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히말라야로 갔는가
릭 리지웨이 지음, 선우중옥 옮김 / 화산문화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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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죽음은 어디에서 만나는가. 릴레이주자가 다음 주자에게 바톤을 넘겨주듯이 그렇게 이어지는 것인가.

혹은 본래가 하나였으므로 마치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새옷을 갈아입듯이 그렇게 외양만 바꾸어 가는 것인

가. 이 책에는 인간한계에 도전하는 등반가들과 그들의 탐험이야기가 계속 이어지지만 그 밑에 깔려있는 주

제의식은 그처럼 가볍지 않다.

그도 그럴것이 이야기를 꾸려가는 주된 내용이 아버지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딸이 히말라야에서 죽은 아버

지의 무덤을 찾아가는 순례여행이라니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로서의 시간은 분명히 있다. 그러

면 지나버린 시간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 책은 잃어버린 아니 지나 가버린 시간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야

기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릭 리지웨이가 죽은 친구의 딸인 아시아를 데리고 자신의 친구이자 딸의 아버지

인 조나단의 무덤을 찾아가는 여행이 그러하며 릭이 경험한 극한의 등반과 모험이야기가 중간중간 삽입된

것이 그러하다.

20여년전 릭은 조나단이 포함된 등반대의 일원으로 중국 히말라야의 명봉 민야 콘가산을 오르다가 뜻밖의

눈사태를 만나게 된다. 이 사고로 조나단은 현장에서 릭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고 그의 시신은 민야 콘가산

기슭에 돌무덤으로 남는다. 가족에게 전달된 피뭍은 모자와 일기장만이 그의 죽음을 말해주는 징표였다. 아

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서 자라나는 아시아는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산을 좋아하는 독립심 강한 숙녀

로서 성장한다.

시간은 이“?이어지는가. 죽은 조나단은 생전에 티벳불교에 꽤나 심취했던 인물이다. 그가 남긴 일기에 따

르면 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하고 무소유 속에서 자유를 느끼며 매일매일의 삶을 생의 마지막

이라고 생각하고 소중하게 살아 내려는 자기절제가 강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히말라야의 대자연과 그 속에

깃든 불교적 세계관에 심취한 조나단은 그래서 자기 딸의 이름도 아시아로 지었다고 한다.

이야기는 20여년을 왔다 갔다 하면서 전개된다. 성장한 아시아는 지금까지 자신의 후견인 역할을 해주었던

아버지의 친구에게 아버지의 무덤에 데려가 달라는 부탁을 하고 이에 조나단의 죽음에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던 릭은 흔쾌히 동의한다. 아시아와 릭은 티벳의 창탕고원등 아직도 문명의 이기가 거의 침범하지 못한 지

역을 멀리 돌아 조나단의 무덤을 찾는 긴 여행길에 오른다. 여행도중에 20여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

로 문명화된 카투만두와 라사에 실망하기도 하고 성산인 카일라스산의 사원에서 죽은 조나단을 추억하며

라마승의 위로를 받기도 하고 인간이 한번도 오르지 않았던 눈에 덮힌 티벳고원의 무명봉을 오르기도 하면

서 과거를 회상하고 내면을 돌아보는 여행을 계속한다. 여행길은 아시아가 아버지를 찾아가는 길이지만 릭

은 순간 순간 조나단의 일기와 자신의 모험이야기를 통하여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이윽고 여행의 막바지에

그들은 셀파와 통역자 등을 물리치고 단둘이 민야 콩가산 기슭의 조나단의 무덤을 오른다. 간신히 찾은 무덤

에서 그들은 쌓은 돌의 절반이 허물어져 산짐승과 독수리의 먹이로 회손된 채로 일부만 남아 있는 시신을

보게된다.

릭은 사고 당시를 회상한다. 자신의 품에 안겨 마지막 호흡을 하던 조나단. 조나단의 영혼이 떠나가는 것을

느끼던 절체절명의 순간. 그리고 그를 장사지내던 아픈 기억속에 회한에 잠기고 딸인 아시아는 눈물을 흘리

며 아버지의 무덤을 어루만진다. 릭은 허물어진 무덤의 돌을 다시 쌓고 있는 아시아를 바라보며 티벳 불교식

으로 윤회를 말하면서 조나단의 무덤을 찾은 것을 계기로 자신을 내면을 돌아보고 지금까지는 자신의 삶을

위해 친구의 지혜를 빌렸다는 자책감을 느끼며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된다. 아시아도 시신의 일부가 회손된 것

