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에너지 - 새벽에 나의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전병욱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지난 해 12월 삼일교회 특별새벽기도 주간의 설교 말씀을 모아 책으로 펴내셨다. 수첩에 메모하며 들었던 말씀들을, 인쇄된 활자를 통해 다시 읽게 되니, 은혜가 더 새롭다.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하심과 굳건히 붙드심, 그리고 인생의 때마다 꿀송이보다 더 달게 다가오는 지혜와 모략들, 그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시대가 급박해지고, 삶이 건조해지면서, 생과  죽음의 이면을 성찰하는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점점 퇴색되는 것 같다. 단독자로 선 인간 앞에,  문을 두드리고 서서 들어오시기를 간청하는 그 분의 음성이 희롱당하고 힐난 받는 세대. 그 원인의 밑바닥을 파헤치면 결국 어긋난 크리스챤으로 선 내가 있다. 말씀을 공급받고, 은혜 속에 살아간다면서 떠들어도, 나의 삶이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가 될 수  없다면, 예수님이 독사의 자식이라고 일갈하셨던 그들과 다를 게 무언가. 가라지까지 껴안고, 그 분이 허락하신 인생을 그 분의 뜻대로 살라는 독려가 가슴에 남는다. 죽어야 진짜 살 수 있는 역설로 반증하는 생,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이 내게 주문하시는 삶, 다시 힘을 얻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양으로 읽는 법 이야기 - 법정에서 소크라테스와 공자를 만나다
김욱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법사회학 시간에 기득권층의 소송 이용도가 높다는 사실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막대한 소송 비용을 감당할 능력 유무도 이런 결과에 한 몫 했겠지만,  갈등과 대립의 긴장관계를 견디며 쉽게 스스로 중단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지 않을까, 잠시 허튼 생각을 했었다. 법리 싸움에서 결코 주도권을 놓치지 않은 그들, 무엇이 이들을 지속적으로 기득권에 머물 수 있도록 보호하는 것일까. 이 책은 그 호기심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답변서다. 무엇보다 세상과 역사를 뒤바꾼, 지금도 면면히 우리의 삶속에서 유영하는 굵직한 법리의 탄생, 그리고 그 이면의 모순들에 대해 짤막한 삽화 형식으로 배치, 소개한 점이 만족스럽다.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로크의 자연법론과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론 등장에 대한 소개. 학창시절 배운 간단한 왕권신수설과 천부인권설이 아니다. 로크는 인간의 생명, 자유, 재산을 소유하고, 이것을 지킬 수 있는 자연법적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연법 사상의 포문을 열었다. 또 생명, 자유, 재산을 소유권의 근간으로 규정하여 자본주의 시대를 견인했다. 생명과 자유, 재산을 소유함으로써 완성되는 인간의 완전한 권리. 그렇다면  이 완벽한 삼각 구도가  어긋나고 이지러지면, 그 순간  인간의 권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자연법 사상은 천부인권을 표방하는 혁명의 논리인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산 소유에 따른 인간 권리의 등급화도  동시에 견지할 수 있는 사상이 된다.  현 시대와 사회의 중심을 도도히 흐르는 자연법 사상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는 전적으로 깨어 있는 시민의 몫임을 다시 한번 각성하게 된다.  결국 자연법 사상의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제대로 성찰하지 않은 사회 변혁 논리는, 이름만 바꾼 또 다른 기득권들의 등장을 앞당기는 대로가 될 수 있음을 상기하게 됐다.  


    몽테스키외가 현실적으로 추구했던 권력분립의 정치 형태가 결국은 귀족정이었다는 사실은 막연한 삼권분립의 이론에 관성화된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왕에서 귀족들로 기득권의 외연을 넓혔을 뿐이라는 냉엄한 지적도, 이번 책읽기로 이제야 이해하게 됐다.  


   권력 구도 밖에 진지를 구축하고 권력을 예인해나갈 것인가, 아니면 권력 중심으로 뛰어들어가 기득권을 바꿀 것인가를 논하기 전에, 지배 논리에서 배태된 법의 속성을 이해하고, 결국은 강자의 힘으로 대변될 수 밖에 없는 법의 이면을 경계하면서, 그 힘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을 실력을 먼저 갖추는 게 최우선 과제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의미에서 당시 사회 속에 드리워진 법의 지배를 분석하고, 비록 역사에서는 실패했지만, 자본주의 사회 대신 또 다른 대안 사회를 꿈꾸었던 마르크스의 끈질긴 관찰력은 이 책에서 더욱 빛난다.  


