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지음 / 사회평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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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책장을 덮고 글쓴이가 검사가 아니었더라면, 변호사가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삼성에서 근무하지 않았더라면..엉뚱한 궤적의 질문을 나도 모르게 쏟아냈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법치 위에서 살아가는 어느 재벌가의 모순을 적확하게 담아내려면, 법리를 아는 동시에 재벌을 직면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책의 족적은 김용철 변호사의 이력과 간담이 아니면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으리란 확신 때문이었다. 저자 스스로는 어렵고 힘들어 어떻게든 비껴가고 싶은 길이었는지 몰라도, 책을 읽는 내내 그를 위해 예비된 길이었던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이유야 어떻든 무노조 삼성, 신경영 삼성, 도전정신과 글로벌 마인드로 무장했다는 초일류 기업 삼성을 두고, 경제가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요즘 시대, 누가 이렇게 솔직하고 직설적인 화법으로 예리한 칼끝을 겨눌 수 있을까.  


   회사와 회장의 이익을 저울질할 때, 자연스럽게 회장 일가의 권익으로 기우는 구조조정본부의 핵심 참모들, 비자금을 관리하고 현금 다발 수송에 참여하는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들, 법조계와 언론을 향한 치밀하고 치열한 전방위 로비, 단 61억으로 그룹을 장악하려는 불법 승계, 사위와 외척을 배제하고 검증되지 않은 능력으로 직계끼리만 벌이는 경영 혈투, 수장이 독단과 아집으로 결정한 사업 실패를 불평 한마디 못하고 우량 회사가 떠맡아야하는 왜곡된 그룹 문화, 기형적인 출자구조와 이를 막기는커녕  우회로를 터줘 결국 이건희 회장의 삼성 그룹 전체 지배구조를 강화하는 데 한몫 단단히 한 사법부의 이해 못할 판결들, 막도장과 거짓 서류로 이사회를 꾸며 회사법을 농락하는 수려한 삼성 행정력, 도덕과 원칙 없는 경제 제일주의가 현실을 얼마나 더 암담하고 처참하게 만들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끔찍해진다. 이렇게 곪고 썩었는데도, 삼성이 여지껏 잘 버틴 것은 그나마 음지에서 땀흘린 노동자와 전문 기술 인력 때문이라는 발견도 위안이 되지 못한다. 저자의 표현대로 ‘실력도 신통치 않고, 인품이 썩 뛰어난 것 같지도 않은데 대단한 실력자 취급 받은 사람’들이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바뀌어도 반칙과 변칙을 무기 삼아 철옹성을 쌓고 거칠 것 없이 경주하는 한, 판도는 크게 바뀌지 않으리란 영리한 판단이 앞서는 까닭. 
    

  책을 읽기 전 김용철 변호사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삼성 문제로 직격탄을 날릴 때만 해도 결과야 어떻든 그 시작의 행보만으로도 가장 잘 한 일이라고, 이쯤에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난 후 삼성을 고발한 것보다 이 책을 집필한 것이 가장 훌륭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치 민주화의 기치를 들 때 시대를 깨우는 책들이 있었다. 활자들이 격려했고, 무너진 가슴들을 세워 나갔다. 경제 민주화를 위한 시대적 과제를 앞에 둔 지금, 역시 양심을 뒤흔들고 영혼을 깨우는 책이 필요하다. 이 책이야말로 그 시발의 첫 걸음이 되리라 생각한다.  


  삼성을 끝내 배신한 배신자, 뭔가 이득을 챙기려고 꼼수를 부리는 몸부림...고발을 바라보는 이견들이 난무했었다. 저자에게는 로댕의 연인, 끌로뗄의 한 마디를 남기고 싶다. ‘바람이 불면 순식간에 사라질 사람들이 아니라, 폭풍우가 불어도 끝까지 곁에 남아 있을 사람들을 바라보라’는 것, 그리고 힐난하고 비난하는 이들에게는 홉스의 조언을 덧붙이고 싶다. 누가 이 일로 이득을 보는지 따져보면 실체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김용철 변호사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폭로와 고발로 얻은 이득이 무엇이었는지 따져보면 좋을 것 같다. 힘없고 이름 모를 이들과의 숱한 연대, 그리고 삼성의 실체를 알려 국민에게 경제 민주화의 시초를 당긴 것이, 과연 그들에게 어떤 실제적인 이득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인데 말이다. 
   