이 아마도 독수리들 탓이었을 것이라는 릭의 얘기에 그것은 어쩌면 아버지도 바랬을 것이라는 대답으로 히

말라야의 정신세계를 긍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책은 모험과 여행이야기를 다큐멘터리식으로 다루고 있어 우선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그러면서 동시에

삶과 죽음의 문제를 성찰하고 있어 깊이를 더해 준다. 책은 오늘날 히말라야 등지에서 상업적으로 이루어지

는 등반과 자신의 등정만을 위하여 이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왜곡된 알피니즘. 그리고 물질문명에 의해 점점

오염되어가는 지구상의 오지들에 대한 염려를 더하고 있다. 아직도 히말라야는 많은 사람들의 도전과 용기

를 실험하는 곳이다. 그런 한편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는 사람들의 순례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

곳에서 숨져간 많은 사람들의 영혼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아시아와 릭은 친구며 아버지인 조나단의 영혼이

자신들의 숨결을 스쳐 지나 대자연속으로 사라졌다고 믿었을까. 조나단의 영혼에 위로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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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8000미터 안나푸르나 세계산악 명저선 8
모리스 에르죡 / 수문출판사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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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산을 오르거나 먼곳으로 여행을 떠날 때면 우선 동행자를 정한 후 가기로 한 산이나 고장에 대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그런 후 배낭을 꾸리고 집을 떠나서 산을 오르고 하산 후 다시 출발지로 돌아와 자리에 누

워 자신과 일행이 오른 산이나 겪었던 일들을 회상하는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히말라야 등반도

그 규모나 소요되는 시간에서 비교할 수야 없겠지만 비슷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1950년 안나푸르나를 오르기 위한 프랑스 원정대의 일련의 여정은 오늘날의 히말라야 원정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류 최초의 8000미터급 등반이라는 엄청난 과업을 달성하기 위하여 헌신한

그들의 노고를 다른 무엇과 견줄 수 있겠는가.

요즘과 같은 정확한 지도나 지형도, 운송수단등도 없을뿐더러 등반루트등에 대한 정보도 일체 없었던 시절

에 히말라야 등정은 말하자면 오지탐험과 등반행위가 혼합된 가히 대모험으로의 출발이었던 셈이다. 원정대

가 가지고 있던 지도는 주먹구구식으로 표기돼 있어 도데체가 처음부터 새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다울라기리를 오르기 위하여 시작한 탐사길이 안나푸르나 일대로 확대되고 결국은 안나푸르나를 등정목표

로 하여 원정대는 전력을 다하게 된다. 그들은 어쩌면 인류가 한번도 밟아보지 못했으리라고 생각되는 곳을

헤집고 다녔던 셈이다. 그러나 원정대는 그 미지의 길을 시종일관 낙천적이며 흥미진진한 모험으로 여기고

어려움을 돌파해 나간다.

흔히 산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오르면 내려가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의미에서라기 보다는 산에서

겪게 되는 온갖 예측불허의 상황을 적절한 판단과 과감한 결단속에서 현명하게 극복하고 정상에 서는 일, 그

리고 겸허하게 하산하는 행위들의 총체가 세상살이와 흡사하다는 의미에서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인생으로서의 등반행위를 가장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원정대장인 모리스 에르족을 만나보자. 그는 철저한 자기 희생속에서 대원들을 지극히 사랑하고 아끼

는 자세를 실천으로 보여준다. 크레바스에 빠졌을 때의 모습이라든지 혹은 자신이 다른 대원들의 희생을 딛

고 정상으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자책감으로 번민하는 모습은 그의 인격을 가늠하는 열쇠이다. 하산시

자신이 겪은 극단의 고통을 내면속에 감추고 다른 대원들이나 셀파들의 희생을 고마워하며 고국으로 귀환

하는 날까지 원정대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다. 처음 대원들을 소개하는 장면에서부터 그는 대원들에 대한

절절한 애정을 보여주더니 결국엔 자신과 같이한 9명의 동지들과 평생 우애를 나누는 것이 자신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고백한다. 그가 손가락과 발가락을 뭉텅 뭉텅 잘라내는 아픔과 자른 손가락 사이사이마다 구더

기들이 무더기로 서식하는 처참한 상황속에서도 그리하여 죽음을 생각하는 순간까지도 올랐던 산을 통하여

놓지 못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마침내 안나푸르나는 에르족의 발아래 있었다. 그러나 '인생에는 또 다른 안나푸르나가 있다'는 에르족의 말