   저자는 법은 강제규범으로 당위의 영역이며, 이 세계는 존재와 당위의 영역으로 구별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당위의 영역은 결단코 존재 영역에 대한 성찰과 관용, 그리고 비판 없이는 설정될 수 없다. 이미 내 앞에 누군가 설정하여 제시하는 당위의 영역만을 받아들이면서, 존재의 영역을 외면하거나 간과하는 것, 그것이 결국은 존재 영역을 독점하며 당위 영역을 자신있게 설정해가는 기득권의 법 지배를, 가장 강화하는 주요 원인일 것이다.  당위의 영역 너머  존재의 영역에 대한 올곧은 개안을 향한 줄기찬 주문. 이 책의 저자가 가장 말하고 싶었던 주장일 듯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극단의 시대에 중심잡기 : 지식인과 실천 問 라이브러리 6
윤평중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사실과 현실에서 유리되어 신념과 진영 논리에 매몰된 채 극단으로 치닫는 사회 속에서 어떻게 성찰하고, 균형감각을 가져야할 것인지, 저자는 치밀한 논리와 사실 해부를 통해 기꺼이 자기 스스로를, 우리들의 나안 시력을 되찾게 하는 도구로 삼고 있다.  

  담론 투쟁과 진리 정치의 화두는 중심과 실용을 꺼내는 논객들을 가차 없이 기회주의자, 현실감각 없는 이상주의자로 몰아붙이며 협소한 구석으로 몰아낸다. 그 온갖 음해를 무릎 쓰고 펜을 힘껏 쥘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의 희망은 충분한 것 같다. 

  이 책의 백미는 리영희 교수, 송두율 교수, 그리고 소설가 김훈의 성과와 여정을 분석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 독재 정권의 해체라는 시대적 사명 앞에 자신의 지식을 돌맹이 삼아 철저히 시대의 중심으로 투척하며, 시대 변화를 이끌었지만, 정작 그 지식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사실이 아니라 소망에서 배태된 것이었음을 상기할 때,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사회 극단의 모습에 리영희 교수가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는 것. 송두율 교수의 학문적 성과와 그의 삶의 여정에 대한 비판도 날카롭다. 사회주의 이념과 현실을 안으로 분석하고, 그 성과를 그 사회가 설정한 이념에 비추어 검토해야한다는 내재적 접근법을 적용할 때, 북한이 계급 모순과 민족모순의 과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주체 사상을  표방하는 것은 북한사회주의의 독자성을 나타낸다는 송두율 교수 주장의 편협성과 비현실성에 대한 접근도 탁월한 식견을 보여준다. 소설가 김훈에 대하여는 애정 어린 시선이 가득하다. 극단의 담론에 편승하기 보다는 사실의 지독스러움과 현실의 냉정함을 바탕으로 겸허한 삶의 정치로의 기로를 열고 있다는 평가는, 생각보다 자연스럽다. 아마 소설가 김훈이 적어도 자신이 쓴 소설의 기치처럼 철저하게 담론과 담쌓기로 일관하고 있는 점이 날선 철학자의 마음을 평온케 한 것 같다.  

  아렌트의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악의 평범성을 소개한 대목도 눈에 띈다.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함, 그리고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라는 무능함, 결국 이 세가지가 희대의 악을 자행하고도 전혀 양심의 가책 없이 아이히만 스스로를 이상주의자로 지칭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아렌트의 비판을 적용해보면, 과연 나는 얼마나 악에서 비껴서 있는 것일까. 가슴은 순간 뜨끔해진다.  

