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를 위하여 2
이문열 지음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2000년 6월
평점 :
절판


 <선택>이후 거의 10여년 만에 이문열씨의 소설을 읽게 된 것 같다. 소설의 내용보다는 문체를 탐닉하는 데 집중했던 시절, 작가의 무게감 있는 필력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전적으로 기존 체제에 순응했던 장씨 부인의 삶을, 주입되고 강요된 것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며 거창한 주제로 포장하고, 나를 위시한 많은 여성에게 ‘인간’이 아니라 먼저 ‘여자’로 살기를 강요하도록 하는 데 작가가 앞장서고 있다는 배신감은 한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 같다.  


<황제를 위하여>를 읽고 난 후 이제는 앞으로 한동안 치열한 시대 속에서 살아야했던 작가의 삶의 처세를 잊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시대를 거부하는 것보다는 삶과 역사는 원래 그런 것이라고 이해하면서,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투쟁하고 저항하는 모든 행동들을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부질없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자신감을 깃들이는 것. 그리고 이러한  지적 근거들을 고전으로부터 수렴하여 빼어난 필력으로 뽑아내는 작가의 천재성에 대해 내내 씁쓸한 감탄을 되내일듯 싶다. 지적으로 뛰어난 이들은 언제나 자신의 행보를 논리성과 합리성으로 뒷받침하지 못하면 안절부절하곤 하는데, 이런 의미에서 <황제를 위하여>는 모든 불의를 바라보고 있으나, 가만 앉아 있던, 또는 가만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이들에게는 큰 위안이며 안식처가 아니었을까, 잠시 허튼 생각도 스쳤다.  


 서문에서 작가는 요새의 젊은이-그러니까 1980년대 후반-들이 서양의 철학이나 고전을 숭상하면서,  동양의 원류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어 동양적인 것의 소중함과 귀중함을 일깨우기 위해 소설을 집필하게 됐다고 주장했지만, <정감록>을 드리우고 엉뚱한 황제를 앞세운 소설의 결과는 결국 노장사상을 덧입힌 허무주의, 무정부주의로 이어져, 시대의 중심에서 치열하고자 했던 젊은 가슴들을 일순에 소강시키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의심마저 든다.  


 자신이 천명을 받은 황제라고 믿었던 정씨의 실록을 옮기면서, 작가는  4․19까지만 해도 제법 황당하고 어수선하게 느껴질 정도로 굵직한 삽화들을 배치했지만, 이후 군사정권의 도래와 맞물려서는 정처사의 도가에의 몰입에 지나치게 지면을 할애한 것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처사의 늙음 때문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구한말, 일제시대, 한국전쟁을 관통하며 이어지는 소설의 맥은 결국 고전과 역사를 들춰보면 이 모든 것이 이미 전에도 있어왔던 것이고, 결국 변화와 정진을 주장했지만,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식의 한탄으로 이어지기 때문.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올려놓아도 끊임없이 굴러 떨어질 돌덩이를 두고 전력질주하는 것은 결국 어리석음이라는 거짓 달관자의 단언처럼 느껴졌던 까닭도 있었다.  


 어쨌든 소설로서의 재미는 진중한 문체와 방대한 고전의 인용, 돈키호테식의 이야기 배치로 한껏 살려냈다. 아쉬움이 있다면, 소설의 도입부와 마지막 부분의 지면이 상대적으로 작아 본론으로 들어가고, 본론으로부터 나올 때, 이야기의 매듭이 다소 매끄럽지 않은 느낌이 있다. 작가 스스로도 인정한 부분이고 보면, 편집과 출간 사이에서, 작가도 시간에 쫓겼던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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