속에, 그리고 프랑스 산악협회장이 서문에 썼던 얘기대로 산을 정복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자아의 완성이

야말로 궁극의 목표'란 고백속에 바로 에르족의 마음이 자리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산도 산행도 인생의 궁

극적인 목표가 아니라 보다 낳은 인격과 자아를 이루어 가는 수단으로 본 것이었다. 산을 통하여 완성된 인

격으로 나아 가고자 했던 것이다. 오늘날 산을 사랑하고 자신을 희생해가며 산으로 가려고 하는 젊은이들의

지향점은 무엇일까. 에르족이 추구했던 삶의 지표를 그들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에르족의 솔선수

범하는 모습은 다른 대원들과 셀파들로 하여금 정상등정을 위하여 자신들이 가진 최선의 능력을 한 곳으로

모으게 하는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낭가파르밧에 도전하여 엄청난 희생 끝에 정상을 정복한 독일원정대와 프랑스 원정대를 비교해 보

자. 라인홀트 메쓰너가 쓴 책 [벌거벗은 산]을 보면 독일의 유명한 등산가 메르클이 지휘하는 1930년대 독일

낭가원정대는 모든 면에서 1950년 프랑스 원정대보다 일사불란 했으며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결과

는 참담했다. 그 원정대의 유지를 이어 받은 유명한 대장 헤르리히코퍼는 대원들과의 불화속에서 낭가를 올

랐지만 명분은 잃고 실리만 얻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대원들의 마음까지 지휘할 수 없었던 것이다. 헤르리

히코퍼의 지휘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1970년의 낭가원정대의 라인홀트 메쓰너는 대장이 선두에 서서 난관

을 돌파해본 경험이 없으므로 베이스캠프에서 내리는 결정들이 등정조 같은 다른 대원들의 동의를 얻지 못

했다고 낮게 평가했다. 이점 프랑스원정대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조금 다른 것이 아니라 생명을 걸고 등반

을 해내는 절대절명의 순간에서 대원들의 일치감과 서로에 대한 신뢰감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중요한 것임

에도 독일 원정대는 처음부터 이점에 실패했던 것이다. 당연히 공격조는 대장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으

며 등정을 했음에도 원정대로서는 절반의 성공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두 원정대의 특색을 두 나

라의 국민성에 돌릴 수도 있겠다. 즉 프랑스 국민 특유의 자유롭고 낙천적이면서도 효율적인 등반대와 엄격

하고 통제된 그러므로 일사불란 하지만 무엇인가 삐걱거리는 독일대의 모습으로. 어쩌면 원정대가 꾸려졌던

193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의 시대정치상황과도 닮아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원정

대를 지휘하고 통솔하는 대장의 인품과 능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이라는 것이다. 대원들을 하나로 통합

해내는 능력이야말로 원정의 성패를 가름하는 것이니까.

1950년의 프랑스 원정대는 그런 원정대장과 더불어 대원들의 면목 하나하나도 당대를 대표하는 등산가들

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원들은 죽음의 사지에서 동료를 구해내고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눈물겹게 보여준

다. 살인적인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색맹에 걸려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대원들, 동상에 걸려 업거나 지고 갈

수 밖에 없는 대원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몸처럼 돌보는 그 우애는 어쩌면 에르족이 이 책에서 가

장 이야기하고 싶었던 부분일 것이다. 그들은 성공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후의 하산에서 셀파들의 도움

이 없었다면 그들이 살아서 하산할 수 있었을까. 이 점은 에르족도 인정한 듯 그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말

하고 있다. 셀파들이야 어떤 삶의 가치를 느끼기 위하여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고 단지 급료를 받고 등반을

돕는 신분이지만 생사의 기로에 서있는 대원들을 자신들의 몸을 희생하여 사지에서 구해내는 것을 보고 있

노라면 인간에 대한 그들의 무한한 애정을 경건한 마음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좋은 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책을 덮고 나서 할말이 많은데 막상 무슨 말을 해야될지 모르는 것이며, 자신

의 감정이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이지 헷갈리는 것이며, 다 읽은 책이 서가로 직행하는 것이 아니라 아쉬운 마

음에 양손으로 만지작 거리게 되는 책일 것이다. 이 책에는 원정대가 흘렸을 땀과 눈물, 극한의 상황에서 터

져나오는 절망과 신음, 그리고 환희와 행복의 충일감이 한편의 드라마처럼 책 갈피갈피에 녹아 있다. 그러니

어찌 한 번 읽고 서가에 쳐넣을 것인가.

