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 시민을 위한 민주주의 특강
도정일.박원순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5월
평점 :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나, 극심한 이데올로기 대립의 전쟁터를 지나온 대한민국에서 이보다 더 강력하게 민주주의 생각하기를 저지한 질의는 없었던 것 같다. 당장에 눈앞에 보이는 배고픔이 있고, 맹목적인 살육도 버젓이 펼쳐지는 마당에 한가하게 민주주의나 묻고 있을 때냐는 힐난은, 민주주의에 대한 감수성의 싹을 자르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밥도 그럭저럭 먹고 살만 하고, 야만에 가까운 무법의 시대를 이제는 어느 정도 관통한 것 같은데도, 여전히 민주주의를 화두로 삼는 일은, 속없는 한량이나 이상주의자들의 공허한 외침처럼 치부되고 있는 것 같다. 민주주의를 소수의 전유물로 취급하거나, 인기몰이의 대표적 표상인양 그려내는 우스꽝스러운 시대, 여기 우리가 서 있는 지점은 어디이고, 우리가 나아가야할 좌표는 어디인지 돌아보고 싶어졌다. 그 의뭉스런 반추와 상상 속 중심에 '민주주의'가 서 있었다. 그렇게 많이 듣고, 그렇게 많이 읽었건만, 민주주의의 실체는 제대로 배워보고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으니, 우스워진다. 아래로부터 이뤄낸 민주주의라고 했지만, 결국은 위에서 해석해 준 대로 민주주의를 배웠으니, 그럴 만도 하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결국 참여와 자유, 그리고 평등이다. 김상복, 김종철, 김찬호, 도정일, 박명림, 박원순, 오연호, 우석훈, 정희진, 진중권, 한홍구, 홍성욱 등 민주주의 특강을 진행한 강사들의 강의 내용과 방식은 달랐지만, 모두가 참여, 자유, 평등을 강조했다. 국민 주권, 삼권분립의 도식화된 민주주의 대신, 참여, 자유, 평등으로 여는 생활 속의 민주주의로 시선을 옮기자, 여전히 민주주의를 화두로 삼아야하는 까닭이 선연해진다. 덩어리 국민의 이름으로는 와 닿지 않는 민주주의가, 국민의 자리 대신 시민 개인으로 치환하는 순간,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 분명해지는 것이다. 생활 속 민주주의 없이, 물질적 부로만 측정되는 잘 사는 것의 의미는 결국 사회적으로는 독재로 귀결되고, 개인적으로는 인간의 인간됨을 발현할 수 없는 감옥 속의 부요처럼 불행한 생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인간됨은 참여하고, 자유를 누리며, 평등한 대우가 보장되지 않을 때, 철저히 파괴되고 유린되는 개념이니까. 민주주의는 개념과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과 실천의 내용이다.
김상봉 교수의 학벌사회에 대한 대응이 흥미로웠다. 자녀들에게 '어차피 인생은 불행하다. 절대로 행복하게 살 생각 하지 마라. 다만 신나게 살아야한다' 는 교수님의 지론과 더불어 책 읽는 아이, 예술적 감수성과 인간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가진 아이로 교육해야한다는 조언은 특히 더 새겨야할 고언이다. 진중권 교수의 가상현실, 증강현실, 혼합 현실에 대한 소개는 또 다른 민주주의의 공간 인터넷 세계에서 왜 평등이 중요한지, 쌍방의 소통이 절실한 것인지 정확하게 꼬집고 있다. 홍성욱 교수의 과학기술의 민주적 재구성 강의는 신뢰의 중요성을 과학자의 시선에서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특히 위험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열 가지 요소를 소개함으로서, 우리가 지향해야할 민주주의에 대한 과학적 사고를 정치하게 한다. 비자발성, 불평등성, 위험에서 도망갈 수 있는 방법이 발견되지 않았을 때, 새로운 위험일 때, 인간이 만든 위험일 때, 두려운 것일 때, 과학자들이 그 내용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을 때, 전문가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 등의 요소는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제 현상을 분석할 때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겠다. 박원순 변호사의 대안 실천론은 민주주의의 개념은 이해했으나, 방법을 잘 알지 못해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시민들에게 실천적 방법을 제대로 소개하고 있다. 조직하고, 운동을 일으키고, 변화를 주도하는 시민운동의 결이 잘 녹아 있다.
이제는 제도적, 정치적 민주화에서 사회적, 생활의 민주화로 옮겨가야할 시점이다. 민주주의 인식과 더불어 실천하고 행동하는 시민들이 많아지려면, 다시 민주주의를 말하고, 생각해야한다.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느냐고 물으면, 주저 없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면, 이 책부터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