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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산
라인홀트 메스너 지음, 김성진 옮김 / 이레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벌거벗은 산은 히말라야의 명봉 낭가파르밧을 말하는 것으로 험난한 수직의 암벽으로 인하여 눈이 쌓이지 않아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산이기에 그 곳을 등정하는 일은 그만큼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그 벌거벗은 산 낭가파르밧은 독일 등반대의 한과 열정이 서린 산이기도 하다. 이 산이 초등되기 전에 수십명의 등반대가 숨져간 비운의 산이며 그만큼 더한 열정을 가지고 오르려고 시도한 산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메쓰너 역시 1970년 꿈에도 그리던 독일 낭가파르밧 원정대의 일원으로 동생과 함께 선발되어 낭가의 등반로 중 가장 험하다는 루팔벽을 통해 낭가를 오르게 된다. 이 루트는 아직까지도 재등이 이루어지지 않을 만큼 험한 벽이라고 한다. 메쓰너에게는 아직 그가 낭가를 오르기 전까지 알프스 등지에서 펼친 화려한 등반경력도 모두 낭가파르밧을 위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마치 헤르만 불에게 낭가를 오르기 전까지의 등반행위가 그러했듯이.
숙명인지 메쓰너와 헤르만 불이 올랐던 저 낭가원정대의 대장은 동일한 인물. 헤르리히코퍼박사였다. 그는 낭가에서 죽어간 이복형 메르클이 그랬던 것처럼 원정대를 게르만족 특유의 충성심과 복종을 요구하는 일사불란한 조직으로 통제하길 원했다. 등반이라는 현실보다는 메르클의 유지를 받들어 낭가를 정복하려는 야심가였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등반의 순수성과 단독자로서의 성향이 강한 두 사람과는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았다.
어찌됐건 메쓰너는 우여곡절 끝에 정상으로 향하게 되고 마침내 낭가 등정에 성공하며 처음부터 의도하지 않은 종주등반까지 시도하게 되지만 하산길에서 등반파트너이자 동생인 귄터를 잃는 슬픔을 겪게 된다. 이 충격으로 인하여 무려 30년이 지나도록 저자는 낭가파르밧 루팔벽 초등정에 관한 사실에 침묵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이 책은 여러면에서 기존의 산악도서들과 차별된다. 우선 낭가의 등반과정이 세계 산악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하는 저자와 죽은 동생 그리고 당시 원정대장 및 대원들의 일기등을 통해서 교차 기억되고 있다. 메쓰너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부분에 동생의 일기 그리고 당시 메쓰너의 불신을 사고 있던 원정대장 헤르리히코퍼 박사의 일기등 여러 사람의 기억과 관점으로 이 책을 구성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낭가의 등정을 시도했던 사람들과 그들의 등정역사를 훗날 머메리즘의 창시자로 불리는 머메리로부터 시작하여 이후의 고난의 등반역사까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낭가를 둘러싸고 펼쳐진 등정사를 압축하여 볼 수 있도록 소개하고 있다. 그리하여 메쓰너가 이룩한 등정의 의미도 전체적인 입장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동생 귄터와의 추억, 그리고 그의 부재에 따른 회한에 책은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벌거 벗은 산. 다른 어떤 산 보다도 저자에게 감격과 상처를 동시에 안겨 주었던 낭가파르밧. 죽음의 산 낭가파르밧 원정대의 베이스캠프 도착부터 정상등정까지 그리고 하산까지 이어지는 등반일지는 이렇듯 흥미롭기 그지없다. 원정대장인 헤르리히코퍼 박사 자신도 자신의 이복형 메르클이 앞선 낭가 원정에서 숨져갔기에 남다른 신념을 가지고 원정대를 이끌고 있었다. 형의 유지를 온전히 이어 받은 헤를리히코퍼는 메쓰너의 표현을 빌리자면 '명예와 꿈과 오만을 위해' 낭가 원정대를 저돌적이고 일사불란하게 통제하기를 원했다. 형처럼 그도 일생의 사명을 낭가원정에 두었던 사람이다. 당연히 원정과정에서 정상 등정조인 저자와 원정대장사이에 불신과 반목하는 일이 자주 생겼다.