산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인생의 안나푸르나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해

보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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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산
라인홀트 메스너 지음, 김성진 옮김 / 이레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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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벌거벗은 산은 히말라야의 명봉 낭가파르밧을 말하는 것으로 험난한 수직의 암벽으로 인하여 눈이 쌓이지 않아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산이기에 그 곳을 등정하는 일은 그만큼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그 벌거벗은 산 낭가파르밧은 독일 등반대의 한과 열정이 서린 산이기도 하다. 이 산이 초등되기 전에 수십명의 등반대가 숨져간 비운의 산이며 그만큼 더한 열정을 가지고 오르려고 시도한 산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메쓰너 역시 1970년 꿈에도 그리던 독일 낭가파르밧 원정대의 일원으로 동생과 함께 선발되어 낭가의 등반로 중 가장 험하다는 루팔벽을 통해 낭가를 오르게 된다. 이 루트는 아직까지도 재등이 이루어지지 않을 만큼 험한 벽이라고 한다. 메쓰너에게는 아직 그가 낭가를 오르기 전까지 알프스 등지에서 펼친 화려한 등반경력도 모두 낭가파르밧을 위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마치 헤르만 불에게 낭가를 오르기 전까지의 등반행위가 그러했듯이.

숙명인지 메쓰너와 헤르만 불이 올랐던 저 낭가원정대의 대장은 동일한 인물. 헤르리히코퍼박사였다. 그는 낭가에서 죽어간 이복형 메르클이 그랬던 것처럼 원정대를 게르만족 특유의 충성심과 복종을 요구하는 일사불란한 조직으로 통제하길 원했다. 등반이라는 현실보다는 메르클의 유지를 받들어 낭가를 정복하려는 야심가였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등반의 순수성과 단독자로서의 성향이 강한 두 사람과는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았다.

어찌됐건 메쓰너는 우여곡절 끝에 정상으로 향하게 되고 마침내 낭가 등정에 성공하며 처음부터 의도하지 않은 종주등반까지 시도하게 되지만 하산길에서 등반파트너이자 동생인 귄터를 잃는 슬픔을 겪게 된다. 이 충격으로 인하여 무려 30년이 지나도록 저자는 낭가파르밧 루팔벽 초등정에 관한 사실에 침묵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이 책은 여러면에서 기존의 산악도서들과 차별된다. 우선 낭가의 등반과정이 세계 산악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하는 저자와 죽은 동생 그리고 당시 원정대장 및 대원들의 일기등을 통해서 교차 기억되고 있다. 메쓰너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부분에 동생의 일기 그리고 당시 메쓰너의 불신을 사고 있던 원정대장 헤르리히코퍼 박사의 일기등 여러 사람의 기억과 관점으로 이 책을 구성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낭가의 등정을 시도했던 사람들과 그들의 등정역사를 훗날 머메리즘의 창시자로 불리는 머메리로부터 시작하여 이후의 고난의 등반역사까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낭가를 둘러싸고 펼쳐진 등정사를 압축하여 볼 수 있도록 소개하고 있다. 그리하여 메쓰너가 이룩한 등정의 의미도 전체적인 입장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동생 귄터와의 추억, 그리고 그의 부재에 따른 회한에 책은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벌거 벗은 산. 다른 어떤 산 보다도 저자에게 감격과 상처를 동시에 안겨 주었던 낭가파르밧. 죽음의 산 낭가파르밧 원정대의 베이스캠프 도착부터 정상등정까지 그리고 하산까지 이어지는 등반일지는 이렇듯 흥미롭기 그지없다. 원정대장인 헤르리히코퍼 박사 자신도 자신의 이복형 메르클이 앞선 낭가 원정에서 숨져갔기에 남다른 신념을 가지고 원정대를 이끌고 있었다. 형의 유지를 온전히 이어 받은 헤를리히코퍼는 메쓰너의 표현을 빌리자면 '명예와 꿈과 오만을 위해' 낭가 원정대를 저돌적이고 일사불란하게 통제하기를 원했다. 형처럼 그도 일생의 사명을 낭가원정에 두었던 사람이다. 당연히 원정과정에서 정상 등정조인 저자와 원정대장사이에 불신과 반목하는 일이 자주 생겼다.

