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 실천론.모순론 레볼루션 시리즈 1
마오쩌둥 지음, 슬라보예 지젝 서문, 노승영 옮김 / 프레시안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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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오쩌둥의 책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시대가 오기 전, <모순론>과 <실천론>을 읽었던 세대들의 희열과 뜨거움은 무엇이었을까. 혁명에 대한 갈망이 젊은 혈맥을 맥박질한, 그 시대 정신을 읽어보고 싶은 호기심이 동했다.

   혁명을 박제화하고, 더 이상 꿈꾸지 않는 사회, 혁명을 이야기하면서도 여전히 혁명과 어색한 시대. 마오쩌둥의 어록 속에서 무엇이 그들을 뜨겁게 했고, 울부짖게 했는지 찾아보고 싶어졌다.

   마오쩌둥이 주장하는 인식론의 핵심은 사회적 실천이다. 마오쩌둥은 논리는 소위 일이 되게 하는 외부 규칙이 있고, 인간의 인식이 그 규칙에 부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자신의 사상이나 지식이 외부 세계의 규칙에 부합하도록 하여, 자신이 원했던 결과를 얻으려면, 단순한 교조주의나 경험주의로는 도달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마오쩌둥은 인식의 1단계에서는 각 사물의 현상, 일면, 외부와의 연관성을 인상으로써 취득하고, 사회적 실천을 하다보면 비약적 인식의 질적 변화가 일어나는데 비로소 인식의 2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 사물의 본질과 전체를 꿰뚫고 내부적 연관성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성적 인식은 감성에서 시작되므로, 감각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인식의 심화를 위해서는 이성의 발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실천이 진리를 발견하게 하고, 실천을 통해 진리를 검증하고 발전시켜야한다는 주장, 마오쩌둥이 젊은 혈맥들을 두드린 문구들이었다. 마오쩌둥은 실천-인식-재실천-재인식의 순환을 명령하면서, 관념론과 경험론을 경계했다.

   마오쩌둥은 레닌이 주장한 '대상의 본질 자체에 있는 모순'들의 대립과 투쟁의 현실에서 어떻게 변증법적 역사관을 적용할 것인지도 고민했다. 그의 예리한 관찰력과 예지력은 <모순론>에서 드러난다. 그는 모순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고려하면서, 그것이 주요 모순인지, 비주요 모순인지 따져야한다며 혁명을 실천한 현실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정확히 드러냈다. 그의 주요 모순, 비주요 모순론 덕분에 국공합작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 투쟁의 명분을 획득했고, 다시 국민당과의 투쟁 속에서도 공산주의 혁명 명제의 선명성을 과감하게 드리울 수 있었다.

   <문건주의 반대>에서 언급한 '조사하지 않으면 발언권도 없다'는 선언은 신선하기까지 했다. 조사가 없으면 계급 평가와 사업이 관념화되며, 정확한 투쟁 전술을 펼칠 수 없다고 지적한 점, 계급을 세분화하여 조사하여야 할 대상을 구체화 한 점이나 조사시 누가 참석하고, 어떻게 회의를 하며, 공산당원 스스로 조사하고 철저히 기록하도록 주의를 기울인 대목은, 아이러니하게도 경영학의 대부 피터 드러커의 경영 지론과도 닮았다.

   마오쩌둥은 세계의 모든 사물과 종류는 변화하지 않고 정적이라는 형이상학적 역사관과 달리, 유물론적 변증법적 역사관은 사물 내부의 모순에 따라 발전해간다고 주장했다. 또 그가 주장한 <인식론>에 따르면 그는 정해진 외부 규칙이 있고, 그 규칙에 부합하게 인식을 객관화해 나가는 것이 모순의 대립을 뚫을 수 있는 운동의 본질이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결국 따져보면 그가 주장하는 유물론적 변증법도 형이상학적 역사관이 주장하는 바처럼 종국에는 어떤 변화되지 않는 이상적인 궁극의 정적인 세계가 있다는 전제 하에 그와의 간극을 좁히려는 추동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책을 읽고 나니, 모순론과 실천론의 대가가 어떻게 대약진 운동을, 그렇게 관념적이고 경험적으로 몰아붙여 실패에 이르게 했는지 그 과오에 의문이 생겼다. 바닥으로부터의 혁명을 이룬 그가 왜 권력의 정점에 이르자 조사하고, 실제로부터 인식하고 실천하는 전술을 체계적으로 세우지 못했는지 궁금해진다.