  저자는 지식인은 지식을 생산하고 권력을 비판하는 사명자로서 철저히 사실, 합리성, 성찰, 균형 감각을 통해 굳건히 홀로 서야한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극단의 담론이 아니라 삶의 정치에 집중해야함을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다. 경험컨데, 삶의 정치는 중심이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담론의 힘은 거대하고 사나워서 한번 휩쓸리면 담론의 성결성과 온전함을 입증하는 데 집중하게 될 우려가 있다.  담론에 휩싸인 정책은 면밀한 검토가 필요 없어진다. 담론이 곧 진리이기에 현실을 외면하고 이상만을 투사해 결국 실패하더라도, 진리에의 목도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일시적 모순이라고 덮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요즘 회자 중인 무상급식은 어떤가. 초중고 학생들의 급식비가 일률적이라는 사실은 간과되고 있다. 초등학생에게는 충분한 급식비가 고등학생의 경우 쌀을 충당하고 나면 실제로 남는 비용이 적어 식단의 자율성이 편협해질 수 있는데도 따져야할 사실은 철저히 묻혀 있다. 적은 예산으로도 무상급식을 실시할 수 있다거나 또는 다른 중요 교육 문제가 많으니 무상급식은 온당하지 않다는 선동적인 주장이 아니라, 사실을 철저히 따져 봐야한다. 지자체별로 무상급식을 실시할 경우 전체 지자체 예산의 몇 %를 무상급식이 차지하게 되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담론에서 벗어나 중심을 찾도록 종용하는 이 책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를 살고 있는 동시대인들이라면 꼭 읽어야할  필수 지침서가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극단의 담론을 위한 자기 희생과 자기 합리화가 아니라, 사실의 방패와 균형감각의 창을 들고, 현실의 중심에 서서 극단으로 치닫는 담론들을 잡아당길 수 있는 원심력이 공고해져야, 성숙한 시민사회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다만, ‘무슨 무슨 주의자’란 식의 표현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 자체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인간의 실체와 사실을 간과하는 낙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식인도 결국은 인간이다. 이것만큼 자명한 사실도 없다. 지식인의 중심잡기는 고정불변한 현실을 멀찍이 떨어져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냉엄한 사실들 위에서 불완전한 인간이 사력을 다해 펼쳐야만 하는 치열한 싸움 아니던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심장을 기어이 비집고 올라와 핏물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흘린 적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기뻐 좋아 날뛰면서도 인간의 무력함이 신물 나고 가련하여 헛헛하게 웃어댄 적이 있기나 했었는지 좀처럼 되살려낼 수 없다. 그저 작은 일상에 취해 우물거리고 히죽이면서도, 차오르는 공허함은 채 한 줌도  되지 않았다. 제대로 살지 않은 까닭이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완벽한 평화, 온전한 자유, 깨질 것 같지 않은 단호한 이성...삶은 날카로웠지만, 나는 잠잠했다.  


   그런데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로 단숨에 뻣뻣해진 내 목줄을 따버렸다. 심장이 헐떡이고, 퀭한 눈 속에 눈물이 차오르고, 송곳 같은 통증이 혈맥을 관류하면서 온 몸이 스멀스멀 아파온다. 인간은 결코 관념적이고 피상적일 수 없는 존재라는 것, 인간의 한계 그 너머를 갈망하며 성큼 성큼 걸어나가 버리는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라는 것, 더러움과 오물 속에서도 꽃을 찾고 성스러운 것을 발견해내고 싶어 안달하는 존재라는 것,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결국은 굴레 속에서만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설명할 수 없는 것도 많고 납득할 수 없는 것도 많은 세상이지만, ‘사는 것’말고는 그 어떤 저항도, 반항도 허락되지 않은 존재라는 것...아픔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조르바는 <생의 한 가운데>의 니나 부슈만을 닮았다. 날것으로의 생을 가공하지 않고 두려움을 참아가며 벌컥 벌컥 들이킨다. 힐난도, 훈계도, 질책도, 야유도 그에겐 소용없다. 틈만 나면 하나님이 없다고 소리치지만, 조르바야말로 가장 하나님께 가까이 간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분명 하나님이 아담을 만들고 키스하라고 손을 내밀자, 사내는 이봐요, 영감, 비켜 줘야 가든지 말든지 하지! 소리쳤을 거라는 대목에서, 조르바의 표현 때문에 한참을 웃었다. 인본주의 본향, 그리스에서라면 하나님을 이런 방식으로 상상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조국 그리스를 위하여 터키인들을 죽이고 나서야, 인간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에 염증을 느꼈다고 고백하는 조르바, 늙고 병든 오르탕스 부인을 때로는 희롱했으면서도 가장 애처로이 사랑하고 존중했던 한 사내, 금식과 금욕에 지친 수도승에게 악마에게서 벗어나려면 파라핀을 들고 수도원에 불을 지르는 게 구원이라고 일갈했던 인간, 신성한 야만이란 게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준 구도자..조르바의 이야기를 읽는 내내 활자는 그가 켜는 산투르가 되고, 그의 춤사위가 되는 듯 했다.  


...나는 사느라 시간이 없어 글을 쓸 수 없고, 두목은 쓰는 데 시간을 뺏겨 살지 못하는 겁니다..두목..당신은 믿으시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말? 어릴 적에 할머니는 갖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나는 한마디도 믿지 않았어요..그러나, 지금, 나이를 먹은 지금..나이 먹으면 대가리가 물렁물렁해지는 걸까요, 나는 그런 이야기를 다시 믿기 시작했어요...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두니까. 이러니 줄을 자를 수 없지요...그리고 나는 오늘 문학의 아름다운 징표를 찾아냈다. 
    