사실 메쓰너가 이 원정에 참가하게 된 것은 헤르리히코퍼박사의 배려에 의한 것이었지만 처음부터 메쓰너는 그를 불신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원정대를 이끈 헤르리히코퍼였지만 그의 한계는 메쓰너의 말대로 선두에서 루트를 열고 돌파하는 등의 산행경험이 한번도 없다는 것이었다. 원정대 대장으로서 베이스캠프에서 작전을 짜고 지휘하는 것에는 능했지만 생존이 걸린 현장에서의 경험이 없었기에 이를 등정을 성공시키기 위한 작전에 충분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점이 메쓰너를 위시한 공격팀에게 불만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1953년 낭가를 최초로 올랐던 헤르만 불도 그의 자서전에서 이와 같은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다. 최후로 주어진 상황에서 등정하기에 가장 적기라고 판단하고 등정을 시도하려는 공격조에게 원정대장은 이렇다할 얘기없이 계속 철수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철수하지 않으면 보급도 중단하겠다고 엄포를 놓기까지 했다. 그러나 헤르만 불은 그런 명령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정상등정을 시도해서 결국 지구가 존재한 이후 한번도 사람에게 발자국을 허락한 적이 없던 낭가의 정상을 정복하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말로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지만 말이다. 이 등정에서 아마 실패했다면 그 뒤의 비난을 감당키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헤르만 불은 더 이를 악물었는지도 모르지만.

이런 점은 등반에서뿐만이 아니라 치열한 현대를 살아가는 이땅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도 자주 마주치게 되는 상황이라고 하겠다. 지휘자에게는 분명한 목표와 그 목표를 향한 열정이 제일 중요하다. 그러나 이를 성공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는 방법에 있어서 최일선의 경험과 현장의 느낌을 얼마나 그 결정에 적정하게 반영하는가가 대단히 중요한 성공의 변수이다. 지휘자가 그런 현장의 경험을 이미 가지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수시로 변하는 상황을 반영하기에는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체험이 아닌 보고를 통하여 현장을 파악하는 지휘부로서는 올바른 결정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물론 대장은 단순한 공격자와는 입장이 다르다. 그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상황을 판단하여야 한다. 즉 보급품도 챙겨야하고  이를 운송할 셀파들의 상황 그리고 다른 대원들의 몸상태, 전체적인 일정, 시시각각 변하는 기상상태 등 다양한 변수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 또한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어쩌면 흥분상태에서 맹목적으로 공격을 시도하려는 현장의 공격조와는 달리 상황을 전체적인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최종적인 목표가 등정이라면 정상에 깃발을 꽂는 것이 목적이라면 최선두에 나가 있는 공격조의 의견이 제일 중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원정대장 헤르리히코프에게는 모든 것이 자신의 통제하에 있어야 했다. 일사불란한 원정대야말로 어쩌면 등정보다도 중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53년 헤르리히코퍼와 헤르만 불에게 일어났던 상황이 메쓰너에게도 재현되고 있다. 1970년의 원정에서도 최선두에서 루트를 개척하고 있는 대원들에게 베이스캠프에서 무전을 통하여 지시가 게속 전달되고 또 현장의 얘기가 베이스캠프로 전달되고 있지만 결정은 결국 대장의 몫이 되고 현장의 미묘한 심리상태나 상황변화는 등정 결정에 적극 반영되지 못했던 것이다.

원정도 막바지로 치달아 시간은 계속 흐르고 대원들이 지치거나 포기할 무렵 원정대에게 최후의 기회가 찾아온다. 마지막 기회. 메쓰너는 마지막 캠프지인 제5캠프를 떠나 정상공격에 나선다. 이 부분은 책에서도 다소 애매하게 처리되어 있다. 메쓰너가 대장으로부터 공격지시를 명확하게 받은 것은 아닌 듯하나 하여간 메쓰너는 과감하게 정상으로 향한다. 그것도 단독으로. 자일도 없이. 어쩌면 메쓰너는 지상 최대의 벽인 루팔벽을 등반하는데 있어 처음부터 베이스캠프의 의중은 크게 고려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싶다. 아니 처음부터 헤를리히코퍼와 메쓰너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당대 최강이었던 등반실력을 가지고 있던 메쓰너는 현장에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옳다고 생각했다. 그 점은 그가 정상등정 후 왔던 길로 다시 하산을 하지 않고 전혀 다른 쪽으로 하산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물론 그는 여러차례 그것은 불가피한 것이었으며 아우인 귄터가 탈진한 상황에서 유일한 대안이었다고 강변하고 있다.