  그럼에도 어쨌든 이념과 사상을 떠나 마오쩌둥의 책을 읽어야하는 이유를 꼽으라면, 이 '추동'에 초점을 맞춰야하지 않을까 싶다. 머리 속에 그려진 이상을 이야기하면서, 왜 현실과 차이날 수 밖에 없는지 설명하고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 고민하자는 혁명론, 그것으로 가슴이 뜨거워지고 싶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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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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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윈은 이기적 인간의 이타주의 역시 진화의 산물로 간주했다. 이타주의를 통해 공의로움이 확산된 집단이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집단을 이김으로써, 인간의 DNA에 자연스럽게 이타주주의가 스며들었을 것이란 주장이다. 이 이론의 진위 여부를 떠나 인간이란 동물이 받아들인 이타주의의 핵심가치인 정의, 흔한 주제이면서도 제대로 된 분석이나 설명을 대하기 어려웠다. 그동안 둑에 가둬 두었던 물이 한꺼번에 쏟아지기라도 하듯, 사회의 정의가 그 어느 때보다 회자되는 이 때, 이기적 인간이 지향해야할 진정한 정의는 무엇인가, 하버드 대학에서 20여년간 정치철학을 강의한 저자의 질의는 그러므로 더욱 치열하다. 철학자들이 제시한 정의론을 소개하면서, 어떤 정의관을 지향할 것인지 스스로 택하라는 질의처럼 느껴져 더 긴장됐다. 
 

   저자의 소개에 따르면 벤담, 밀 등은 공리주의를 내세우며 쾌락의 가치가 확대되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했다. 칸트는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야한다면서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을 극대화할 수 있어야 정의를 포섭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롤스는 공정한 계약, 호혜주의의 원칙에 의한 동의를 강조하면서, 차등원칙을 정의론에 도입했다. 서로의 운명을 공유하고, 우연히 주어진 선천적이거나 사회적인 환경을 자신을 위해 이용하려면 그 행위가 공동의 이익에 도움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성취와 사회적 분배의 결과가 결코 자신의 능력과 비례하는 것이 아니며, 개인이 속한 공동체의 사회적 환경에서 주어지는 것이 많으므로, 공동의 이익을 돌아보지 않고서는 정의를 논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의 특성과 그 개인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역할이 가장 적합하게 일치될 때 정의가 이루어진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관은 기독교의 정의론과 비슷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그 발전이 정의관의 발전과도 비례한다면, 정의관은 개인적 관점에서 벗어나 공동체를 지향했고, 나아가서는 인간 사회 뿐만 만물과의 조화를 꾀하는 쪽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판단해도 틀리지는 않을 듯 싶다.