  저자는 모든 독자에게 숙제를 남긴다. 정의가 패배하도록 방치하는 게 옳은 일이 될 수 있도록 공범이 될 것인지, 아니면 결국에는 ‘역시나’를 뒤집고 끈질기게 경제 민주화의 길로 나아가는 행보에 의연한 박수를 보내며 작은 힘이라도 더하는 동지가 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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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위하여 2
이문열 지음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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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택>이후 거의 10여년 만에 이문열씨의 소설을 읽게 된 것 같다. 소설의 내용보다는 문체를 탐닉하는 데 집중했던 시절, 작가의 무게감 있는 필력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전적으로 기존 체제에 순응했던 장씨 부인의 삶을, 주입되고 강요된 것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며 거창한 주제로 포장하고, 나를 위시한 많은 여성에게 ‘인간’이 아니라 먼저 ‘여자’로 살기를 강요하도록 하는 데 작가가 앞장서고 있다는 배신감은 한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 같다.  


<황제를 위하여>를 읽고 난 후 이제는 앞으로 한동안 치열한 시대 속에서 살아야했던 작가의 삶의 처세를 잊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시대를 거부하는 것보다는 삶과 역사는 원래 그런 것이라고 이해하면서,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투쟁하고 저항하는 모든 행동들을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부질없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자신감을 깃들이는 것. 그리고 이러한  지적 근거들을 고전으로부터 수렴하여 빼어난 필력으로 뽑아내는 작가의 천재성에 대해 내내 씁쓸한 감탄을 되내일듯 싶다. 지적으로 뛰어난 이들은 언제나 자신의 행보를 논리성과 합리성으로 뒷받침하지 못하면 안절부절하곤 하는데, 이런 의미에서 <황제를 위하여>는 모든 불의를 바라보고 있으나, 가만 앉아 있던, 또는 가만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이들에게는 큰 위안이며 안식처가 아니었을까, 잠시 허튼 생각도 스쳤다.  


 서문에서 작가는 요새의 젊은이-그러니까 1980년대 후반-들이 서양의 철학이나 고전을 숭상하면서,  동양의 원류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어 동양적인 것의 소중함과 귀중함을 일깨우기 위해 소설을 집필하게 됐다고 주장했지만, <정감록>을 드리우고 엉뚱한 황제를 앞세운 소설의 결과는 결국 노장사상을 덧입힌 허무주의, 무정부주의로 이어져, 시대의 중심에서 치열하고자 했던 젊은 가슴들을 일순에 소강시키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의심마저 든다.  


 자신이 천명을 받은 황제라고 믿었던 정씨의 실록을 옮기면서, 작가는  4․19까지만 해도 제법 황당하고 어수선하게 느껴질 정도로 굵직한 삽화들을 배치했지만, 이후 군사정권의 도래와 맞물려서는 정처사의 도가에의 몰입에 지나치게 지면을 할애한 것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처사의 늙음 때문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구한말, 일제시대, 한국전쟁을 관통하며 이어지는 소설의 맥은 결국 고전과 역사를 들춰보면 이 모든 것이 이미 전에도 있어왔던 것이고, 결국 변화와 정진을 주장했지만,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식의 한탄으로 이어지기 때문.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올려놓아도 끊임없이 굴러 떨어질 돌덩이를 두고 전력질주하는 것은 결국 어리석음이라는 거짓 달관자의 단언처럼 느껴졌던 까닭도 있었다.  