하여간 정상으로 떠난 뒤 얼마 안 가 메쓰너의 동생 귄터도 형의 뒤를 맹렬하게 따라 붙으며 정상으로 향한다.(이때의 무리한 운행이 귄터를 탈진상태에 몰아넣어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한 것으로 보인다.) 둘은 정상을 얼마 남겨 놓고 재회하여 나란히 낭가의 정상을 밟는다. 그러나 죽음의 산이라는 낭가는 온전히 그들을 다시 지상에 내려놓기를 거부한다. 이미 탈진한 귄터는 올라왔던 험한 하행길을 한사코 마다하고 조금 쉬워 보이는 디아미르 계곡쪽으로 하산하기를 고집하고 메쓰너는 이에 동의한다. 이 대목에서 메쓰너는 후회하고 있다. 동생의 말을 무시하고 그냥 왔던 길로 하산하였다면 결과적으로 살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이 갈림길이 죽음이냐 삶이냐의 극단적인 선택의 길이었던 셈이다. 결국 그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디아미르측벽으로 하산하게 되고 아직 체력이 남아있던 메쓰너와는 달리 귄터는 계속 처지다가 결국 만년의 빙하속으로 사라져간다. 위험한 구간을 돌파하였다는 안도감이었는지 메쓰너는 동생과 끝까지 동행하지 아니하고 디아미르 계곡 아래 첫 번째 샘에서 만나기로 하고 앞서 걸어갔다. 이미 체력이 다해버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자꾸 처지는 동생을 뒤에 두고 먼저 내려간 듯하나 결과적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샘에서 동생을 만나지 못한 절망감에 더하여 며칠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반 실성한 사람이 돼버린 메쓰너는 동생을 찾아 헤메며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고 결국 살기 위하여 본능적으로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다가 원주민들을 만나 극적으로 구조된다. 발가락은 다 썩어 들어가고 얼굴은 귀신의 몰골을 한 채로. 이렇게 환희의 정상에서 순식간에 지옥으로 추락했던 두사람 중 한사람은 그나마 살아 돌아왔으나 또 한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갔다. 메쓰너에게 어찌 회한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낭가는 그에게 한평생 잊을 수 없는 영광과 상처를 동시에 안겨준 것이다.

책을 통하여 메쓰너는 원정 대장과 대원들에게 서운했던 속내를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등정후 하산시 그러니까 귄터가 탈진하여 좀더 쉬울 것으로 판단하고 내려오던 디아미르 계곡방향의 정상부근에서 함께 비박하고 난 다음날 오전 비박지를 조금 벗어난 곳에서 원래의 등정로를 내려다보던 메쓰너는 정상을 향하고 있는 다른 대원들을 발견하고 구조의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그들이 알아들었는지 바람소리로 인하여 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그들이 메쓰너를 보고 그의 목소리도 들었으나 각자 상황을 다르게 해석했는지 하여간 이후에 발생한 결과는 전혀 예상밖으로 전개된다. 메쓰너일행이 실종된 이후 헤르리히코퍼박사가 이끄는 등반대는 메쓰너일행에 대한 충분한 수색도 없이 그들을 이탈자로 생각하고 다른 대원들이 등정후 하산하자 철수해 버린 것이다. 이점이 메쓰너에게는 크나큰 상처로 남아 있는 듯하다.

책을 읽는 독자로서는 등반대를 이끄는 대장의 입장도 이해가 가기는 하나 그래도 메쓰너의 손을 들어 주고 싶다. 대장의 입장에서는 메쓰너등이 등반내내 단독자로서 튀는 모습으로 보였을지 모르나 메쓰너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충분하게 수색해주지 않은 원정대에 서운한 감정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메쓰너가 실종된 기간은 1주일 정도인데 그 기간동안 대장은 메쓰너의 실종 후 예상되는 하산로에 대한 적절한 수색이나 구조노력을 하지 않았다. 헤르리히코프에게는 헤르만 불처럼 메쓰너도 자신의 꿈과 야망을 다 바쳐 만든 낭가원정대에 한 이단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기희생이 중요하고 절체절명의 고독과 싸우는 등산가들에게도 위기와 상황에 따라 이런 세속적인 면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은 쓰리다.

