포용하는 관대함을 얻고 궁핍과 형벌을 참아 자유와 고귀를 얻을 수 있다'는 직언과 '세계사의 하수구. 불의를 받아들여 보이지 않는 무한의 바다로 통하여 끝없이 도덕적 시대정신을 정화시키며 나와 세상을 건지는 사명을 다하는 세계사의 하수구로 내 속을 뚫어 하나님에게 직통하는 지하도를 파라'는 격려. 그것은 한국인이며 동시에 세계인으로 살아가는 '나'를 향한 묵언의 명령이었다.

   시대를 아우르며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큰 어른이 있다는 사실, 얼마나 깊은 위안이며 자랑인지 혹 선생님은 아실런지.. 책을 읽기 전 '역사적 존재'로서의 '나'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어떤 실적을 쌓고 무엇을 축적할 것인지 사회인의 답습된 질문에 답하기 위한 맹목적 질주는 점화되었다. 역사가 왜 중요하며 살아가는 데 무에 그리 도움이 된다는 것인가. 나만 잘 살면 되고 그저 평탄한 일상만 영위하면 그만 아닌가. '역사적 존재'로서의 내가 잠든 사이 '개인적 존재'로서의 나는 이기심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절대균형을 찾지 못하고 기우뚱거리는 그 찰나, 어떤 운명처럼 그 위태로운 질주를 가로막고 메마른 음성으로 내 이름을 부르고 단순한 언어적 유희로 내 존재를 뭉그리는 병폐적 일상을 딛어 반만년 역사의 혈맥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민족혼을 깨우라는 부르짖음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통해서 '나'는 그저 부평초처럼 떠돌다 생을 마감하는 들뜬 존재가 아니라 선생님의 말씀대로 대한민국이란 대지에 자리잡고 서 끝없이 양분을 빨아올리는 한민족의 뿌리로서 전 세대의 영욕의 역사 속에 숨은 뜻을 간파하고 그 뜻으로 바로 서 다가올 세대의 평화와 안녕을 도모하는 '고리'임을 깨닫게 되었다. 원했든 그렇지 않았든 나는 태어남과 동시에 한국인이 갖는 거대한 역사적 조류에 편입되었다. 부정할 수 없는 태생적 운명, 한.국.인. 북핵문제, 계층과 지역, 세대간 화합, 사회개혁과 경제적 안정, 도덕성과 신뢰의 회복, 남북통일의 염원,진정한 민주주의의 뿌리내림. 나아가 세계 인류의 공영과 발전.. 이 사회와 시대가 떠 안고 있는 모든 문제는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결국 '나'의 것이었다. '개인적 존재'로부터 '역사적 존재'로의 탈피. 나의 인생과 한민족 역사의 존망이 씨실과 날실로 엮어지는 그 중심에 던져진 선생님의 숙제다. 사력을 다하여 선생님은 나를 깨우셨고, 진정한 '기상'은 철저히 내 몫으로 남았다. 지금 조각나 제시된 현실을, 앞으로 마주하게 될 미래의 청사진으로 이어나가는 힘은 즉흥적인 감흥이나 막연한 기대감이 아니라 꼼꼼하고 내실 있는 이성과 냉철한 판단력이 아닐까.

   창을 열고 폐부 깊숙이 '바람'을 들이마신다. 이제 나의 호흡은 어제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 현실의 얄팍한 개인적 계산 안에서 한없이 굴절되고 큰 꿈을 빼앗겨 웅얼거림으로 소진하는 일상 안에서 힘 잃는 얕은 호흡이 아니라 한국인 세계인으로서 갖는 동시대인의 벅찬 연대의식으로 뿜어져 나와 마침내 전세계의 평화와 안녕이란 큰 꿈으로 직진하는 깊고도 힘찬 호흡이어야만 한다. 선생님이 보여주신 역사의 터널을 뚫고 온 지금, 나비가 허물을 벗고 새로이 성장의 삶을 살아가듯 이제부터 나의 '질주'는 역사가 증명한 '뜻'의 덧옷을 입고 한국인이 갖는 시대적 사명감으로 무장한, 축복받은 고난의 '정진'이다.

(2004 한길사 독후감 공모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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