   동양에 속한 우리의 전통적 정의관은 오랫동안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의 정의관과 비슷했다는 생각을 했다. 우주 창조의 질서를 중시하고, 인간의 존재를 존중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런데, 서양식 정치 사회 제도의 안착, 자본주의의 발전, 물신주의의 팽배, 이념 대립의 뼈아픈 시대 상황을 거치면서, 오히려 벤담, 밀의 공리주의적 정의관으로 퇴보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워진다. 쾌락이 극대화될 수 있다면, 쾌락의 가치로 정의가 환산될 수 있다면 그만이라는 식의 사회 분위기가 점점 위세를 떨치는 것 같다. 공동체 중심에서 오히려 개인 중심으로 그 지향점이 축소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어쨌든 하버드 대학의 학생들이 이렇게 밀도 있게 정의론을 배우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정의론을 암기해야할 편린으로 배우는 대신, 사회 현상과 결부된 살아있는 정의론으로 배우면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자의 음성을 제대로 살려내 함께 동행하고 공부할 수 있는 그들의 학습 여건이 또한 부러웠다. 단지 학점을 얻기 위해 수강했을지라도, 정의론을 들은 젊은 대학생들이, 살아가는 동안 강의의 기억들을 어떻게든 떠올린다면, 그것만으로도 미국 사회의 대중 지성은 멈춤 없이 정진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버드 대학이 아니라, 우리 대학에서 20대의 풋풋한 젊음들이 고민할 정의론 강의는 개설될 수 없는 걸까. 번역본이라도 읽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으로 마음을 다스리기는 뭔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다. 우리의 대학에서 우리의 목소리가 실린 그런 정의론 강의를 읽어보고 싶은 욕심은, 비단 나만의 것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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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 시민을 위한 민주주의 특강
도정일.박원순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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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나, 극심한 이데올로기 대립의 전쟁터를 지나온 대한민국에서 이보다 더 강력하게 민주주의 생각하기를 저지한 질의는 없었던 것 같다. 당장에 눈앞에 보이는 배고픔이 있고, 맹목적인 살육도 버젓이 펼쳐지는 마당에 한가하게 민주주의나 묻고 있을 때냐는 힐난은, 민주주의에 대한 감수성의 싹을 자르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밥도 그럭저럭 먹고 살만 하고, 야만에 가까운 무법의 시대를 이제는 어느 정도 관통한 것 같은데도, 여전히 민주주의를 화두로 삼는 일은, 속없는 한량이나 이상주의자들의 공허한 외침처럼 치부되고 있는 것 같다. 민주주의를 소수의 전유물로 취급하거나, 인기몰이의 대표적 표상인양 그려내는 우스꽝스러운 시대, 여기 우리가 서 있는 지점은 어디이고, 우리가 나아가야할 좌표는 어디인지 돌아보고 싶어졌다. 그 의뭉스런 반추와 상상 속 중심에 '민주주의'가 서 있었다. 그렇게 많이 듣고, 그렇게 많이 읽었건만, 민주주의의 실체는 제대로 배워보고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으니, 우스워진다. 아래로부터 이뤄낸 민주주의라고 했지만, 결국은 위에서 해석해 준 대로 민주주의를 배웠으니, 그럴 만도 하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결국 참여와 자유, 그리고 평등이다. 김상복, 김종철, 김찬호, 도정일, 박명림, 박원순, 오연호, 우석훈, 정희진, 진중권, 한홍구, 홍성욱 등 민주주의 특강을 진행한 강사들의 강의 내용과 방식은 달랐지만, 모두가 참여, 자유, 평등을 강조했다. 국민 주권, 삼권분립의 도식화된 민주주의 대신, 참여, 자유, 평등으로 여는 생활 속의 민주주의로 시선을 옮기자, 여전히 민주주의를 화두로 삼아야하는 까닭이 선연해진다. 덩어리 국민의 이름으로는 와 닿지 않는 민주주의가, 국민의 자리 대신 시민 개인으로 치환하는 순간,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 분명해지는 것이다. 생활 속 민주주의 없이, 물질적 부로만 측정되는 잘 사는 것의 의미는 결국 사회적으로는 독재로 귀결되고, 개인적으로는 인간의 인간됨을 발현할 수 없는 감옥 속의 부요처럼 불행한 생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인간됨은 참여하고, 자유를 누리며, 평등한 대우가 보장되지 않을 때, 철저히 파괴되고 유린되는 개념이니까. 민주주의는 개념과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과 실천의 내용이다.

   김상봉 교수의 학벌사회에 대한 대응이 흥미로웠다. 자녀들에게 '어차피 인생은 불행하다. 절대로 행복하게 살 생각 하지 마라. 다만 신나게 살아야한다' 는 교수님의 지론과 더불어 책 읽는 아이, 예술적 감수성과 인간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가진 아이로 교육해야한다는 조언은 특히 더 새겨야할 고언이다. 진중권 교수의 가상현실, 증강현실, 혼합 현실에 대한 소개는 또 다른 민주주의의 공간 인터넷 세계에서 왜 평등이 중요한지, 쌍방의 소통이 절실한 것인지 정확하게 꼬집고 있다. 홍성욱 교수의 과학기술의 민주적 재구성 강의는 신뢰의 중요성을 과학자의 시선에서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특히 위험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열 가지 요소를 소개함으로서, 우리가 지향해야할 민주주의에 대한 과학적 사고를 정치하게 한다. 비자발성, 불평등성, 위험에서 도망갈 수 있는 방법이 발견되지 않았을 때, 새로운 위험일 때, 인간이 만든 위험일 때, 두려운 것일 때, 과학자들이 그 내용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을 때, 전문가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 등의 요소는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제 현상을 분석할 때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겠다. 박원순 변호사의 대안 실천론은 민주주의의 개념은 이해했으나, 방법을 잘 알지 못해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시민들에게 실천적 방법을 제대로 소개하고 있다. 조직하고, 운동을 일으키고, 변화를 주도하는 시민운동의 결이 잘 녹아 있다.

