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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다윈은 이기적 인간의 이타주의 역시 진화의 산물로 간주했다. 이타주의를 통해 공의로움이 확산된 집단이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집단을 이김으로써, 인간의 DNA에 자연스럽게 이타주주의가 스며들었을 것이란 주장이다. 이 이론의 진위 여부를 떠나 인간이란 동물이 받아들인 이타주의의 핵심가치인 정의, 흔한 주제이면서도 제대로 된 분석이나 설명을 대하기 어려웠다. 그동안 둑에 가둬 두었던 물이 한꺼번에 쏟아지기라도 하듯, 사회의 정의가 그 어느 때보다 회자되는 이 때, 이기적 인간이 지향해야할 진정한 정의는 무엇인가, 하버드 대학에서 20여년간 정치철학을 강의한 저자의 질의는 그러므로 더욱 치열하다. 철학자들이 제시한 정의론을 소개하면서, 어떤 정의관을 지향할 것인지 스스로 택하라는 질의처럼 느껴져 더 긴장됐다.
저자의 소개에 따르면 벤담, 밀 등은 공리주의를 내세우며 쾌락의 가치가 확대되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했다. 칸트는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야한다면서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을 극대화할 수 있어야 정의를 포섭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롤스는 공정한 계약, 호혜주의의 원칙에 의한 동의를 강조하면서, 차등원칙을 정의론에 도입했다. 서로의 운명을 공유하고, 우연히 주어진 선천적이거나 사회적인 환경을 자신을 위해 이용하려면 그 행위가 공동의 이익에 도움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성취와 사회적 분배의 결과가 결코 자신의 능력과 비례하는 것이 아니며, 개인이 속한 공동체의 사회적 환경에서 주어지는 것이 많으므로, 공동의 이익을 돌아보지 않고서는 정의를 논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의 특성과 그 개인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역할이 가장 적합하게 일치될 때 정의가 이루어진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관은 기독교의 정의론과 비슷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그 발전이 정의관의 발전과도 비례한다면, 정의관은 개인적 관점에서 벗어나 공동체를 지향했고, 나아가서는 인간 사회 뿐만 만물과의 조화를 꾀하는 쪽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판단해도 틀리지는 않을 듯 싶다.
동양에 속한 우리의 전통적 정의관은 오랫동안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의 정의관과 비슷했다는 생각을 했다. 우주 창조의 질서를 중시하고, 인간의 존재를 존중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런데, 서양식 정치 사회 제도의 안착, 자본주의의 발전, 물신주의의 팽배, 이념 대립의 뼈아픈 시대 상황을 거치면서, 오히려 벤담, 밀의 공리주의적 정의관으로 퇴보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워진다. 쾌락이 극대화될 수 있다면, 쾌락의 가치로 정의가 환산될 수 있다면 그만이라는 식의 사회 분위기가 점점 위세를 떨치는 것 같다. 공동체 중심에서 오히려 개인 중심으로 그 지향점이 축소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어쨌든 하버드 대학의 학생들이 이렇게 밀도 있게 정의론을 배우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정의론을 암기해야할 편린으로 배우는 대신, 사회 현상과 결부된 살아있는 정의론으로 배우면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자의 음성을 제대로 살려내 함께 동행하고 공부할 수 있는 그들의 학습 여건이 또한 부러웠다. 단지 학점을 얻기 위해 수강했을지라도, 정의론을 들은 젊은 대학생들이, 살아가는 동안 강의의 기억들을 어떻게든 떠올린다면, 그것만으로도 미국 사회의 대중 지성은 멈춤 없이 정진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버드 대학이 아니라, 우리 대학에서 20대의 풋풋한 젊음들이 고민할 정의론 강의는 개설될 수 없는 걸까. 번역본이라도 읽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으로 마음을 다스리기는 뭔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다. 우리의 대학에서 우리의 목소리가 실린 그런 정의론 강의를 읽어보고 싶은 욕심은, 비단 나만의 것은 아닐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