사실 메쓰너가 이 원정에 참가하게 된 것은 헤르리히코퍼박사의 배려에 의한 것이었지만 처음부터 메쓰너는 그를 불신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원정대를 이끈 헤르리히코퍼였지만 그의 한계는 메쓰너의 말대로 선두에서 루트를 열고 돌파하는 등의 산행경험이 한번도 없다는 것이었다. 원정대 대장으로서 베이스캠프에서 작전을 짜고 지휘하는 것에는 능했지만 생존이 걸린 현장에서의 경험이 없었기에 이를 등정을 성공시키기 위한 작전에 충분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점이 메쓰너를 위시한 공격팀에게 불만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1953년 낭가를 최초로 올랐던 헤르만 불도 그의 자서전에서 이와 같은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다. 최후로 주어진 상황에서 등정하기에 가장 적기라고 판단하고 등정을 시도하려는 공격조에게 원정대장은 이렇다할 얘기없이 계속 철수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철수하지 않으면 보급도 중단하겠다고 엄포를 놓기까지 했다. 그러나 헤르만 불은 그런 명령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정상등정을 시도해서 결국 지구가 존재한 이후 한번도 사람에게 발자국을 허락한 적이 없던 낭가의 정상을 정복하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말로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지만 말이다. 이 등정에서 아마 실패했다면 그 뒤의 비난을 감당키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헤르만 불은 더 이를 악물었는지도 모르지만.
이런 점은 등반에서뿐만이 아니라 치열한 현대를 살아가는 이땅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도 자주 마주치게 되는 상황이라고 하겠다. 지휘자에게는 분명한 목표와 그 목표를 향한 열정이 제일 중요하다. 그러나 이를 성공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는 방법에 있어서 최일선의 경험과 현장의 느낌을 얼마나 그 결정에 적정하게 반영하는가가 대단히 중요한 성공의 변수이다. 지휘자가 그런 현장의 경험을 이미 가지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수시로 변하는 상황을 반영하기에는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체험이 아닌 보고를 통하여 현장을 파악하는 지휘부로서는 올바른 결정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물론 대장은 단순한 공격자와는 입장이 다르다. 그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상황을 판단하여야 한다. 즉 보급품도 챙겨야하고 이를 운송할 셀파들의 상황 그리고 다른 대원들의 몸상태, 전체적인 일정, 시시각각 변하는 기상상태 등 다양한 변수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 또한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어쩌면 흥분상태에서 맹목적으로 공격을 시도하려는 현장의 공격조와는 달리 상황을 전체적인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최종적인 목표가 등정이라면 정상에 깃발을 꽂는 것이 목적이라면 최선두에 나가 있는 공격조의 의견이 제일 중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원정대장 헤르리히코프에게는 모든 것이 자신의 통제하에 있어야 했다. 일사불란한 원정대야말로 어쩌면 등정보다도 중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53년 헤르리히코퍼와 헤르만 불에게 일어났던 상황이 메쓰너에게도 재현되고 있다. 1970년의 원정에서도 최선두에서 루트를 개척하고 있는 대원들에게 베이스캠프에서 무전을 통하여 지시가 게속 전달되고 또 현장의 얘기가 베이스캠프로 전달되고 있지만 결정은 결국 대장의 몫이 되고 현장의 미묘한 심리상태나 상황변화는 등정 결정에 적극 반영되지 못했던 것이다.
원정도 막바지로 치달아 시간은 계속 흐르고 대원들이 지치거나 포기할 무렵 원정대에게 최후의 기회가 찾아온다. 마지막 기회. 메쓰너는 마지막 캠프지인 제5캠프를 떠나 정상공격에 나선다. 이 부분은 책에서도 다소 애매하게 처리되어 있다. 메쓰너가 대장으로부터 공격지시를 명확하게 받은 것은 아닌 듯하나 하여간 메쓰너는 과감하게 정상으로 향한다. 그것도 단독으로. 자일도 없이. 어쩌면 메쓰너는 지상 최대의 벽인 루팔벽을 등반하는데 있어 처음부터 베이스캠프의 의중은 크게 고려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싶다. 아니 처음부터 헤를리히코퍼와 메쓰너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당대 최강이었던 등반실력을 가지고 있던 메쓰너는 현장에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옳다고 생각했다. 그 점은 그가 정상등정 후 왔던 길로 다시 하산을 하지 않고 전혀 다른 쪽으로 하산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물론 그는 여러차례 그것은 불가피한 것이었으며 아우인 귄터가 탈진한 상황에서 유일한 대안이었다고 강변하고 있다.