   이제는 제도적, 정치적 민주화에서 사회적, 생활의 민주화로 옮겨가야할 시점이다. 민주주의 인식과 더불어 실천하고 행동하는 시민들이 많아지려면, 다시 민주주의를 말하고, 생각해야한다.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느냐고 물으면, 주저 없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면, 이 책부터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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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나이스비트 메가트렌드 차이나 - 새로운 세계를 이끌어가는 중국의 8가지 힘
존 나이스비트 & 도리스 나이스비트 지음, 안기순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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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선의 변화가 때로는 본질을 꿰뚫는 초석이 될 때가 있다. <메가트렌드 차이나>는 중국에 대한 시선의 변화에서부터 시작한다. 중국 외부에서 바라보는 중국이 아니라, 중국 내부에서 바라보는 중국을 이야기한다. 수평적 민주주의 역행, 인권 유린, 공산주의 독재에 의혹을 품는 서방의 시선에서 멀찍이 떨어져, 수직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중국 정치 체계의 특성, 중국식 자본주의의 특징, 문화 향유와 경제적 안정을 지향하는 샤오캉 사회를 향한 비젼, 집단주의적 사고와 하이구이파의 활약상을 중국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기반 위에서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다. 외부의 잣대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중국의 실상이, 저자가 제시하는 내부의 스펙트럼을 통과하고 나면 세밀하게 재해석된다.

    한편 읽는 내내 중국의 저력을 상기하면서, 현대 중국 사회의 기초를 닦은 덩샤오핑의 정치적 무게감을 제대로 실감했다. '정신의 해방'을 주창한 덩샤오핑은 정치는 공산당 중심의 사회주의로 안정을 꾀했고, 경제에는 적극적으로 개방과 개혁을 도입해 자본주의의 안착을 견인했다.

    책을 읽고 나니, 중국의 변화가 가장 두려운 것은, 기저에 깊은 역사로부터 쌓인 문화의 힘이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더 두터워졌다. 덩샤오핑은 문화와 예술의 기반 없이 쌓이는 경제적 부가 가져올 해악을 경계했던 것 같다. 깊이 있게 향유할 수 없는 부요는 천박과 타락을 불러올 것이고, 정신의 강박으로 굳어지리란 판단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지만, 결론적으로 맞아 들어가고 있는 듯 싶다. 뛰어난 식견이다.

    굴곡진 현대사를 지나오면서 중국 국민 스스로 근육과 핏줄에 아로새긴 자부심과 강인성, 새롭게 떠오르는 중화사상, 높은 교육열과 문화에의 긍지, 공산당 일당 체제의 정치적 안정 속에서 차근차근 경제적 부를 축적해가는 놀라운 상인정신. 2050년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되리라는 저자의 결론은 결코 빈 말이 아니다.

   인권의 문제, 정치적 자유에 대한 갈망, 티베트 독립 운동을 비롯한 민족 갈등의 조율, 심각한 부의 편중 현상 등 앞으로 중국이 풀어나가야 할 문제는 산적해 있다. 그러나 중국은 숱한 역사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체득하고 내면화한 여러 모략들로,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전혀 새로운 방식을 전개하면서 난제들을 타개해나갈 수 있으리란 확신마저 든다.

   편견에 사로잡힌 시선으로는 절대 실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중국을 바로 알고, 그 변화에 예민해야 하는 이유, 그동안 우리는 단견으로 중국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는지, 그 비상과 발전의 궤도를 폄훼하거나 깎아내리는 데 열중하지는 않았는지, 이 책은 질문과 동시에 해답의 실마리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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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금기 살림지식총서 61
장범성 지음 / 살림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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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서 왜 모략이 발달하고, 걸출한 협상의 귀재들이 배출되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음식, 언어 사용, 풍습에서 이렇게 피해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기억하려면, 조금이라도 생각하기를 멈춰서는 안 될 것 같다. 생각하기가 일상이 되어야만 조화로운 삶이 가능할 정도로, 일상의 풍습에 곁들일 이야기가 많다. 쾌종 시계를 선물하는 것이 죽는다는 의미와 음운이 비슷하여 금기가 된다거나,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것은 짝수이므로, 선물을 짝수로 해야 한다거나, 결혼 등 길일을 양력, 음력 모두 짝수로 떨어지는 날을 선호한다는 등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말할 때 조상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 않는다거나, 집안에 심어야할 나무와 뜰에 심어야할 나무를 구분하는 것, 아이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지어 생명 연장을 꿈꿨다는 등의 이야기는 같은 유교문화권인 까닭인지 많이 닮았다. 금기라는 주제만으로도 숱한 이야기를 엮어낼 수 있는 중국. 금기 속에서 문화의 힘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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