메쓰너는 이후 아픈 상처와 싸우듯 치열한 등반을 계속하여 현대등반사에서 그 누구도 이루기 어려운 과업을 히말라야에서 이루게 된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매 순간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것이다. 히말라야 등반같은 극한의 등반에서 마주치게 되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나아가느냐 물러서느냐 하는 혹은 이쪽으로 가느냐 아니면 저쪽으로 우회하느냐 하는 것들.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선택의 문제는 생사를 가르게 된다. 그 가운데 오직 준비된 강한 자가 살아남을 확률이 많은 것은 당연하리라. 그러나 삶과 죽음의 문제는 이미 인간의 영역을 떠난 것이다. 낭가를 메쓰너의 뒤를 바로 이어 등반했던 동료들이 몇 년 후 알프스에서 추락사하거나 자살한 것을 보면 말이다.

산은 많은 젊은이들의 영혼과 청춘을 앗아간다. 산이라는 제단에 기꺼이 몸을 바치는 것이다. 그러나 메쓰너의 낭가파르밧 이야기를 읽다 보면 산에 바친 청춘들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보다는 삶의 철학적인 문제와 싸우는 자의 처절한 내면과 현실을 쓰라린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낭가의 경험 이후 메쓰너는 등반자체보다는 등반을 통해서 느끼는 죽음이라든지 고독이라든지 하는 사람의 내면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것을 보아도 낭가의 경험이 이후의 그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산은 그 기슭을 기어 오르는 사람들에게 거울과도 같다. 육체적인 한계를 보여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를 지탱하고 나아가게 하는 정신의 한계까지도 비추어 준다. 더구나 그 산이 죽음의 산 낭가파르밧임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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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무엇인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채수동.고산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다 읽었다. 작년(2004년) 2. 23. 시작해서 꼬박 1년 만이다. 이 책 자체가 하루에 한 장씩 읽게 되어있어 편제를 충실하게 따라 완독한 셈이다 (그러나 마지막 이틀치 부분은 결말이 궁금하여 한꺼번에 읽어버렸다).  편제도 그렇지만 일천쪽이 넘어가는 양에 어울리게 내용 자체도 만만치 않아 오래 걸린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제목 자체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아닌가. 제목이란 대부분의 책에서 그 책의 내용을 압축하고 집약해서 붙이는 법이다. 너무 통속적이거나 진부하지 않게 말이다. 그런데 '인생이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은 얼마나 진부하면서 통속적인가. 좋게 말하면 얼마나 버거운 제목인가. 아마도 톨스토이가 아니었다면 이런 제목의 책을 감당할 수 없었으리라.

책의 표지에서부터 보이는 톨스토이의 얼굴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범접키 어려운 인상을 갖게 한다. 마치 성경 구약에 나오는 아브라함처럼 말이다. 하얀 수염을 나부끼며 저물어가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 대자연 속에서 피조물들에게 내리는 신의 섭리를 깨달아 알고 지나가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가운데 삶의 예지를 발견하는 현자. 톨스토이의 모습에서 그런 영감을 가진 얼굴을 발견한 후 제목을 다시 생각해 보면 저절로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는 것이다.

인생이란 과연 무엇인가. 내자신 아직 그 인생 속에서 허덕거리고 있는 가운데 톨스토이처럼 나날의 삶을 지극한 명상 속에서 깨달아 가고 결국 한 완결된 삶으로서 마감하지는 못할진데 그가 남긴 글의 도움을 빌어 인생이란 무엇인가의 한 답을 얻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책의 큰 줄기는 신을 긍정하라는 것과 이 땅의 삶은 현실의 삶으로서 유한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긴, 영원속의 삶의 극히 일부라는 것이다.