     조르바가 버찌를 잔뜩 먹어 버찌를 이겨 냈듯이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책을 쓰고 읽으면서 책을 극복했듯이 나는 이제 불평을 멈추고, 덴덕스럽고 물컹이는 삶의 편린들을 잘근잘근 씹어 삼킬 참이다. 내게 주어진 삶대로 사는 것, 부활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는 확신을 얻었으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問 라이브러리 3
최장집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읽기를 미루고 있던 <후불제 민주주의>를 건듯거리며 넘기다가 우연히 최장집 교수님과  관련된 대목을 읽고, 이 책부터 읽기로 작정했다. 최장집 교수님의 정당정치에 큰 틀에서는 공감하면서도 날선 정치 현실에서는 실제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는 듯한 어투가 불을 당긴 셈이 됐다. 결과적으로는 독서의 순서가 제대로 잡힌 것 같다. 현실 정치인으로서는 뜬구름잡는 이상주의라고 불편해할 수 있겠지만, 제 3자의 관점에서 독서를 시작한 나로서는 이상을 먼저 알고, 현실 이야기를 듣는 것이 훨씬 효용적이라는 판단이 든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덕주의, 민족주의-국가주의, 신자유주의의 관점이 상호교차하고 결합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정치에 있어서 참여의 투입을 축소하고, 효율적인 정책 산출 중심의 체제로 전환시키는 효과를 보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민주화를 지향하는 민중운동이 갖는 ‘총체성’의 비전은 강력한 힘의 결집, 혁명적이고 전투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지만, 민주화된 이후에는 단일 동맹을 유지하기 힘들고, 대중들의 사회경제적, 계층적 지위와 역할에 따라 필연적으로 해체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는데,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앨버트 허쉬만의 갈등에 대한 소견이었다. 갈등은 나누는 것이 가능한 갈등이 있고, 나누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갈등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사회 경제적인 문제는 나눌 수 있는 갈등이고, 민족문제는 나눌 수 없는 갈등이라는 것이라는 것.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 사회 복지 문제 같은 나눌 수 있는 갈등의 문제를 다루면서 나눌 수 없는 갈등의 관점과 틀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국가냐 시장이냐, 기업이냐 반기업이냐, 세계화냐 반세계화냐 하는 등의 적대적 정치로 대립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적극 공감. 

   기득권의 경험이 없던 진보 진영이 관료들에게 끌려 다닐 수 밖에 없음을 분석한 대목은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시려졌다. 어느 교수님의 지적대로 한 편은 영혼이 없고, 또 한 쪽은 정책이 없다는 쓴 소리를 확인한 것 같은 마음도 들었다. 

  가장 큰 문제는 진보 진영에서 과연 진보라며 추구하고 있는 바를 스스로 제대로 정의하고 있나 하는 점 아닐까 싶다. 민중운동을 통해 정치인으로 자라난 세대를 바라보면서 내가 모순이라고 느끼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진보와 정진의 정의를, 시민이 아니라, 민중의 힘을 딛고 자라난 정치인이 인정하고 힘을 실어야만 진짜 진보라고 귀결되는 것 같은 외관을 갖는다는 점. 스스로 깨닫든 그렇지 못하든, 어느 순간 자신 스스로가 진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체득하고, 그 틀에 갖힌 후에는 현실의 다양한 목소리와 주장을, 단순히 진보를 와해하는 세력으로 일순간에 몰아갈 수 있다다는 것이다. 즉 내가 보기에는 진보의 독점 내지는 독식의 현상이 나타난다. 총체성의 비전을 가졌던 세대가 물밀듯이 몰려오는 다양성을 감당할 능력을 갖출 시간이 부족하다보니, 오히려 소통의 문이 좁아졌고, 누구는 눈밖에 나면 오히려 적으로 낙인찍기가 스스럼 없이 가능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갈등 문제의 본질적인 내용 대신 껍데기에 천착하다보니, 혈관으로 스며드는 세밀한 정책이 제 때 생산되지 못한다.

  씁쓸한 것은 진보라고 불리우는 정당들이, 또는 국회의원이나 정치인들이 틀을 바꾸는 법안이나 정책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틀을 바꾸고 싶어 하는 시민과의 연계가 소원하다고 이해한다면 너무 편견에 사로잡힌 단견이 될까. 민주화를 위해 뛰어온 주역들이 직업 정치인이 되자, 개인의 의지를 떠나서, 누구든 지배와 관리의 논리를 가질 수 밖에 없었고, 결국은 스스로가 죽는 십자가를 져야만 틀 바꾸기가 가능한데, 죽는 것도 힘들어졌다고. 아이러니하게도 뿌리에 손을 못 대니, 보수나 진보나 내놓는 정책이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는 의식의 결여가 아니라, 불을 지피는 정책의 고갈에서 비롯되는 것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