 어쨌든 소설로서의 재미는 진중한 문체와 방대한 고전의 인용, 돈키호테식의 이야기 배치로 한껏 살려냈다. 아쉬움이 있다면, 소설의 도입부와 마지막 부분의 지면이 상대적으로 작아 본론으로 들어가고, 본론으로부터 나올 때, 이야기의 매듭이 다소 매끄럽지 않은 느낌이 있다. 작가 스스로도 인정한 부분이고 보면, 편집과 출간 사이에서, 작가도 시간에 쫓겼던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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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 1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2
금난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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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날수록 옛 것들이 점점 좋아지는 것 같다. 이제부터라도 클래식 음악을 많이 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순전히 호기심의 발로. 음악적 상상력은 물론 관련 지식이 턱없이 부족한 내게 딱 맞는 책이다. 바로크 음악, 고전주의, 낭만주의, 신고전주의...음악 수업 시간, 암기의 편린들로 쏟아져 나왔던 개념들이 이제야 차근차근 이해된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가들의 대조적인 삶과 그들이 음악을 통해서 추구한 이상을 읽고 있노라면, 음악 역시 시대의 사조와 기류 속에서 변형되고 발전된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또 동시대의 음악이라도 음악가마다 다른 삶의 이력과 개인적인 철학의 배경 속에서 여러 방향으로 굴절되고 표현된다는 사실도 발견하게 된다. 클래식 뿐만 아니라 모든 음악이 오선지의 음계를 뛰어넘어 오랜 시간 사랑받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저자가 직접 추천하는 음악과, 추천 이유를 읽으니 클래식 음악의 감상법도 얼핏 배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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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정의의 조건 問 라이브러리 1
김우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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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단어는 때때로 젊은 가슴에 그 무엇보다 뜨겁게 불을 붙인다. 억눌린 젊음이 시리다고 느껴질수록, 정의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쳐 존재를 태우고도 남음이 있을 만큼 뜨거워진다. 그러나 주저함 없는 혈기와 정의에의 확고한 의지가 손잡을 때, 그 위험성을 스스로는 절대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통찰 없는 정의에의 의지 구현이 쓰린 결과로 연결되는 비극을 피해가려면 지혜가 필요한데,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훌륭한 조언자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정의의 동력이 시혜적이며, 방과자적인 동정심이 아니라 분노와 복수심에서 시작된다는 통찰이 인상적이다. 로버트 솔몬의 표현대로, 거의 창자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는 자기에 대한 불가침성의 느낌, 그에 대한 어떤 종류의 침해, 간섭, 모욕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하는 느낌이 훼손될 때 복수심과 분개심이 나오고, 이것들이 정의의 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경험컨대, 뼛속 깊이 굴욕당하지 않고서는 지속적인 정의에의 동기를 품어 올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기심을 갖기 마련이며, 이기심이 분노를 잉태하고 복수심을 자라게 하며, 이 순환 속에서 결국은 원한의 체계를 공고히 하게 된다. 더구나 사회적으로 허락된 원한의 분출, 그것을 시행하는 데 있어 ‘정의의 이름으로’란 구호만큼 매력적이고 실제적인 것은 없을 것 같다. 살펴보면, 이 분노로부터 출발한 정의는 ‘위대한 거부’라고 칭할 수 있는 현실 부정에서부터 출발되나, 이것이 정의에의 동력이 되고 나면, 부정의 지속을 위해 끊임없이 부정할 대상을 찾고 또 만들어야 하고, 이 부정의 지속이 자아가 되며 결과적으로 인간성이 왜곡될 수 있다는 지적은 가슴 깊이 새겨야할 것 같다. 때로는 부정과 분노가 정의에의 추구를 지속하도록 하는 동력이 될 수도 있지만, 이념으로 지양된 부정은 추상적이고 전체적인 성격을 지니면서 인간성을 부정하는 힘의 도취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셸러를 인용하면서, 정의에의 동기는 사랑의 질서로부터 시작되어야한다고 제안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그것에 고유한 완성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행위의 편향이며 모든 존재는 개체로서 하나의 거대한 질서의 부분을 이루고, 이 질서는 현재의 가능성을 구현하면서 궁극적으로 유기적 총체를 지향하는 것인데, 모든 것은 자기 나름의 운명 또는 사명을 통해 사랑의 질서의 일부를 이루고 스스로 사랑을 통해 사랑의 질서를 확인하고 그 완성에 참여한다’는 셸러의 주장은 기독교 정의관과 동일하다. 사랑이 정의의 동력이 되면, 사심 없는 진리에 대한 헌신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사랑이 요구하는 자기 희생조차도 자기 존엄성의 바탕 위에서 자기 실현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설명에 적극 공감했다.  