하여간 정상으로 떠난 뒤 얼마 안 가 메쓰너의 동생 귄터도 형의 뒤를 맹렬하게 따라 붙으며 정상으로 향한다.(이때의 무리한 운행이 귄터를 탈진상태에 몰아넣어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한 것으로 보인다.) 둘은 정상을 얼마 남겨 놓고 재회하여 나란히 낭가의 정상을 밟는다. 그러나 죽음의 산이라는 낭가는 온전히 그들을 다시 지상에 내려놓기를 거부한다. 이미 탈진한 귄터는 올라왔던 험한 하행길을 한사코 마다하고 조금 쉬워 보이는 디아미르 계곡쪽으로 하산하기를 고집하고 메쓰너는 이에 동의한다. 이 대목에서 메쓰너는 후회하고 있다. 동생의 말을 무시하고 그냥 왔던 길로 하산하였다면 결과적으로 살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이 갈림길이 죽음이냐 삶이냐의 극단적인 선택의 길이었던 셈이다. 결국 그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디아미르측벽으로 하산하게 되고 아직 체력이 남아있던 메쓰너와는 달리 귄터는 계속 처지다가 결국 만년의 빙하속으로 사라져간다. 위험한 구간을 돌파하였다는 안도감이었는지 메쓰너는 동생과 끝까지 동행하지 아니하고 디아미르 계곡 아래 첫 번째 샘에서 만나기로 하고 앞서 걸어갔다. 이미 체력이 다해버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자꾸 처지는 동생을 뒤에 두고 먼저 내려간 듯하나 결과적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샘에서 동생을 만나지 못한 절망감에 더하여 며칠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반 실성한 사람이 돼버린 메쓰너는 동생을 찾아 헤메며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고 결국 살기 위하여 본능적으로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다가 원주민들을 만나 극적으로 구조된다. 발가락은 다 썩어 들어가고 얼굴은 귀신의 몰골을 한 채로. 이렇게 환희의 정상에서 순식간에 지옥으로 추락했던 두사람 중 한사람은 그나마 살아 돌아왔으나 또 한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갔다. 메쓰너에게 어찌 회한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낭가는 그에게 한평생 잊을 수 없는 영광과 상처를 동시에 안겨준 것이다.
책을 통하여 메쓰너는 원정 대장과 대원들에게 서운했던 속내를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등정후 하산시 그러니까 귄터가 탈진하여 좀더 쉬울 것으로 판단하고 내려오던 디아미르 계곡방향의 정상부근에서 함께 비박하고 난 다음날 오전 비박지를 조금 벗어난 곳에서 원래의 등정로를 내려다보던 메쓰너는 정상을 향하고 있는 다른 대원들을 발견하고 구조의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그들이 알아들었는지 바람소리로 인하여 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그들이 메쓰너를 보고 그의 목소리도 들었으나 각자 상황을 다르게 해석했는지 하여간 이후에 발생한 결과는 전혀 예상밖으로 전개된다. 메쓰너일행이 실종된 이후 헤르리히코퍼박사가 이끄는 등반대는 메쓰너일행에 대한 충분한 수색도 없이 그들을 이탈자로 생각하고 다른 대원들이 등정후 하산하자 철수해 버린 것이다. 이점이 메쓰너에게는 크나큰 상처로 남아 있는 듯하다.
책을 읽는 독자로서는 등반대를 이끄는 대장의 입장도 이해가 가기는 하나 그래도 메쓰너의 손을 들어 주고 싶다. 대장의 입장에서는 메쓰너등이 등반내내 단독자로서 튀는 모습으로 보였을지 모르나 메쓰너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충분하게 수색해주지 않은 원정대에 서운한 감정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메쓰너가 실종된 기간은 1주일 정도인데 그 기간동안 대장은 메쓰너의 실종 후 예상되는 하산로에 대한 적절한 수색이나 구조노력을 하지 않았다. 헤르리히코프에게는 헤르만 불처럼 메쓰너도 자신의 꿈과 야망을 다 바쳐 만든 낭가원정대에 한 이단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기희생이 중요하고 절체절명의 고독과 싸우는 등산가들에게도 위기와 상황에 따라 이런 세속적인 면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은 쓰리다.
메쓰너는 이후 아픈 상처와 싸우듯 치열한 등반을 계속하여 현대등반사에서 그 누구도 이루기 어려운 과업을 히말라야에서 이루게 된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매 순간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것이다. 히말라야 등반같은 극한의 등반에서 마주치게 되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나아가느냐 물러서느냐 하는 혹은 이쪽으로 가느냐 아니면 저쪽으로 우회하느냐 하는 것들.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선택의 문제는 생사를 가르게 된다. 그 가운데 오직 준비된 강한 자가 살아남을 확률이 많은 것은 당연하리라. 그러나 삶과 죽음의 문제는 이미 인간의 영역을 떠난 것이다. 낭가를 메쓰너의 뒤를 바로 이어 등반했던 동료들이 몇 년 후 알프스에서 추락사하거나 자살한 것을 보면 말이다.
산은 많은 젊은이들의 영혼과 청춘을 앗아간다. 산이라는 제단에 기꺼이 몸을 바치는 것이다. 그러나 메쓰너의 낭가파르밧 이야기를 읽다 보면 산에 바친 청춘들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보다는 삶의 철학적인 문제와 싸우는 자의 처절한 내면과 현실을 쓰라린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낭가의 경험 이후 메쓰너는 등반자체보다는 등반을 통해서 느끼는 죽음이라든지 고독이라든지 하는 사람의 내면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것을 보아도 낭가의 경험이 이후의 그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산은 그 기슭을 기어 오르는 사람들에게 거울과도 같다. 육체적인 한계를 보여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를 지탱하고 나아가게 하는 정신의 한계까지도 비추어 준다. 더구나 그 산이 죽음의 산 낭가파르밧임에야.