그러면 신을 어떻게 긍정하며 그 긍정하는 것이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일까. 또한 이 땅의 삶이 지극히 일부에 불과한 삶이라면 현실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장시간에 걸쳐 독서한 책이라 구체적인 말들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각성된 영혼을 가진 인간은 그 영혼을 주관하는 신의 존재를 받아 들여야 하며 신의 뜻 즉 인간의 보편적인 선의 가치를 늘 기억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바탕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이야말로 인류가 최후까지 선을 추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톨스토이는 이에 배치되는 전쟁과 억압, 착취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하여 부정하고 투쟁해야 할 것들로 본다. 그리고 한가지 덧붙여 말하면 이렇게 가는 길에 없어서는 안될 것이 종교이다. 아니 종교적인 자세이다. 신을 긍정하는 선의야말로 지극히 종교적인 것이니까. 책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것도 세계 여러 종교의 경전들이다. 물론 그 중에서도 성경 신약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사랑이며 인류애의 표본으로 언급되고 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톨스토이는 말년에 그리스도 정교회에서 파문당했다고 한다. 이것은 그가 그만큼 특정종교에 경도되지 않고 인류보편의 종교를 추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례라고 할 수 있겠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는 일년을 시작하는 첫날 첫장에 '그리 중요치 않은 평범한 것을 많이 알기보다는 참으로 좋고 필요한 것을 조금 아는 것이 더 낫다.'고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 날 마지막 글귀에 '시간이라는 것은 없다. 있는 것은 오직 무한하게 작은 현재뿐이다. 그리고 그 현재 속에서 인간의 삶이 영위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정신력을 그 현재에 집중시켜야 한다.' 고 쓰고 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가 걸었고 또 이제 제시하고 있는 인생의 해답. 그것을 받아 들이건 거부하건 각자의 자유이지만 살아가면서 가장 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대한 한 예시를 톨스토이가 제시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이제 인생이란 무엇인가라고 다소 난해하게 묻지 말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의미있게 살아가는 것인가라고 다소 좁혀서 구체적으로 물어본다면 그 하나의 해답이 이 책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제시되어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일년동안 아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잠깐씩 만났던 톨스토이와 이제 당분간 작별하려고 한다. 그동안 아침을 다소간 경건하게 시작하게 해주었던 톨스토이. 앞으로도 든든한 동반자가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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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오르는 길
손재식 지음 / 그물코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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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 모두는 어차피 죽어갈 목숨들, 매 순간 치열하게 살다가 가고 싶은 생각이야 누구에겐들 없을까마는 그게 어디 그리 쉬운가. 일상의 권태속에 내던져진 생이 너무 초라하고 불쌍하게 느껴질 때마다 어디 한번 자신의 삶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보고 싶은 마음 또한 마찬가지겠거늘 그게 결코 만만한 것이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그런 삶을 살다간 사람들을 동경하기도 하고 그들의 삶을 추앙하기도 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 삶이라는 것이 대부분 허점투성이요 공허한 시간들로 채워지고 마는 것을...... 이 책속의 젊은 사내들의 삶 또한 크게 다를 것이 무어 있었겠는가. 그들의 대부분의 일상도 나른하기는 마찬가지였으리라. 허나 벼랑에 매달려 자일을 타고 바위벽을 혹은 설벽을 오를 때만큼은 분명 달랐을 것이다. 아니 거기에 다가서려고 스스로를 단련해 나가는 동안의 자세는 우리네 따분한 일상과는 달라도 한참 달랐으리라. 그건 한밤중에 따뜻한 이불속을 빠져나와 쩡쩡울리는 칼날 같은 추위의 벼랑속으로 사라져가는 것과 아침 늦게까지 이불을 땡겨가며 잠속의 조그만 즐거움을 버리지 못하는 것만큼의 차이일까.

삶과 죽음이 수직으로 교차하는 절체 절명의 순간에 그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아니 죽음의 사신이 코앞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숨가뿐 벼랑으로 몸을 내던지는 그 몸짓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들이 그토록 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유였을까. 땅에 메인 자들의 숙명을 거부하고 버둥거리며 정상으로 기어 오르는 것. 그것은 시인 김수영의 시구대로 '자유'이면서 '비애'인가. 알 것 같으면서 모를 것도 같다 어쨌거나 이 광포한 자본논리의 시대를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들의 짧았지만 명징한 삶은 긴 울림을 주는 것 같다.

한국에 알피니즘의 대중화 바람은 있어도 머메리즘은 소리 없는 것으로 알았던 내게는 그들이 있었음이 한국 산악인들의 자랑이요 희망이 아닐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 어차피 나이 먹고 늙어 가는 내가 그들처럼 자유를 찾아 험난한 바위벼랑에 매달릴 수는 없는 일, 산이 아닌 일상속에 매몰되어 살아 가더라도 생활속의 머메리즘은 무엇인지 반성하고 찾아봐야 하겠다. 그들을 알게 된 것이 큰 기쁨이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그들 세명의 산사나이들과 같이 탈레이 사가르에 도전했던 지은이의 일기 형식으로 되어있는 이 책은 등산용어에 대한 충실한 설명과 풍부한 사진들로 해서 더욱 실감나게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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