   정의의 동기로써 사랑과 부정의 가장 큰 차별점은 시각의 편향성일 듯 싶다. 사랑이 동력이 될 때는 온전한 질서에의 참여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므로, 어느 때든 상황 전체를 인식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옳을 수도 있지만, 상대가 옳을 수도 있다. 자신의 불완전성을 수용하는 데서 출발하므로 끊임없이 자신의 행위나 생각이 온전하거나 완전한 것인지 부단하게 검열하게 되는데,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정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심은 지속적으로 씻겨 나간다. 사심이 표백된 동기는 자기 희생과 헌신도 온전한 질서에의 참여케 하는 과정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부정의 동력 하에서는 원한의 복수가 목적이 되므로 상대가 서 있는 좌표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 분개와 분노와 원한이 풀릴 수만 있다면 그것이 정의이므로 자신의 동기를 검열할 필요성은 상대적으로 적어진다.  잔인한 부정에서 출발한  정의는 나 또는 우리의 정의가 절대적으로 옳아야한다는 가정이 뒷받침될 때만 정의로써 정의가 될 수 있는 한계에 부딪힌다. 그러므로 ‘극단의 정의는 극단의 상해’가 성립될 수 있다.  원한 풀기식 정의는 종국에는 질서와 균형을 파괴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불완전한 인간이 언제나 온전한 정의를 외칠 수 있다는 가정이 과연 합리적일까. 니체가 주장하는 초인도,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온전한 정의의 정립이 역사의 발전 방향이라고 한다면, 이런 의미에서 추론할 때, 인간 넘어 온전한 정의를 가능케 하는 초월적 존재, 즉 신이 존재해야한다. 불완전한 인간의 편향성은 부분에의 몰입을 종용할 뿐이다. 부분성을 가지고는 정의를 완성할 수 없다. 거짓 정의를 세우고 정의라고 착각할 수는 있겠지만. 전체를 목도하면서도 개별성과 구체성을 동시에 포괄할 수 있는 속성, 그것을 완전성이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인류가 찾아낸 것 중 위 조건을 갖춘 것은 사랑이 유일하다. 그러므로 완전을 완성하는 신은 사랑이어야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엉뚱하게도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구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구원의 전제는 사랑일진데, 그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면 개인의 구원에만 머무를 수는 없다. 사랑을 덧입게 되는 순간 사랑의 질서를 이루기 위한 정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노예화, 착취, 인종차별 등을 철폐한 정치사회 운동은 그리스도 정신에서 나왔으나 이를 추진한 세력은 그리스도 교회의 현실에 실망한 계몽적 지식인과 그 지지자들이었다‘ 옥중서신에서 읽고,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대목.   저자의 주장과 여러 학자의 정의론을 도합할 때, 사랑을 동력으로 가진 지속된 정의의 확립을 가장 잘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이들은 그리스도인이란 추론 때문이었을까. 그리스도인이 사회 문제를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까닭, 다시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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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과 질병의 사회학
사라 네틀턴 지음, 조효제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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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 매몰될 수 있는 관점을 바로잡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다. 특히 보건교육과 학교보건정책의 변화를 갈망하는 열정을, 어떤 사회적 맥락과 구조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갈무리할 수 있을런지 그 해답을 얻은 것만 같다. 영국의 보건교육 운동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오히려 가장 부러웠던 부분. 보건교육 운동이 건강과 질병에 대한 개인의 책무성 강조, 사회적 맥락과 이해를 배제한 접근, 단순한 구호식 보건교육 캠페인으로 이어졌다며 단점을 줄줄이 열거했지만, 역으로 치열한 보건교육운동 속에서  이러한 비판적 관점이 형성됐으리라 생각하니, 우리의 열악한 보건교육 현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이 강조하는 기조를 우리 현실에 그대로 대입하는 것은 오류가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라이프 스타일 변화에 무게를 둔 보건교육을 이미 충분히 실시해왔고,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건강 평등권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정책 변화를 모색해온 선진국의 배경과 우리의 현실은 전혀 다르다. 공공 보건교육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학교 보건교육의 근간조차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만이라도 외쳐야 할 판이다.  한계가 있을지라도 건강을 위한 개인의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 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환경적이고 구조적인 접근을 앞세우는 것은, 오히려 범사회적인 건강 통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의학이 과학과 손잡으며 보건의료계의 지배 세력으로 등장했으며, 출산과 같은 건강 행위조차 의료화하면서 의학의 영역을 넓혀왔다는 시각은 한번쯤 숙고해볼 주제. 환자의 건강 신념을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획일적인 보건교육으로는 건강 행위 선택을 담보할 수 없다는 지적도 담아두어야할 것 같다. 라이프 스타일 강조의 보건교육이 갖는 한계도 귀담아들어야할 내용이다. 건강행위의 선택권이 자유롭지 못한, 건강을 위한 타협의 연장선에 놓인 사회 계층에 대하여 어떤 접근이 필요할 것인지는, 학교보건정책의 변화에 있어서도 앞으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몸이 가장 의심할 바 없는 계급적 취향의 구현으로 나타난다는 브루디외의 선언과 몸이 사회적 불평등의 재생산에 기여하고 있다는 쉴링의 관찰도 지금껏 생각해보지 못한 내용이었다.  

보건의료제도 내에서 의료인들의 권력할거주의에 대한 논의도  흥미롭다. 지배 집단은 주로 외부인의 전문직 접근을 제한하면서 내부 사안을 자체적으로 처리하는 배제 전략과, 관련 있는 준전문직에 대한 직종간의 통제를 행하는 구획 전략을 펼치는 경향이 있고, 피지배 집단은 자신을 배제한 직업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포괄전략을 구사하거나, 조산사처럼 역으로 배제 전략을 구사하여 자신의 지위를 높이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내용은 다른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직업 폐쇄 전략일 듯. 환자가 단순히 의료인의 지시를 받는 객체가 아니라 보건의료인과 동등한 주체로써 자리매김해야한다는 일관된 주제는 보건의료 변화의 중요한 기준선이 될 것이고, 이러한 흐름을 관통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분야별로 상세한 예시와 이론을 설명한 점에서, 저자에게 깊이 감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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